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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4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마태오 13,24-30
찾기만 하면 내 기분을 바꿔줄 성령의 통로를 언제나 발견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은 하늘 나라 사람이고 가라지는 불 속에 버려질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밭의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아버리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은 주님의 일꾼이라도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수확 때, 즉 종말에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겠다고 말합니다.
이 뜻은 그 사람이 죽어 심판받기 전까지는 인간이 감히 그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라지인데 밀인 줄 알고 끝까지 잘 못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일꾼들이지 본인 자신들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알려면 사제나 수도자들에게 물어보아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점검해보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밀과 가라지인지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성장하며 밀은 하늘 나라의 열매로 가득 찰 것이고 가라지는 하늘 나라의 열매가 아닌 다른 것들로
자신이 채워질 것입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가 하늘 나라를 어떻게 정의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하느님 나라는 육체적 행복이 아닌 ‘감정의 행복’이란 뜻입니다.
‘감정’을 자기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의로움은 사랑과 같은 말입니다.
죄책감 없는 감정,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운 감정은 사랑의 감정과 함께 솟아납니다.
그리고 기쁨과 평화. 이것도 감정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잘 살피며 살아간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감정을 바쁜 일이 없을 때 내 보는 오래된 사진첩처럼 여깁니다.
기분 전환을 위한 다른 것들에 초점을 맞추다가 실상 감정은 자기 내면의 방 구석에서 썩어버려도 참아냅니다.
이것을 자기희생으로 여기고 삽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황창연 신부님의 강의 중에 자기에게 딱지를 끊으려고 한 경찰에 화내다가 사망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습니다.
그는 정말 고위급 경찰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딱지를 떼려는 경찰관에게 자신이 누군지 아느냐며 따지다가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위급 경찰이 오기 전에 유치장에서 뇌출혈로 사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분이 바라보아야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를 구해주고 원수를 갚아줄 고위급 경찰이 오기만을 기다렸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뇌혈관까지 터뜨리게 만드는 감정을 바라봐 주어야 했을까요?
어떤 사람은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감정을 바라보지 않고, 어떤 사람은 목표를 위해, 어떤 사람은 그냥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서 감정을 바라보기를 회피합니다.
이렇게 속이 텅 빈 쭉정이, 혹은 가라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숀 탠’이란 작가가 쓴 『빨간 나무』란 그림책이 있습니다.
그림책 안에 있는 대부분 그림은 우리 일상에서의 우울한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때로는 하루가 시작되어도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날이 있습니다.”
어떤 날은 안 좋은 일만 겹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무도 날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습니다.
그냥 나 자신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기계 안에 사는 한 부속품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나는 희망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 난 어디쯤 와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끝은 이렇습니다.
“하루를 시작한 것처럼 그렇게 또 하루가 끝나갑니다.
그러나 문득 바로 앞에 밝고 빛나는 모습으로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방 안에 조용히 자라고 있었던 ‘빨간 단풍이 든 나무’입니다.
빨간 단풍은 내 기분을 즐겁게 해 줄 무엇입니다.
파랑새와 마찬가지로 밖에서만 찾던 행복에 내면에 있다는 뭐 그런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가 그린 모든 그림 안에 그 빨간 단풍잎을 숨은그림처럼 하나씩 그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신경 써서 찾아보지 않으면 거의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소녀는 자신을 웃게 해 줄 다른 것들만 찾기만 하였지 정작 자신 주위에 떨어져 있던 빨간 단풍잎은 보지 못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 책의 표지에는 온통 낙서투성이인 작은 종이배를 탄 소녀가 물 위에 뜬 빨간 단풍잎 하나를 바라보는 그림이 있습니다.
다른 것들을 보지 말고 빨간 단풍잎을 보라는 메시지입니다.
빨간 단풍잎은 우리 마음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줄 성령의 통로입니다.
내 노력이 아닌 성령께서 바꿔주시는 색, 바로 작게나마 용솟음치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단풍잎은 작은 나무가 되고 점점 커갈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알곡을 채워가는 사람이 하늘 나라의 알곡을 채워가는 밀과 같습니다.
