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차 김유정 소설 [봄 ․ 봄]문학여행 -2011.8.14
-읍의 배참봉댁 마름으로 인심을 더 잃은 봉필영감을 만나다
글 : 권창순 (daum 카페 -소양강 처녀와 김유정소설문학여행)
또 비! 올여름은 유난히도 비가 많다. 빨래를 널고, 언제 삶아 놓았는지 모를 (오래된 것 같다) 감자를 비닐봉지에 네 개 챙겨 넣고, 한 개를 쪼개어 반쪽을 먹고, 디카도, 김유정소설도 챙겨 배낭에 넣는다.
반병이 조금 못되는 장수 막걸리를 챙겨 넣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이것으로 우선 마음을 색칠하고 경춘선 전동차를 타는 것도 좋겠지만, 소설 [봄·봄]을 읽어 마음을 흥겹게 색칠하는 게 더 좋으리라.
굵은 빗줄기! 우산을 펴들고 집을 나선다.
여름에 떠나는 제20차 김유정 소설 [봄·봄] 문학여행.
더 굵어진 빗방울! 지우산은 아니지만 나도 [소낙비]의 이주사처럼 응뎅이를 껍쭉거리며 ‘가구의 거리’를 걸어 군자역으로 간다.
우산에도 거리에도 마구 퍼붓는 빗방울! 그러나 결국은 [봄·봄], 봄과 봄 사이의 점(·), 그 구멍으로 흐르리라.
상봉역에 도착하니 비가 그쳤다.
춘천행 급행열차를 타고 가다가 강촌역에서 내렸다. 강촌 다음역이 김유정역, 그러나 급행열차는 그곳에 정차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르르, 등산객들이 빠져나간 강촌역, 혼자 의자에 앉아 다음열차를 기다리며 [봄·봄]을 읽는다. 화창한 날씨! 시원한 매미울음을 들으며. 지금은 강이 보이지 않는 산속 강촌역에서.
그래도 많은 이들의 추억 속에는, 지금도 경춘선의 색동역은 이곳 강촌역이 아닌가. 그러나 내겐 강촌역 다음역인 김유정역이 경춘선의 색동역인 것이다.
한들을 달려 알싸한 김유정역에서 내렸다.
물론 ‘간이역’의 무대였던 옛 역사를 한동안 바라보고, 그 앞 수퍼에서 이번엔 빵과 막걸리 두 병을 샀다. 봉필영감을 만나 마실 막걸리다.
내가 서울의 큰 수퍼에서 먹거리를 안 사고 이곳 실레에서 산다고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마는 그래도 마음은 편안하니 좋다.
김유정문학촌, 생가에도 기념관에도 관광객들과 등산객들이 꽤 있어 마음이 흐뭇하다. 생가를 한 바퀴 돌고 기념관에 들렀다가 서둘러 봉필영감을 만나기 위해 ‘물음표길’을 걷는다.
고추가 붉다. 달맞이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그렇다. 어째 태양 저 혼자 이리도 뜨겁고 밝겠는가. 소가 저희끼리 운다. 아니 저희끼리 서로 부른다. 아래쪽 우사에서 음메∼ 하면 위쪽 우사에서도 음메∼ 하고 부른다.
그러다가 내가 지나가니까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음메∼ 하면서.
흙을 밟는 게 좋다. 매미와 풀벌레들의 울음을 듣는 게 좋다. 꽃잎에 앉았다가 날아가는 나비를 바라보는 게 좋다. 풀잎위의 이슬을 보는 게 참말이지 좋다. 팔랑거리는 나뭇잎을 보는 게 좋다. 그러다 ‘들병이들이 넘어오던 눈웃음길’에서 만난 바람은 목이 탁 막힐 만큼 그립다.
내가 가도 들병이들은 저만치서 저희끼리 소란스럽다. 두 눈은 힐끔힐끔, 두 손은 배낭에서 막걸리를 꺼내놓고 봉필영감을 기다린다.
나두 사낸데 그래! 저 들병이들은 내게 관심도 없나! 쳇!
참으로 알 수 없는 이 욕쟁이 봉필영감. 아랫말 주막에서 만나자든지 아님 벼들이 익어가는 한들에서 만나자든지 할 것이지 왜 이곳이란 말인가.
얼마나 기다렸을까.
“성례고 뭐고 점순이년이 미처 자라야 할 게 아닌가. 이 쌍년의 자식이 또 자네를 찾아갔단 말이지!”
욕 잘하고, 사람 잘 치고, 생김생기길 호박개 같은 봉필영감이 곰방대를 물고 제비꼬랑지 수염을 한 구장과 함께 ‘아기장수 전설길’ 쪽에서 내려온다.
“아니 왜 그쪽에서 내려오세요?”
“이 자식아, 아무 쪽에서 내려오든 무슨 상관이야. 오기만 하면 되지!”
“이 욕쟁일 그냥!”
구장이 제비처럼 빠르게 우리 사이에 끼어든다.
“이보게들 참게. 저기 들병이들도 있는데. 이 좋은 날!”
“좋은 날은 무슨 좋은 날!”
그러나 봉필영감은 들병이 쪽을 연신 쳐다보며 침을 삼킨다.
“침만 삼키지 말고 우선 막걸리 한잔씩 합시다!”
