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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전시기간 : 2024년04월23일~2024년08월04일
전시요일 : 평일(화–금) 오전 10시–오후 8시,
토 · 일 · 공휴일 : 하절기(3–10월), 오전 10시–오후 7시, 동절기(11–2월), 오전 10시–오후 6시
《서울 문화의 밤》 운영매월 첫째, 셋째 금요일
관람시간 : 오전 10시–오후 9시
입장시간 :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휴관일 : 1월1일 ,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정상 개관)
전시장소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1층 프로젝트갤러리1,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1층 전시실1
관람료 : 무료
전시부문 : 회화, 조각, 영상, 설치, 사운드, 출판물 등
전시장르 : 기획,국제
참여작가 :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 리암 길릭, 리차드 필립스, 리크리트 티라바닛, 릴리 플뢰리, 멜릭 오하니언, 안나-레나 바니, 안젤라 블록과 임케 바그너, 조 스칸란, 프랑수아 퀴를레, 피에르 위그, 피에르 위그와 필립 파레노, 피에르 조셉과 메디 벨라 카셈, M/M (파리)
작품수 : 총 23점
주최 및 후원
주최: 서울시립미술관, 후원: 주한네덜란드대사관, 주한프랑스대사관 문화과, 프랑스문화원, 삼화페인트공업(주)
전시문의 : 02-2124-5269
관람문의 : 안내 데스크 02-2124-5248, 5249
전시 안내
“내 이름은 앤리 […] 나는 가상의 캐릭터야 영혼이 아닌 그저 껍데기”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은 프랑스 작가 피에르 위그와 필립 파레노의 공동 프로젝트이다. 이들은 1999년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로부터 배경 역할의 단역 캐릭터를 저렴하게 구입한 후, 이 가상의 존재에게 ‘앤리(Annlee)’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채워 나가기 시작한다. 3년 동안 위그와 파레노를 비롯해 20여 명의 작가들이 참여하여 회화, 조각, 영상, 포스터, 책, 음악 등 다양한 형식으로 앤리에 관한 30여 개 작품을 탄생시켰다. 2002년 이 작품들은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전시되었다. 각각이 개별적인 작품이면서, 동일한 캐릭터를 여러 명의 작가가 제작한 하나의 다중 저자 프로젝트이다. 이 제목은 사이보그의 신체라는 껍질 속에 인간과 같은 지각 의식이 있는지 질문을 던진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1995)에서 빌려 온 것이다.
이후 위그와 파레노는 앤리의 이름으로 협회를 세워 이 가상의 주인공 앤리에게 저작권을 이양하였으며, 2002년 12월에는 앤리를 재현의 세계에서 해방시켜 주기로 결정, 아트 바젤이 열린 마이애미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연출하고 그 속으로 앤리가 사라졌다고 선언한다. 이렇게 앤리는 해방과 함께 죽음을 맞았지만,〈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은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 있는 반아베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미술관이 전체 프로젝트를 인수한 것은 예술의 개념, 매체, 형태, 권리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게 한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24년, 이 역사적 프로젝트가 갖는 의미는 당시보다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 반아베미술관과 협력하여 구성한 이번 전시는 생성형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 환경이 예술의 생산 방식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으며 데이터로 존재하는 디지털 이미지가 감정, 인격, 정체성을 지닌 주체로서 스스로 진화하고 있는 오늘날의 포스트 디지털 시대에 대해 흥미롭고도 비판적인 관점들을 제시해 줄 것이다.
* 리차드 필립스, 〈앤리〉, 2002, 캔버스에 유채, 198.6×249.6×3.9cm.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 도슨트 전시해설은 4/24(수)부터 매일 11:00/ 15:00에 운영됩니다.]