감정의 승리를 거두십시오.
어제보다 오늘 더 행복하고 작년보다 올해가 더 행복해지게 하십시오.
사람은 분명 어디엔가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통장 액수나 자녀의 성장과 성공, 혹은 나의 지위 등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나의 감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목표를 위해 내 감정을 무시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밀인지 가라지인지도 모르고 살게 됩니다.
나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감정을 기쁨으로 바꿔줄 성령의 통로를 찾으십시오.
찾기만 하면 항상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얻었는데 내가 가라지였다는 판정을 받는다면 어쩌겠습니까?
내 감정의 행복, 이것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가라지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운전할 때 길을 주시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살아갈 때 내 감정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연료 게이지도 보고 속도 게이지도 보고 음악도 틀며 즐겁게 가야 합니다.
그러면 결코 길을 잃지 않고 가라지처럼 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마태오 13,24-30
우리 하느님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동의 극점에 서 계신 우리의 하느님!
잡초로 뒤덮인 과실 묘목 밭을 단장하기 위해 예초기를 돌리다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세달 이상을 잘 견뎌내고 이제 겨우 자리를 잡은 어린 나무 하나를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상처나 덜렁거리는 부위를 노끈으로 정성껏 묶고, 지지대까지 하나 세워줬습니다.
사과하는 마음으로 물도 듬뿍 주었습니다.
상처 난 여린 묘목을 싸매주고 일으켜 세워주면서, 제 머리 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지난 세월 내 인생 여정 안에서 하느님께서도 내게 이렇게 똑같이 하셨겠지? 하는 생각에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더 이상 손 써 볼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도 ‘이제 틀렸어! 다 끝나 버렸어!’ 하고 포기하지 않으셨던 하느님, 상처입고 쓰러져 있는 나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셨던 하느님, 어떻게 해서든 다시 한 번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다시 살려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던 하느님, 그런 하느님이시라는 생각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인내의 달인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도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오 복음 13장 29~30절)
공동체를 유심히 살펴보면 일생에 도움이 전혀 안 되는 가라지 같은 존재들, 독버섯 같은 존재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데, 저 같았으면 눈에 띄는 족족 과감히 솎아내야 외쳤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수확 때 까지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혹시 모를 변화나 회개의 가능성, 대대적인 방향 전환이나 새 출발을 기대하며 또 다시 인내하시면서
우리를 향한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놔둔다. 마지막에 가서 가라지만 따로 묶어 불태워버리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섬뜩함이었습니다.
초반에는 그냥 좀 봐주겠지만 막판에 가서 제대로 손 한번 보시겠다는 말씀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의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 엄청난 인내심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짓는 순간순간 마다 하느님께서 진노하시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단죄하시고, 인간의 기를 꺾어놓는다면,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의 심판 앞에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하든 그저 묵묵히 참으십니다.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무력해 보이는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너무나 나약해 보이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하느님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동의 극점에 서 계신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철저하게도 참아내시는 분, 우리의 악행을 끝까지 견뎌내시는 분, 우리의 불효를 끝끝내 인내하시는 분, 끝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영적 삶에서 가라지와 같은 장애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마태 13,25)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가라지가 뿌려졌다는 말씀에는 상징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복음서 곳곳에는 "깨어 있어라"는 예수님 말씀이 새겨져 있지요. 잠들었다는 것은 육신의 잠만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 각성이 무뎌진, 영혼의 무방비 상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아가 5,2)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영혼의 상태를 아가의 한 구절이 잘 표현했습니다. 잠들었지만 깨어 있는 상태! 영적 삶에서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추구하는 바가 확실한 이는 비록 육신이 잠든 때라도 항상 사랑하는 분을 향합니다. 주님은 그러한 이의 육신이 깨어 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나 상관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오셔서 일치를 이루시지요.
