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이모작 인생
어린시절 주근깨와 코망뫼 소리 때문에 심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지금은 고칠 수 있지만 가난했던 시절이라 병원에 가기가 어려웠고 치료 해도 의료기술이 부족하여 완전히 고칠수 도 없었다.
주근깨부터 적어본다, 어른들은 내얼굴 보면 주근깨가 있다고 말했다. 잘 생긴 얼굴에 주근깨가 여기저기 붙어 있어 버렸다고 하여 못난 녀석이라고 여러번 말씀하셨다. 주근깨가 죽은깨로 알아들었고 참깨 들깨처럼 생각했다. 거울을 보면서 확인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때 이모집에 가서도 이모가 얼굴에 주근깨가 왜 있느냐고 핀잔 하였다. 주근깨가 생기는 이유를 비타민 C가 부족해서 그런가 생각하였다. 잘못 알고 있었고 선생님 또는 어느 누구도 생긴 이유를 말하지 않했다. 나중에서야 자외선으로 인한 멜라닌 색소의 영향과 누구나 생길 수 있음을 알았다. 70년대 방송국에서는 연말 10대 가수 선발 프로그램을 하였고 대상을 탄 어느 여가수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는데 주근깨가 보였다.
주근깨가 완전 사라졌다. 부모님등 모든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전쟁 때문에 가난했고 먹고 살기 위히여 생업이 우선이어 학교 다닐 수 없었고 지금처럼 건강에 대해 무관심한 시절이었다. 주근깨 생기면 피부과에 가서 제거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다음은 코망뫼 소리이다. 또한 말을 더듬어야 했다. 주위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고통을 받았다. 어린 시절 코를 많이 흘렸다. 담임이 내 코에 종이대고 코를 풀어 준적도 있었다 그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4학년 5학년 올라가서 코에서 코딱지가 자꾸 생기고 코망뫼 소리를 하였고 콧물이 질질 흘려야 했다. 어머니는 약국가서 바르는 약을 사왔고 발라도 계속 코딱지가 생겼다 나는 숨쉬기가 너무 답답해 손으로 코딱지를 뜯어 입에 넣어 먹었다. 이런 행위로 부모님한테 엄청 꾸중을 들었지만 계속 그 짓을 하였다. 5학년 겨울방학 어느날 아버지한테 뺨을 맞아 코피가 터졌고 어머니는 보다 못해 근처 이비인후과로 가서 치료를 받게 히였다. 의사는 축농증 진단을 내렸다. 치료방법은 잔인했다 콧속으로 바늘을 넣어 호스로 연결하고 세수대야를 들게해서 고름 뺐는데 고통이었다.
그러나 여러번 다녔고, 병원도 바꾸었지만 소용이 없었고 종합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는데 의사의 지시로 X-Ray 찍었다. 의사는 어머니에게 축농증 아니라고 하였고, 가만히 있던 나를 보더니 코딱지 뜯어먹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그 짓도 멈추었다. 그러나 코망뫼 소리는 계속 나왔고 중학교 가서도 주위로부터 오해를 받았고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콧속에서 썩는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중학교때 치료 한다고 약을 먹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고통은 이것만 아니었다. 코피를 자주 흘려야 했고. 약국에 가서 코피 멈추는 약을 사먹어야 했다. 누구랑 싸우다가 주먹으로 코를 얻어맞은 이유도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어머니는 날달걀 2알을 그릇에 담아 소금을 약간 넣어 마시게 해주었다. 계속 먹었더니 코피는 거짓말처럼 더 이상 흘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군대를 갔다. 화생방 훈련때 방독면 쓰기가 괴로웠다. 헐렁하게 썼고 가스를 마셔야 했다. 유격훈련을 갔다. 마지막날은 화생방훈련인데 방독면을 쓰고 들어갔다. 전우들이 가스를 안마시려고 일부로 A급 방독면을 가져갔고 가스실로 들어갔다, 다들 가만히 있는데 나만 끙끙거렸다. 가스실로 나와 고참한테 불려가 내 방독면 보자고 하여 점화통을 보았는데 아무 이상없었고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점호시간에 입을 꼭 다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고참한테 혼나야 했고 언덕을 올라가면 숨을 크게 쉬어야 했다. 고참들은 살쪘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헌혈차가 왔는데 헌혈을 하여야 했다. 휴가 나와 이비인후과에 갔지만 의사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고 매일 매일 치료를 받으야 하며 쉽게 낳지 못한다고 하였기에 치료를 받지 않했다.
직장에서도 축농증이 있냐고 오해를 받았다. 30대 후반부터 고혈압 약을 먹기 시작하였고 2014년 가을 갑자기 혈압이 높아졌고 주치의는 이비인후과 000교수에게 가서 치료 받으라고 하였다. 진단을 받으니 코뼈가 휘어졌다고 하였고 뼈를 펴야하는 수술을 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다양한 정밀진단 검사를 받았고 수술을 받았다. 성공이었고 2-3달은 통원치료 받았다. 코의 고통은 완전 사라졌고 정상혈압이 되었다
반평생을 코의 고통속에서 살았다. 원인을 곰곰이 생각 했다. 할머니는 태어나자마자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하였고 의사는 신생아를 살리려고 도구로 코를 통해 숨을 쉬게 하였다고 한다. 조금 지나 작은소리로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콧뼈가 휘어지지 않았나 생각 해본다.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기였다. 집안 친척들 경우 첫 아이들이 죽었다고 하는데 나만 살았다. 차라리 죽었다면 더 좋았던가 생각도 해보았다. 코의 고통이 나를 소극적 성격으로 만들었고 행동에 자신이 없어져 주위로부터 바보 같은 못난 녀석이라고 들어야 했다. 또하나는 이 풍진 세상을 산다는게 힘이 들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과 집안사람들 치료했던 의사를 원망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난과 의료 기술의 부족때문이었다. 나도 그렇지만 부모님들도 고통속에 살아야 했다. 수술후 어머니는 나보고 미안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운이 좋은 편이다. 그시절 소아마비 때문에 불구가 된 아이들을 보았고 장티푸스 때문에 후유증을 겪은 아이를 보았다.
이제는 내면의 응어리를 멀리 보내고 싶다. 아니 보내야 한다. 자신 없지만 계속 노력을 하고 있다. 지금은 직장서 퇴직하여 이모작 인생을 살고 있다 . 유튜브 동영상도 제작하고 있고 문학 강좌를 다니면서 시 혹은 수필 쓰고 있으며 전공인 과학과 관련 서적 및 유튜브 동영상을 꾸준히 보고 있다. 성당도 열심히 나가 활동 및 기도를 하고 있다. 이제는 어느 누구 나한테 흉을 보지 않는다. 아름답게 늙어가면서 웰다잉을 서서히 맞이 하려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