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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의 구조,명칭/가야금의 역사 가야금 구조 <앞판> 주로 오동나무를 이용하여 만듭니다. 나무들 중 울림이 우수해 소리의 전달에 좋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뒷판> 소리가 울리는데 좋은 작용을 하는 밤나무를 주로 사용한다. 1. 좌단 : 가야금의 머리 부분 2. 현침 : 12개의 홈이 파여 있어서 가야금의 12줄이 이 홈을 지나 뒷쪽의 돌괘에 하나씩 매여진다. 3. 줄 : 명주실을 사용한다. 4. 안족 : 가야금의 줄을 받쳐 주는 12개의 기둥으로, 이것을 이용해 음의 높낮이를 조절한다. 5. 학슬 : 부들의 실고리 왼쪽 밑에 색사로 잠긴 부분. 6. 부들 : 가야금의 12줄을 고정시키기 위해 무명실로 만든 줄 7. 봉미 : 가야금의 끝부분으로, 12개의 구멍이 뚫린 판. 8. 돌괘 : 가야금의 앞쪽에서 나온 줄을 고정시키는 괘로서, 좌우로 돌려 음정의 차이를 조절. 9. 울림구멍 : 가야금의 뒷판에 나 있는 구멍으로 공명통의 역할을 한다. 가야금의 과학적인 구조
가야금에는 자주성뿐만이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숨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가야금은 크게 악기의 몸통과 열두 현, 현을 지탱해 주는 안족(雁足)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들은 가야금의 소리를 내는 데에 매우 중요한 기능들을 담당한다. 악기의 몸통은 소리를 울리게 하는 울림통의 역할을 하고 열두 줄의 현은 각기 다른 높낮이의 소리를 낸다. 안족 또한 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데에 필요하며 줄을 지탱하는 역할도 한다. 이들의 역할들에는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다. 지금부터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자. 조상들은 가야금의 몸통을 주로 오동나무의 중심부를 긁어내어 만들었다. 그들은 가야금을 만들 때 몸통으로 쓰일 오동나무를 말리고 고르고 가공하는 데에 많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다. 가야금의 소리가 얼마나 좋게 나느냐가 몸통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가야금의 몸통을 다른 말로 울림통이라고도 한다. 몸통이 소리를 울리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는 이름이다. 또 진동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 양쪽 진동수가 같으면 공명에 의해서 에너지를 서로 교환하기 쉽게 된다. 소리도 일종의 진동이므로 공명현상이 일어나며 이 공명현상이 제대로 일어나는 악기가 크고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이다. ‘클라드니 도형’ 실험을 하면 진동이 일어나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연구팀은 울림통 위에 분말을 뿌린 후 주파수를 다르게 하면서 진동을 가하여 어떤 진동수에서 울림통이 진동하는가를 알아보았다. 가야금의 울림통 못지않게 중요한 가야금의 소리를 결정하는 구조가 바로 열두 현이다. 예부터 조상들은 현의 재료로 명주실을 사용해 왔다. 팽팽하게 맨 가야금 현을 일정한 힘을 주어 튕겨주면 현이 자기의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줄 자체의 탄성에 의해 자유진동을 하게 된다. 이렇게 현이 진동할 때 생기는 울림은 가야금의 원음이 된다. 가야금의 역사
6세기에 신라로부터 정복되기 전까지 낙동강 주변에는 가야국이라는 소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야국에서는 원래 중국에서 들어온 ‘쟁’이라는 악기를 연주하였는데 가야국의 왕이었던 가실왕은 ‘중국과 말도 다르고 풍습도 다른데 음은 중국의 것을 쓴다’며 가야국 고유의 악기가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가실왕은 가야국의 궁중악사였던 우륵에게 새로운 악기를 만들 것을 명했고 마침내 가야국의 이름을 딴 현악기, ‘가야금’이 완성되었다. 가야금 악기의 탄생은 세종대왕이 우리의 한글을 만들고 그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훈민정음을 썼던 것처럼 가야국의 가실왕은 가야금을 만들어 널리 알리기 위해 12곡의 가야금 연주곡을 우륵에게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가야금은 그것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 자주적인 정신이 배어있다. 또한 가야금은 그런 자주적 정신을 이어 받아 지금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국악기로 남아있다. 우륵은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12개의 곡을 작곡하여 가야금을 널리 알리려 하였으나, 가야국은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가야국의 위기를 느꼈던 우륵은 제자 이문과 함께 가야금의 음악을 전파하기 위해 신라 진흥왕에게 망명 신청을 했다. 처음에 우륵을 의심하던 진흥왕도 가야금의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 망명 신청을 받아들여 국원(현 충주지역 추정/탄금대)에 편히 살도록 하고서 곧 대나마 법지(노래)와 계고(연주) 그리고 대사 만적(춤)을 보내서 그 업(業)을 전수를 받게하여 가야금 맥을 이어 발전하게 되었다.