리차드 필립스, 〈앤리〉, 2002, 캔버스에 유채, 198.6×249.6×3.9cm.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앤리의 대형 초상화인 이 작품은 필립 파레노의 비디오 애니메이션 〈세상 밖 어디든〉의 스틸컷 이미지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화면 속에서 앤리가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 케이웍스 카탈로그에 있던 자신의 사진을 내밀며 스스로를 소개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당시 목록에는 ‘휘둥그레진 눈을 가진(Wide-Eyed)’이라는 표제로 등록된 2D 이미지였지만, 비디오에서는 미완의 순진했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아몬드 형태의 텅 비어 보이는 공허한 눈과 뾰족한 귀를 가진 3D 형태로 변모하였다.
피에르 위그, 〈백만 왕국〉, 2001,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6분 45초.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거짓말이야”로 시작하는 이 작품에서 앤리는 반투명한 모습으로 어둠 속 반짝이는 지표면을 걸어가고 있다. 지구와 달이 겹쳐지는 풍경이다. 그리고 SF 소설의 고전인 쥘 베른(Jules Verne)의 1864년작 『지구 속 여행』의 일부를 낭독하는 등 독백을 이어간다. 목소리는 우주선 아폴로 11호의 달 탐사 당시 닐 암스트롱 목소리와 합성되어 있고 앤리의 대사는 실제 사건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앤리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목소리의 음 높낮이에 따라 상승과 하강의 곡선이 그래프처럼 펼쳐지고 이는 가공의 산과 능선의 지형을 만들어 낸다. “우주를 정복하겠다는 우리의 꿈은 허상이었다. 우리는 미지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원하며, 이제 최고의 불가사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 〈안전지대의 앤리〉, 2000,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분 25초.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사진: 김상태
세상에 종말이라도 온 듯 어둡고 비 내리는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둘이 된 앤리가 등장한다. 마주보고 있는 두 명의 앤리는 같은 형상이지만 눈과 머리 색이 다르다. 모국어를 암시하는 듯한 일본어와 국제적 통용어로서 획득한 영어가 이중으로 들려온다. 화면 속 가상의 앤리는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세상이자 그 안에 들어서면 누구도 돌아올 수 없는 장소의 출현으로 정체성의 위기가 찾아왔다고 반복하여 말한다. 이 디지털 복제의 시대에 안전지대는 없으며 우리 모두는 [우리의] 화면[들]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 경고한다.
리크리트 티라바닛, 〈(유령 독자 C. H.)〉, 200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9시간.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앤리가 소설을 읽는다. SF 소설의 효시이자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의 바탕이 된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이다. 안드로이드들이 자유의지를 갖고 꿈을 좇아 탈주하는 이야기이다. 앤리가 여러 목소리를 통해 책의 전문을 모두 낭독하는 데 총 8시간 40분이 소요되며, 가장 많은 부분(약 280분)은 스위스 큐레이터인 카트린느 허그의 목소리로 담겼다. 인간과 유사한 로봇인 안드로이드는 앤리와 닮은 점이 많다. 이러한 유사성은 소설을 읽고 있는 주체인 앤리에게 정체성에 대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조 스칸란, 〈죽은 채 도착 셀프 조립 (앤리)〉, 2002, 빌리 책장 부품 (이케아), DIY 매뉴얼, 화환, 가변크기.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이 프로젝트는 가상의 존재인 앤리가 죽음에 이르는 장면을 당시 이케아로 대변되는 소비사회의 핵심 표어인 손쉽게 스스로 하기(DO-IT-YOURSELF) 방식을 사용하여 일련의 가구들로 작업한 것이다. 조 스칸란은 이케아에서 구입할 수 있는 부품만을 사용하여 책꽂이와 관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관은 모든 이케아의 조립 가구가 그러하듯 설명서를 보고 누구나 제작할 수 있게 했다. 설명서에는 관 만드는 방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앤리가 동작을 수행하는 모습이 다이어그램으로 표시되고, 회화 속에는 죽기 전 마지막 통화를 하는 앤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스칸란은 "DIY는 구매자를 위한 가이드로서, 상업계가 제공하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얻는 법에 대한 선언문이며, 평범한 상품을 초월적 탈출 수단으로 바꾸는 서사시"라고 말한다.
