|
최난도 미해결 철학 문제 4선 — 그리고 시도해 볼 만한 해법 약간
의식에서 무, 그리고 그 너머까지, 이들 사안에 인류 최고의 지성들은 여전히 당혹스럽다. 앞으로 과연 풀리기는 할 것인가?
Credit: Paul Mills / Pexels
핵심 체크
철학은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있어 왔다. 그런데 이 분과 학문이 다루는 큼직한 문제 몇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이다. 정말이지, 일부 안건은 인간 이해의 범위를 넘어설지도 모른다. 이 글은, 철학자들이 수천 년 동안 쩔쩔매온 주요 문제 넷을 다룬다.
탈레스가 우주 만물이 물로 이뤄져 있다고 주장한 이래로, 철학은 오랜 세월의 여정을 밟아왔다. 이 과정에서 철학자들은 묘수를 안출했고, 세상은 풍요로워졌으며, 우리는 우리가 사는 우주를 더 잘 파악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유덕한 삶을 조금쯤 실천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철학은 많은 경우, 대답이기보다는, 외려 질문과 방법에 더 가깝다. 오래된 문제임에도 여저히 미해결 상태인 경우도 꽤 된다.
이하에서 우리는 철학의 미해결 난제 넷을 살펴볼 것이다. 그 각각에 대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것이다. 이 사안은 왜 그렇게 어렵지? 제안된 해결(안)은 또 왜 그렇게 불만족스럽지?
1. 의식이란 난문
의식은 난문 중의 난문이다. [유물론 내지 물리주의에 입각했을 때,] 물리적 상태가 [상승적으로, 감각하고, 지각하고, 의식하고, 이를 질료로 다수준적 생각과 감정을 주조해 내는] 의식하는 정신 상태를 창출하는 이유를 여전히 우리는 알지 못해, 묻고 궁리한다. 우리는 물리계를 그럭저럭 잘 안다. 하지만 이 '골때리는' 의식 난문은, 그저 '어떻게'를 묻는 것 이상이다. “이들 기능 수행에는 왜 경험이 동반되는가?” 가령, 우리는 몸이 물리적으로 '통증'을 느끼는 양상을 안다. 그런데, 이 물리적 반응이 우리가 '고통'[한국어의 '통증'과 '고통'은 영어로 다 pain이다. 물론 영어도 더 나눌 수 있다. suffering가 냉큼 떠오른다.]이라 부르는 개인적 주관적 경험을 창출하는 이유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유럽, 인도, 중국 철학을 보면, 이 문제의 다양한 변형태가 수백 년 전부터 논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위에서 언급한) 이 사안의 현행 버전은 호주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의 1995년 문제 제기일 것이다. 시도해 볼 수 있는 해법으로 여러 이론이 제출되었고, 오랜 만에 먼지를 털고 꺼내온 것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서 자신의 결정적 유효성을 증명한 것은 없다.
'약한 환원주의자'(weak reductionist)들은, 의식이 더 기본적이고, 비의식적인 부분들로 쪼갤 수 없는 현상이지만, 과학의 보충을 받는다면, 물리 작용으로 특정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바꿔 말하면, 물리적 사건 내지 사태가 다양한 뇌의 상태를 야기하고, 계속해서 이를 바탕으로 믿음직하게 정신 상태가 발생하면, 뇌 상태와 정신 상태가 동일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거다. [각인이 물리적으로 동일한 뇌 상태여도, 정신 상태는 제각각일 수 있을 거라는 의심이 뭉게뭉게 피오른다. 제각각의 상향적(bottom-up) 경험 질료를 '동일한' 물리 기계가 취급할 것이다.] 이 명제에는 어떤 단순함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문제를 회피한다. (물리적) 뇌 상태가 곧바로 정신 상태를 야기한다면, 도대체가 왜 복수의 (물리적) 뇌 상태는 다른 모든 물리적 상태와 다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엉성하군. 상태 경우의 수를 어떻게 취급하는 거야?]
팬사이키즘(panpsychism)이라고, 한국어 범심론을 옹호하는 철학자가 일부 있다. 만물에 적어도 약간의 의식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 견해가 옳다면, 모든 물질에는 의식 내지 의식 잠재력이 있는 셈이다. 물질임의 고유한 일부로서 말이다. [물질을 물질이라 부를 수 있는 내재적 자격 특성이란 말이다.] 그런 식이면, 이 문제에서 '도대체 왜' 사안은 덜 중요해진다. 게다가, 만물에 최소한의 의식 능력이 있다는 생각은 반직관적이고, 의자가 경험이란 걸 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철학자도 많지 않다.
그리하여 나오는 것이, 소위 '신비주의' 명제이다. 이 사안은 현 단계에서 풀 수가 없고, 아마도 인간 입장에서는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라는. 철학자 콜린 맥긴(Colin McGinn)이 영원히 풀 수 없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그는 우리의 마음이 생겨먹은 걸 보면, 이 문제에 답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의 입장은 이보다는 낙관적이다. 과학이 이 사안을 해결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고 보는 거다.