우륵에게 악 가 무를 배운 법지 계고 만덕은 우륵에게 배운곡들이 '번차음(繁且淫)하기 때문에 아정(雅正)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승께 배운 열한 곡을 다섯 곡으로 줄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처음에 우륵은 화를 냈지만 연주를 듣고서는 '낙이불류(樂而不流)하고 애이불비(哀而不悲)한 음악이라고'하면서 감탄했다고 한다. 그 결과 가야금의 음악은 신라 궁중의 대악(大樂)으로 채택될 수 있었다. 가야금 음악에 두 가지 악조가 있었는데 첫째는 하림조이고 둘째는 눈죽조였으며 [가야금 악곡의 수는] 모두 185곡이였다. 우륵이 지은 열두 곡은 첫째 하가라도, 둘째 상가라도, 셋째 보기, 넷째 달기, 다섯째 사물, 여섯째 물혜, 일곱째 하기물, 여덟째 사자기, 아홉째 거열, 열째 사팔혜, 열한째 이사, 열두째 상기물이다. 이문이 지은 세 곡은 첫째 까마귀(烏), 둘째 쥐(鼠), 셋째 메추라기( )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가실왕이 당의 악기(쟁)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가야금은 비록 쟁의 제도와 조금 다르지만 대체로 비슷하다.' 고 한다. 두 악기는 상자 모양의 공명통위에 기둥을 세워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을 걸어 연주를 하지만 공명통의 제작방법이 다르고, 가야금에는 양이두라는 특별한 부분이 있다. 양이두는 가야금의 줄을 공명통에 걸어 매도록 고안된 것으로 줄을 갈거나 조일 때 아주 편리하다. 그런데 이런 양이두는 중국 · 일본 등지의 지더(zither)류 악기에는 없다.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변진(弁辰)에 고라는 악기가 존재했었고, 1997년에는 기원전 1-2세기경의 고대 유적지에서 고대 현악기로 추정되는 가야금과 닮은 모양의 유물이 잇달아 발굴되어서, 그것이 가야금의 원형일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므로 가실왕이 가야금을 중국의 쟁(箏)을 본떠 가야금을 만들었기보다 중국의 쟁을 참고로 가야금을 '개량'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겠다. 가야금의 형체를 부현(傅玄)이 언급한 쟁(箏)의 해석을 빌어서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공명통의 윗부분이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 것이고, 밑이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한 것이며, 속이 빈 것은 육합(六合/천지와 사방, 곧 하늘과 땅, 동, 서, 남, 북의 사방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에 해당하고, 줄이 12인 것은 일년 12달을 상징한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전통음악과 12의 수치는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모두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인식의 기틀을 잡아갔던 선인들의 우주관이나 세계관에 뿌리가 닿아있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악학궤범}에서 거문고를 중심으로 기술한 후 가야금의 해당 부분에서는 '무엇 무엇은 거문고와 같다'고 한 예라든지, 성현(成俔, 1439~1504)이 거문고 연주를 위한 합자보를 만들고 이 악보를 응용하면 가야금 연주도 할 수 있다고 부언한 것, 그리고 조선시대에 편찬된 대부분의 악보들이 거문고보로 되어 있는 점 등은 당시 음악 애호가들의 가야금에 대한 관심이 거문고에 밑돌았음을 보여준다. 그런 중에도 가야금으로 이름을 낸 이들은 더러 있었다. 성현의 {용재총화}나 김안로의 {용천담적기} 같은 산문집에서는 황귀존, 김복산, 정범, 허오계, 이승련, 서익성, 조이개 등을 가야금 명인으로 손꼽았다. 그리고 {졸옹가야금보}의 저자는 영조 무렵에 맹인 가야금 연주자 윤동형이 가갸금과 노래로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그가 살고 있는 흥양까지 창아가 음악을 기록해 귀한 가야금보를 남겼다. 또조 선 중기 후기에는 홍대용, 윤선도 등의 문인과 왕가(王家)의 풍류객 남원군(南原君, 1691~1752)등이 가야금 연주에 심취한 이들로 여러 글에 전한다.
『가야금(조선민족악기총서)』, 문예출판사 편저, 민속원. 송혜진 한국악기 |
출처 :동수마루의 작은 오두막 원문보기▶ 글쓴이 : 東守마루/김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