리암 길릭, 〈앤리 당신가 제안하다〉, 2001, 3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분 5초 (3).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리암 길릭은 2000년 일본 기타큐슈 현대미술센터 입주 작가 스튜디오의 공용 공간용으로 낮은 테이블과 의자, 선반 등을 만들었다. 길릭은 방문교수 자격으로 한 달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 최초의 철강 도시인 기타큐슈가 제2차 세계 대전 말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하고자 한 원래 목표 지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디오 작품인 〈앤리 당신가 제안하다〉에서는 그가 디자인한 공공 조각 성격의 시설물과 앤리가 3D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되었다. 화면 속 앤리는 원자폭탄의 목표물로서 사라져 버릴 뻔한 도시의 역사, 정체성의 구축, 그리고 반은 공적이자 반은 사적인 공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마법사처럼 갑자기 불을 뿜거나 땅 위로 솟아오르는 앤리의 초자연적 모습은 호주 출신 컴퓨터 애니메이션 감독인 라스 매그너스 홀름그렌(Lars Magnus Holmgren)이 제작했다.
피에르 조셉과 메디 벨라 카셈, 〈사기꾼 이론〉, 200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5분.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이 작품에서 앤리는 철학자가 되어 놀이와 주체에 대한 강연을 펼친다. 〈사기꾼 이론〉이라는 제목의 이 강연은 독학한 작가이자 철학자인 메디 벨라 카셈이 영화나 비디오 게임과 같은 대중문화에 침투하여 철학을 재조명하며 집필한 동명의 저서를 바탕으로 한다. 그의 논의에는 자크 라캉이나 카트린 밀레의 글에서 발췌한 쾌락과 즐거움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속임수를 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트릭스터는 본래 ‘사이비’, 또는 ‘-척하는 사람’과 같이 비겁함이나 곤경을 이유로 편의에 의한 방법을 선택하거나 어려움에 굴복하는 인간형들을 말하지만, 이 강연에서는 ‘신선한 악동’ 또는 ‘천 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시스템에 도전하는 악당이자 철학적인 사람 또는 예술적인 사람을 뜻한다.
멜릭 오하니언, 〈앤리; 난 현실에 대한 꿈을 꾸고 있다〉, 200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4분 20초.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을 로딩하는 것과 같은 도입부이다. 색인 파일처럼 영상의 정보가 화면에 나타나는데, 프로그램 언어는 0과 1이 아니라, 0과 A, N, L, E(ANNLEE)로 구성된다. 작품의 설정 값으로 영상의 정보(컬러, 사운드, 날짜, 작곡가)들이 화면에 표시된다. 비디오는 이중으로 플레이 되어, 영상 속 앤리가 터치스크린 안에 존재하는 자신을 보고 있다. 하지만 막상 꿈을 꾸는 것은 스크린 속 자신이며, 색으로 표현된 현실이 꿈의 내용이었음이 밝혀진다. “앤리”라는 명사는 URL 문자열 형태로 정의되는데, 기호인 앤리가 신호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 영상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게임 시작(play the game)’이라는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프랑수아 퀴를레, 〈스크린 증인〉, 200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5분.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프랑수아 퀴를레는 신문에 구인 광고를 내고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프로젝트가 열리는 넉 달 동안 가상의 인물인 ‘앤리’로 살면서 매일 일기를 써 줄 여성을 모집하였다. 마리-피에르 자모(Marie-Pierre Jammot)라는 이름의 여성이 이에 응해 앤리로 살아가기로 한다. 그는 별것 아닌 일을 의뢰한 작가를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직장에 나가지 않고 머릿속에 담긴 소설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드디어 생겼다고 기뻐했다. 