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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 Henry Ford (1863~1947)】「20세기 자동차 산업의 부흥을 선도한 거물」
자동차 제조 기업 포드 모터 컴퍼니의 창업자로 자동차를 대량 생산하는 데 최초로 성공해 20세기 자동차 산업의 부흥을 선도한 거물이다. 컨베이어 벨트를 활용한 생산 시스템을 본격화하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결합된 현대 사회 구조 '포디즘'의 어원이 된 인물이다.
존 달린저[2]라는 소년이 헨리 포드와 토론하던 중 소년은 평소부터 존경해 오던 노인인 포드가 교육제도에 대해 상당히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소년 존 달린저는 포드에게 “할아버지, 이젠 세상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현대’(modern)란 말예요.”라고 쏘아붙였다. 그 말을 들은 포드가 자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얘야, 그 ‘현대’를 발명한 게 나란다.”
1863년 미국 미시간 그린필드 타운쉽에서 윌리엄 포드와 메리 리토갓 오언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형제자매로 2명이 더 있었으나 사산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기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참고로 자동차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느려터진 마차를 타고 오느라고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토머스 에디슨과 교우 관계가 있었다. 업계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후 에디슨 주식 회사에서 일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 자신의 가솔린 자동차 개발 계획을 발표했을 때, 에디슨은 그것을 듣고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테이블을 쾅 치고는 "자네 듣던 대로 현명하군. 생각대로 가솔린 자동차를 만들어보게."[4]라고 격려했다고 하나, 원래부터 전기만 연구하고 살던 에디슨은 곧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포드는 에디슨이 지금껏 아내말고 세상에서 자신의 꿈을 이해해 준 두 번째 사람이었기에 크게 감명받았다.
이후에도 포드는 아내의 도움으로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았고, 끝내 자신의 이름을 딴 1903년 포드 모터 컴퍼니를 세웠다. 중간에 회사를 선전하기 위해서 레이싱 경기 등에 참여해 죽을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포드를 미국 최대의 회사로 만들어준 자동차 포드 모델 T는 에디슨이 발명한 에디슨 전지를 채용했다. 아무튼 그가 제작한 포드 모델 T는 값싸고 안전한 좋은 차였기에 여러 계층에서 사랑받게 되었다. 포드 모델 T의 성공으로 미국 자동차 업계의 시초점이 되었지만 그 후로도 너무 포드 모델 T에만 집착한 나머지 후발주자인 제너럴 모터스, 크라이슬러에게 선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그 유명한 검은색이기만 하다면 어떠한 색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라든가. 놀랍게도 모델 T는 당시엔 냉장고보다도 싸게 살 수 있었다. 물론 당시 냉장고가 그만큼 비쌌다는 이야기도 된다.
1913년에 컨베이어 벨트 생산 방식을 만들어 대량 생산의 기틀을 마련한 것도 유명하다. 사실 이것이 헨리 포드의 가장 큰 업적이자 산업 혁명의 정점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산업 혁명으로 얻어진 인류의 급격한 기술적 성과를 대중에게 널리 보급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인간조차 공장에서 찍어내는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는 신으로 추앙받는다. 심지어 기년법도 포드 모델 T의 탄생일에서 기원한 포드력을 쓴다. 컨베이어 벨트의 도입이 노동자들의 불만을 가져오자 그는 대신 노동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대폭 상승시켜 불만을 무마시키고자 했다. 그래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자 격렬하게 반대했다. 당시 철강 공장 노동자들이 하루에 12시간을 일하고 1달러[8]를 받았는데, 포드는 노동자들에게 하루에 8시간 일을 시키고 5달러를 주었다. 단순계산만 해봐도 기존 시급의 약 7.5배를 준 셈이니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임금인상인 셈. 다만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14년 이전에는 그냥 일반적인 노동자들은 평균 9시간 일하고 2달러 34센트를 받았다고 한다. 이 자료가 정확하다면 당시 철강 노동자들은 더욱 더 열악한 환경에 있었던 듯. 그 이후에는 일당 5달러 준 것은 맞다. 참고로 이 일당 $5은 헤드헌터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포드의 일당 5달러 임금 도입의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일단 컨베이어 벨트 등 일련의 기술 발전 덕분에 노동자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기계를 잘 다룰 줄 아는 숙련공의 존재가 중요해졌다. 많은 노동자들은 이제 임금만 잡아먹으면서 회사에 필요 없는 존재였고, 이들에게 일일이 기계를 다루는 법을 교육시키는 것도 문제였다. 또한 숙련공들은 일당에 따라서 공장을 옮기는 게 예사였고, 이건 품질관리와 생산력이라는 측면에서 공장주들에게 골치거리였다. 이를 한 방에 해결한 게 바로 1914년 일당 5달러 정책이었다. 필요 없는 인력은 해고하되, 필요한 인력에게는 고임금과 단축된 근로시간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되니 오대호 근처의 모든 숙련공들이 포드 공장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다른 공장들은 포드 자동차만큼 임금을 줄 수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계산적인 '애사심'이라는 것이 생겼다. 또한 이런 숙련공들 덕분에 생산성은 올라가게 되었고, 품질 컨트롤도 일정하게 되었다. 참고로 본격적으로 자동차 노동자조합이 탄생하고 노사간의 갈등이 격화된 건 1930~40년대지 이때(1910년대)는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마피아가 개입해 톰슨 기관단총으로 농성 중인 노동자 집단을 향해 실탄을 사격하기도 했다.
단, 알아둘 것은 처음에 포드가 5달러 일급을 주었을 때는 포드 자동차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타 업체들이 숙련공을 빼앗긴다고 엄청 걱정했고 포드 공장 정문에는 여기서 일하게 해달라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그때는 일자리 달라는 사람들이 문을 넘어서 공장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서 경비를 많이 고용했다고.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숙련공에게 그 정도의 임금도 주지 않을 정도로 미국의 노동 시장이 막장이었다는 이야기다.
얼마나 임금이 적었으면 숙련공들이 컨베이어 벨트의 부품이 되기 위해 담을 넘었을까. 실제로 일급을 5달러로 올린 2년 뒤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포드 종업원들의 주택 가격 총액은 325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로 늘어났고 평균 예금 액수도 196달러에서 750달러로 늘어났다. 포드는 바로 중산층을 창조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로는 너무나 획기적인 일이라 당시 시사만평 같은 데에서는 포드의 노동자들이 모피를 입고 기사가 모는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포드 공장에 일하러 가는 식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또한 헨리 포드는 주 5일제 40시간 근무를 최초로 실시한 사람이기도 하다. 산업혁명 이후 착취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에겐 여러모로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
한편 그는 반유대주의자였다. 나치즘에도 호감을 가졌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생일선물로 5만 달러 수표를 보내기도 했고 유대인을 매우 싫어하여 동갑내기 재벌인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이 의견으로 친하게 지냈다. 나치 독일에 공장을 세우기도 했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일 정부에게서 파괴된 공장에 대한 보상금도 받아냈다. 또한 나치즘을 지지하는 외교관과 외국 저명인사들에게 주어지는 훈장인 독일 독수리 훈장 중, 최고등급인 독일 독수리 대십자 훈장(the Grand Cross of the German Eagle)을 1938년 그의 생일날 받기도 했다.
「비판하는 사람은 누구든 될 수 있다. 그러나 불평 대신 해결책을 찾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다.」

첫댓글 “실패란 좀 더 현명한 방법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이다.”_ Henry Ford
“배움을 멈추는 사람은 20이 되었든 80이 되었든 늙은 것이다. 계속 배우는 사람은 언제나 젊어지게 마련이다.”_Henry F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