다른 많은 철학 난제처럼, 이 문제가 당초 존재하는지와 관련해서도 완벽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2020년의 한 조사를 보면, 29.7퍼센트의 철학자가 이 난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62.4퍼센트는 의식이 골치 아픈 사안으로 떡 하니 자리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2. 무가 아니라, 도대체 왜 뭔가가 있는 것인가?
[파르메니데스의 변주인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주장에 의하면, '무가 아니라,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라, 뭔가가 대체 왜 존재하는가?'는 형이상학의 근본 문제이다. 요컨대, 대다수의 사람은 기대하고, 예상한다, 뭔가가 존재하면, 거기에는 원인[그리고, 목적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이유(가)]이 있다고 말이다. [완벽한 해명은 아니겠지만—절대성과 보편성이란 개념 자체가 완벽하지 않고 상대적일 뿐이다, 우리 인간의 처지에서는—, 진화학을 바탕으로 하면, 초보적이지만 설득력 있는 해명을 할 수 있다. 생존과 번식 말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실재의 원인은 무엇인가? 기실 이 문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조차 어려울 수가 있다.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해명하는 게 현 시점에서 불가한 것으로 증명되어도, 아마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없음, 비존재, 무'(nothing)는 불가능하다고. '뭔가'(something)는 정의상 있어야만 한다. 빈 공간이 없다는 그의 견해를 현대 과학도 어느 정도 지지한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논의는 이렇다. [흄, 나름, 똑똑한듯!] [앎의 작용이 가서 닿는다는 의미에서] 촉지(觸知) 대상[object]인 것(thing)들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관념 (구조)는, 과학적 증거에서 비롯했다기보다,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모든 것에 원인이 있더라는 우리의 체험에서 차라리 비롯했다! 과연 그렇다. 이런 경향이 우주 전반에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우주가 그냥 어쩌다가 생겼다는 발상이 지지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불만인 사람들도 있다.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일단은 정치 철학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이쪽으로도 몇 가지 제안을 한다. 다중 우주가 있을 수 있다는 게 그 첫 번째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우주가 여기 포함된다. 그러면서 그는 상정했다, '무 또는 없음'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 확률이 '뭔가'가 존재할 확률보다 훨씬 작다는 거다.
[숟가락쟁이]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도 관련해서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우주의 존재를 “외면할 수 없는 [잔인무도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달리 뭘 알아도, 해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외면할 수 없는 잔인무도한'이란 형용사를, 그는 동원했다. 사실 러셀의 견해는 드문 게 아니다. 오스틴 소재 텍사스 대학교의 로이 소렌슨(Roy Sorensen) 말마따나, 이 사안의 경우 답하는 게 절대적으로 불가하다고 보는 철학자들이 있다.
3. 테세우스의 배 [문제]
이 안건은 적어도 (서력 기원 1세기인) 플루타르코스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결국은 정체성, 더 풀어서 '시간적 동일성' 사안이다. 마음의 철학을 논하는 현대에도 여전히 운위된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도 하다.
일단, 이야기가 유명하고 재미있다. 아테네인들이 그들의 선구이자 영웅 왕인 테세우스가 탄 트리레메 배(고대의 갤리선)를 계속 유지하기로 결의한다. (테세우스가 아테네의 청년들을 데리고 라비린스 미로를 탈출한 사건도 재밌다.) 배를 유지하는 건 좋은데, 문제가 있다. 부분품이 파손 망실되고, 한 번에 하나씩, 그들은 교체를 단행한다. 과연 그렇다면, 이 배가 더 이상 테세우스의 배이기를 그만두고, 그와는 다른 배가 되는 출발 시점은 언제일까? 이 철학적 난문을 후대 사람들은 한 번 더 꼰다. '떼어낸 낡은 부분품을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가, 그걸로 새 배를 만들면, 그 배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떤 배가 진짜 테세우스의 배인가?
철학자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의 주장이다. 대상이 있을 때, 그 대상을 구성하는 여러 다른 부품은 다른 여러 시대에 존재한다!,고 말이다. 이 경우에, 문제의 배는 특정 시대이고, 특정한 공간을 점유한다. 훨씬 더 쌩쌩할 수 있는 이 배의 돛대는 한정된 시간 동안 그 공간의 특정 부분을 점유한다. 대상은 시간과 공간 둘 다에 존재한다. 철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말할 수 있다, 상이한 부분품이 시간적으로 모두 뚜렷한 개별 주체라고. 물론 그런 식이면, 하나의 대상이 동시에 두 곳에 있다거나, 두 개의 대상이 시간을 거역하며, 모종의 방식으로 한 장소에 중첩돼 있다고 진단해야 하는 난관은 피할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뭔가의 사태 진행을 설명하려면, 때로 많은 시간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물이 (존재하는 게) 필요해진다.