육신과 함께 영혼이 잠든 때는 원수가 활동하기 좋은 때입니다. 신분이나 지위, 영적 학문적 성취로 기본 진리와 양심에 무감해진 영혼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스스로 만족해 자기도취의 잠에 빠진 순간, 언제라도 원수의 먹잇감이 되기 쉽지요. 그러면 주님이 아무리 좋은 씨를 뿌리셨어도 어느새 덧뿌려진 가라지 때문에 밭 전체가 몸살을 앓게 됩니다.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마태 13,28)
예상에 없던 가라지의 출몰로 종들이 수선을 피웁니다. 열매를 맺을 때에 비로소 드러난 가라지가 밀들과 온통 뒤섞여 있어 쉽게 제거하기도 어려울 듯 보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오히려 담담하지요. 가라지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고, 앞으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아는 까닭입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
이것이 주인의 해법입니다.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자칫 소중한 밀 한 가닥이라도 상할까 걱정합니다. 좋은 밭에 좋은 씨를 뿌리고서는 추수 때까지 밀과 가라지를 함께 두고 보아야 하지만 주인인 본인이 감수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영혼에게 뿌려진 가라지를 그렇게 인내하십니다. 이 세상에 혼재하는 가라지들도 마찬가지십니다. 그가 잠들거나 무뎌졌다고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저 묵묵히 바라보며 밀들이 가라지에게 치이지 않기를 격려하고 응원하십니다.
사실 가라지로 인해 손해를 보는 이는 종들이 아니라 주입니다. 거둬들일 밀의 상태나 수확량에 영향이 미칠 것이 뻔하지만 그분은 감수하십니다. 어쩌면 밀도 가라지와 함께 자라는 불편하고 성가신 기간을 견뎌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30)
당장 가라지를 제거하고 해치워 원래의 순결하고 청정하고 완벽했던 상태를 구현하는 일은 주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라지에게 곳간의 자리를 내어주지도 않지요. 가라지 때문에 오염되고 훼손되었다고 밀을 가라지와 뭉뚱그려 태워 버리지도 않으실 겁니다. 수확 때에 비로소 밀과 가라지의 운명은 갈릴 것입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주님의 계약이 체결되는 장면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와서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 주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탈출 24,3)
"계약의 책을 들고 ... 백성에게 들려 주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탈출 24,7)
짐승의 피를 뿌리며 계약을 체결하기까지 모세는 반복하여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원하시는 바를 들려 줍니다. 그리고 백성도 그대로 따르겠다고 반복해 선언하였지요. 백성은 하느님 영광과 권능을 체험했기에 그 순간 진지했고 의욕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이 결심은 오래지 않아 불안과 맞바꾼 금송아지 숭배로 변질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 여정에서 중요한 순간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입교, 세례, 견진, 영적 체험의 순간들... 그때마다 얼마나 우리 마음이 타올랐고 열정이 충만했으며 힘주어 신앙을 고백하고 약속들을 바쳤는지요!
그토록 신앙과 사랑이 충만했던 우리건만 잠든 사이, 깨어 있지 못한 사이에 어느새 가라지들이 우리 존재 곳곳에 들어와 깊숙이 박혀 버립니다. '이게 뭐지?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의식한 순간은 이미 혼자 힘으로 뽑아내기 어려운 상태로 자란 뒤입니다. 놀라며 소란을 피워보지만 자기 손으로 뚝딱 제거하기는 정말 어렵지요.
이때는 자칫 자신 안에서 주님의 은총으로 자라난 밀들을 바라보기보다 가라지만 바라보며 슬퍼하고 절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가라지보다 주인의 자비를 바라보며 힘과 용기를 내어 함께 품고 가야합니다. 그분이 인내하시니 우리도 인내하며, 그분께서 거두어 주실 때까지 말입니다.
행여 우리 존재 안에 가라지가 보이더라도 너무 놀라거나 절망하지 맙시다. 어쩔 수 없이 수확 때까지 동행해야 하는 가라지는 이미 주님도 잘 아시니 그분께 숨기거나 외면하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늘 깨어 있도록 영혼을 정비하면서 원수에게 더는 틈을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이 주어지는 겁니다. 말씀을 경청하고 머물고 사랑하고 실천하는 동안에는 적어도 우리 영혼이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라. 그 말씀에는 너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복음 환호송)
가라지만 보지 말고 말씀을 주목해 우리의 영적 여정을 채워나가길 기원합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