“그래, 이 자식아! 안주로 닭마리나 해가지고 올 것이지. 이까짓 빵으로 뭘 하자는 거여!” 하며, 곰방대로 빵을 두들긴다.
“그러니까 아랫말 주막에서 만나자고 했잖아요?”
“이 자식아, 그러면 내 돈이 들잖아!”
“내가 산다고 했잖아요!”
“그럼, 동리의 어른인 이 봉필영감의 체면은 어떻게 되고!”
“그럼, 읍의 배참봉댁 마름이신 봉필영감께서는 왜 빈손으로 오셨나요?”
“이 자식아, 마름 체면에 어떻게 그런 걸 가지고 다녀!” 하면서도 따라놓은 막걸리를 단숨에 마신다.
“봉필영감, 막걸리 맛 참 좋구먼.” 제비꼬랑지 수염에 묻은 막걸리를 손으로 쓱쓱, 닦으며 구장이 봉필영감을 살핀다.
“저두 한잔 따라 주세요?”
“이 자식아, 따라 쳐 먹어!” 봉필영감에게 내민 잔을 또 그 놈의 곰방대로 툭, 친다. 그러자 제비처럼 빠르게 구장이 대신 따라 주며 눈짓을 준다.
봉필영감이 잣나무 뒤로 오줌을 누러 갔을 때 구장이 속삭인다.
“오늘 저 욕필영감 맘은 온통 저 들병이들에게 있을 거야. 여기서 자넬 만나자고 한 것도.”
“이주사처럼 그 걸 좋아하나 봐요?”
“저들이 온다고 소문이 나면 젊은 축들에게 상대가 안 되거든. 그래서 이 고개에서 이주사랑 저 들병이들을 기다리곤 하지. 나두 가끔.”
“그럼, 저 쪽에서 망을 본 셈이군요?”
“그래서 그쪽에서 내려 온 거지! 그래, 오늘 봉필영감이 무슨 이야기를 할 것 같은가?”
“아마도 데릴사위에게 바람을 넣지 말라고 그러겠지요.”
“무슨 바람을?”
“뭐, 내가 작품을 읽다가 자주 만나니까 혹시나 하겠지만, 뭉태라면 몰라도 난 그에게 바람 같은 것 안 넣어요.”
“뭉태 때문인가. 어제도 나를 찾아와 빙장님께 잘 말씀드려서 올 가을엔 성례를 올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더군! 여차하면 점순이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갈 것이라며!”
구장의 말에 놀라 나는 그만 큰 소리로,
“도망을요!”
이때 오줌을 누고 들병이들을 곁눈질하며 살금살금 다가온 욕필영감이 내 귀를 잡아당기며,
“누가 도망을 가? 우리 점순이가? 그러면 그렇지 네 놈이 바람을 넣었지? 그렇지! 그 어리숙한 놈이 그런 생각을 해낼 리는 없고!”
“절대 그러지 않았어요!”
“네 놈이 시도 때도 없이 김유정전집에 들어와 [봄·봄]을 읽고 갈 때마다, 그 놈은 일할 생각은 않고 멍하니 금병산자락만 쳐다보더니만, 다 그 수작이였구먼! 이 망할 자식!”
“그럼, 성례를 시켜주면 만사형통이잖아요!”
“이 놈이 문자를 써!”
내 두 귀를 찢어져라 하고 잡아당기면서도 봉필영감의 두 눈은 어린 아이에게 젖을 물린 들병이에게 가있다.
“봉필영감, 이 사람은 죄가 없네. 아마도 뭉태가 그랬을 걸세.”
“아니야. 이 놈이 그랬다니까!” 그러더니 그곳을 담박 웅켜 잡는다.
“아이고, 사람 죽이네! 사람 죽여!” 하고 고함을 쳐도 들병이들은 이곳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저희끼리 수다다.
“할아버지! 살려줍쇼! 할아버지!”
툭!
빈 막걸리병과 함께 나도 의자에서 떨어졌다.
뜨끔!
잠깐 의자에 누워 졸았나보다. 그사이에 개미가 그곳에 들어가 물고.
바지를 벗어 개미를 내쫓고 다시 의자에 앉으니 매미와 풀벌레들의 울음이 좋다. 막걸리 기운이 남아 있으니 이 여름음악회는 더 즐겁다.
사방을 둘러봐도 들병이도 욕필영감과 구장도 없다. 그러나 저기 마을로 내려가면 언제든지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실레이야기길 제14마당,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 나오던 데릴사위길’에 가 봉필영감에게 시비를 걸어 볼까? 하여, 나도 데릴사위처럼 욕필영감의 그곳을 웅켜 잡아 볼까.
하여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실레이야기길을 걷는다. 함께 나무도 걷고, 바위도 걷고, 바람도 걷는다. 실레이야기길도 함께 걷는다.
점순이도 데릴사위도 어느새 함께 걷는다. 참새만한 빙모님도 함께 걷는다. 그리고 저 뒤에서 욕을 해대며 곰방대를 휘저으며 봉필영감이 따라온다.
실레이야기길, 외롭고 그립고 슬플 때 오면 좋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때 오면 좋다.
실레이야기길과 한잔의 차를 나누자. 함께 누워 꾀꼬리 노래도 듣고 푸른 하늘도 보자. 함께 김유정소설도 읽자. 길은 함께 하라고 있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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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조 재미지게 잘 읽었소이다" 산악회 카페에 권창순님 덕분에 문학의 향기가 진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