앤리가 되는 것에는 두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는 친구들과의 연락이 금지된다. 두 번째는 글을 쓰는 것이다. 마리-피에르는 점차 앤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4개월이 지난 후 전시가 종료되자 기꺼이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M/M (파리), 〈앤리: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2000, 종이에 실크스크린, 170.5×117cm.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M/M (파리)는 마티아스 아우구스튀니악(Mathias Augustyniak)과 미카엘 암잘락(Michael Amzalag)으로 구성된 그래픽디자인 듀오이다. 파리 국립 장식 예술대학교에서 같이 수학하던 1988년에 만난 이들은 1992년에 협업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자신만의 언어를 갖고자 서체를 개발했다. 이후 패션, 음악, 미술 분야의 많은 브랜드, 예술가들과 협업해 왔다. 피에르 위그와 필립 파레노가 이들에게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전체 프로젝트의 전시 포스터를 의뢰하였고, 참여 작가들 몇몇 또한 그들 개별 작품에 대한 포스터를 별도로 요청하였다. 프로젝트 포스터의 제목에서 단어 ‘껍데기’는 세계 최대 정유회사인 쉘(Shell)사의 상표로 대체하여 디자인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의 〈안전지대의 앤리〉, 프랑수아 퀴를레의 〈스크린 증인〉, 피에르 조셉의 〈사기꾼 이론〉 포스터가 함께 전시된다.
안젤라 블록과 임케 바그너, 〈앤리 커넥티킷, 폴리팝〉, 2002, 자석, 폴리스틸렌 스티로폼, 충전재, 바니시, 가변크기 (약 4.8×5.5×5.2cm - 약 5.8×18×10.7cm).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사진: 김상태
안젤라 블록은 빛과 소리를 활용하여 조각과 설치 작업을 하는 작가이며 임케 바그너는 그래픽 및 제품 디자이너이다. 빛과 소리의 지각을 통해 관람객으로 하여금 전시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블록은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에서 주인공 앤리를 위해 빛과 소리가 나는 장난감을 만들었다. '루나폰(Lunaphon)'은 빛의 에너지 양에 따라 소리가 변화한다. '시프레뷰(Chiffrevue)'는 그래프 디코더로 “복시의 세계”에서 증식하는 복잡한 색과 형태를 해독하여 이미지로 조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폴리팝(Polypop)’은 앤리가 끊임없이 “파괴되고 생성되는 세계”에서 가져온 공간의 구조와 자력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장치이다. 이 장난감들을 통해 우리는 앤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안나-레나 바니, 〈깊음 속의 잠; 앤리 영혼 없이 껍데기만〉, 2003, CD, 바이닐 레코드, 20분 46초.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영화 감독인 안나-레나 바니가 프로덕션 회사를 설립하여 처음 제작한 작품이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이다. 초기에 피에르 위그, 필립 파레노와 협업하여 〈지단: 21세기의 초상〉(2006), 〈인비저블 보이〉(2010), 〈주인과 구름〉(2013), 〈버려진 곳의 삶〉(2013), 〈무제(휴먼 마스크)〉(2014) 등 다수의 작업을 함께했다.
전시된 음반의 모든 곡은 바니와 음악가 고든 헐(Gordon Hull)이 함께 만들었다. 헐이 곡을 쓰고 바니는 작사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표지 디자인은 M/M (파리)의 작품이다. 이 음반에는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의 작품 전체를 소장한 후 마이애미 현대미술 연구소와 테이트 모던에 공동 기증한 현대미술의 주요 수집가이자 후원자인 로사 데 라 크루즈(Rosa De La Cruz)를 향한 감사 표시와 함께 다른 작품에서 앤리의 목소리를 연기한 다니엘라(Daniella)의 이름도 명기되어 있다.