라이언 와서먼(Ryan Wasserman)의 또 다른 해법은, 제시되고서 가장 보편화된 대답이다. 이 배는 만드는 데 들어간 재료 물질과는 다른 실체이자 대상이다. 방금 말한 두 가지가 동시에 한 장소를 점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명제는, 배가 부품들과 같으냐 하는 문제를 분명 직접 다룬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다음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두 개의 상이한 대상, 그러니까 배와, 배를 만든 재료가 동시에 한 장소에 있음을, 우리가 인정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노움 촘스키(Noam Chomsky)는 이 사안이 다음과 같은 흔한 가정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했다. 우리 마음의 진실(眞實)인 게 이 세계의 진리(眞理)이기도 하다는 전제 말이다. 한국어로 '실재론' 또는 '현상론'이라고 하는 '외부주의'(externalism)인 것이다. 촘스키가, 이 난문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배의 상대적 동일성과 관련해서는 도대체가 알려주는 게 하나도 없다고 얘기하는 이유다. 일부 인지 과학 동아리에서는 분명 이 견해가 인기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안이 해결된 것 같지는 않다.
4. 경계 획정 문제
[결국, 집합론과 그래프 이론]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방법 사안은, 최소 기원전 5세기 인물인 소크라테스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문제는 철학적으로만 중요한 게 아니다. 법정 심리로 관입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뭘 과학으로 칠 거냐, 뭘 철학으로 칠 거냐, 또는 뭘 다른 여느 의미 있는 학문 분야로 칠 거냐, 더불어서 뭘 터무니없는 비상식이자 넌센스로 할 것이냐의 규정 사안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말마따나, 분석하고자 하는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어도 무리없이 작동하는 답을 찾는 일이 꽤나 어렵다는 게 난경(難境)이다. 물론,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대 철학은 몇몇 탁월할 수도 있는 해법을 제출했다.
토머스 쿤(Thomas Kuhn)의 해법부터 보자.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은 '패러다임'(paradigm)으로 규정된다. 과학자들이 이 패러다임[구조 틀, 짜임새]에 암암리에 동의하고, 그 속에서 연구한다는 보조 정리가 뒤따른다. 패러다임에 내부적으로 들어맞는 것은 뭐든 '과학'이고, 그 바깥에 있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패러다임이 완벽할 필요는 없다. 뉴턴주의 물리학은, 미해결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우위를 점한 패러다임이었다. [<<프린키피아>>의 그 유명한 구절, “각자 숙고해 보기 바란다”!] 이런 문제들이 증폭되었고, 아인슈타인주의 물리학이 득세했다. 과학자들은 [안정기인] 대부분의 시간 동안 특정 패러다임 안에서 연구 활동을 벌이는 '문제 해결자들'이다. 기성 패러다임은 패러다임 변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전적으로 올바르다. 그러다가 문제점이 누적되어, 능동적 개선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쿤은 일갈했다. 많은 이가 쿤의 관념 체계와 사상을 지지했다. 제 사회 과학에서 그 쓸모가 입증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사상은 상대주의적이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칼 포퍼(Karl Popper)는 과학의 현저한 특징으로 반증 내지 논파 가능성을 꼽았다. 일반 상대성 이론처럼 과학 이론이라면 모름지기, 틀렸음을 보일 수 있는, 예측을 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이론의 경우를 보면, 중력이 빛을 구부릴 수 있고, 바로 이 양상을 망원경으로 관측할 수 있다는, 예측을 한다. 반면 사이비 과학은 반증이란 걸 할 수가 없다고, 그러니까 틀렸음을 입증할 수 없다고, 포퍼는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가 전형적인 예로 든 것이, 정신 분석과 마르크스주의 역사 이론이다. [포퍼의 논의도 사실 한물 갔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신이 어떤 데이터를 들이밀어도, 이들 이론은 언제나 올바른 것처럼 보인다.
이 견해가 인기도 많고, 꽤나 유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비판도 많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반증할 수 있는 주장을 하는 것이라면, 그게 뭐든 과학으로 쳐줄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최근의 이론도 보자. 빅터 모버거(Victor Moberger)가 개진한 이론은 영어로 불쉿(bullshit), 그러니까 '허튼소리'란 직설적 개념을 중심으로 한다. 허튼소리란,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이 기본이다. 사이비 과학과 사이비 철학은 진리에 대한 관심 결여로 특정해 낼 수 있다. 가령, 지구가 평평하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에 틀렸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걸 미는 사람들의 다수는 사실, 논리, 증거에 관심이 전혀 없다. 다른 많은 사이비 과학과 관련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라면, 안될과학의 궤도가 '인류 달 착륙 뻥' 설을 반박하는 데에 분주한 것 같다. 자신의 사명을 이 정도로 설정하고 열내는 걸 관전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 뭐 ……]
이 이론은 신삥이고(2022), 많은 사람이 토론한다. '허튼소리' 이론은 포괄적 견해를 취하지만, 각종 주장을 펴는 사람들의 특징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과학의 정체를 획정하는 것과 좀 무관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정병선 옮김/sumbol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