릴리 플뢰리, 〈사과 속 벌레〉, 2002, 잡지, 종이에 오프셋 인쇄, 26.8×21.5×1.2cm.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앤리가 태어나기 전, 안나 샌더스라는 캐릭터가 있었다. 잡지의 매 호마다 각각 이름을 붙인 가상의 캐릭터 시리즈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로 탄생했고, 후에 영화 시나리오가 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안나 샌더스는 1997년 잡지의 형태로 처음 등장했으나 첫 호만 제작되고 끝이 나고 만다. 당시 잡지에 붙은 부제는 ‘감정의 역사’였다. 필립 파레노는 안나 샌더스와 앤리가 거의 동질적이라 말한 바 있다. 안나 샌더스의 초기 버전 그래픽 아트를 담당했던 릴리 플뢰리는 단행본의 형태를 통해 성격 문제로 고통받는 앤리의 상상 속 경험을 공유한다. 책의 내용은 플뢰리가 두 명의 정신의학과 의사와 함께 구상한 것으로, 앤리의 혼란, 두려움, 꿈, 환상을 모두 포함한다.
피에르 위그와 필립 파레노, 〈빛의 피부〉, 2001, 네온, 80×58×ca. 4.5cm.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
배우 카트린 드뇌브가 디자인하고 피에르 위그와 필립 파레노가 공동으로 제작한 이 네온 조각은 위그와 파레노가 케이웍스로부터 구입했던 초창기 앤리의 슬픈 표정과 닮아 있다. 네온으로 밝게 빛나는 앤리의 표면은 위그의 〈백만 왕국〉에서 반투명한 윤곽선으로 묘사된 모습을 떠올리게도 하고, 앤리의 소멸식에서 불꽃으로 피었다가 사라져간 형상을 떠오르게도 한다. 빛의 피부를 가진 앤리는 이제 스크린 밖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20여명 작가들이 진화시킨 가상 캐릭터 '앤리'
연합뉴스 송고시간 : 2024-04-27 09:05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프로젝트 첫 국내 전시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리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는 1999년 동료 작가 피에르 위그와 함께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회사 케이웍스의 카탈로그에서 한 소녀 캐릭터의 저작권을 구입했다.
이들은 텅 빈 큰 눈에 보랏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 캐릭터에 '앤리'(안리. Annlee)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다른 작가들에게 앤리를 사용해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도록 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위그와 파레노를 비롯해 20여명의 작가가 참여해 회화, 조각, 영상, 포스터, 책, 음악 등 30여개의 작품이 탄생했다. 하나의 2차원 캐릭터에 불과했던 앤리는 작가들에 의해 다양한 이야기를 가진 존재로, 3차원 캐릭터로 진화했다.
2002년 이 작품들은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No Ghost Just a Shell)이라는 이름으로 스위스 취리히의 쿤스트할레 취리히에서 처음 함께 전시됐다. 사이보그도 영혼을 가질 수 있는지를 물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에서 따온 제목의 이 프로젝트는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수많은 창작이 이뤄지는 오늘날의 예술 생산방식을 예고하는 동시에 가상 세계에서 진화하는 디지털 존재들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다.
위그와 파레노는 이후 앤리의 이름으로 협회를 세우고 앤리에게 저작권을 이양했다. 2002년 12월에는 아트페어 아트바젤 마이애미가 열린 미국 마이애미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하면서 그 속으로 앤리가 사라졌다고 선언해 앤리를 재현의 세계에서 '해방'시켰다.
앤리는 사라졌지만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프로젝트로 남은 작품들은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있는 반아베미술관이 모두 구입해 미술관의 소장품이 됐다.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 있는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에서 23일 시작한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전은 반아베미술관이 소장한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프로젝트 작품들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전시다. 전체 프로젝트 참여 작가 중 14팀의 작품 23점을 선보인다.
배우 카트린 드뇌브가 디자인하고 위그와 파레노가 함께 만든 네온 조각 '빛의 피부'를 비롯해 그래픽디자인 듀오 'M/M(파리)'가 제작한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프로젝트의 전시 포스터, 리처드 필립스가 그린 앤리의 대형 초상화 등을 볼 수 있다. 전시는 8월4일까지. 무료 관람.
이번 전시와는 별개로 리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파레노의 개인전에서도 앤리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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