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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묵상글 (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 불행으로부터 회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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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7.16 03:50
- 불행으로부터 회개
오늘 주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았기에 코라진이 불행하다고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저는 제가 불행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김찬선 레오나르도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제 생각에 불행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행복한 줄 모르는 불행과,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입니다.
그런데 행복한 줄 모르는 것이 왜 불행이고,
불행한 줄 모르는 것은 또 왜 불행합니까?
행복한 줄 모르는 것이 불행이라는 것은 사실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복한 줄 모르는 것은 행복할 줄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행복할 줄 모르기에 행복한 줄 모르는 것입니다.
행복할 줄 아는 것은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행복으로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다른 행복과 큰 행복을 욕심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할 줄 앎으로써 행복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은 이런 식으로 행복하면 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에서 회개함으로써
참으로 행복할 줄 알라고 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는 다 우리의 참 행복을 위한 것이고,
우리가 불행으로부터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이며
그래서 사랑의 호소이지 불행해지라는 저주가 결코 아닙니다.
사실 불행한 줄 알면 불행으로부터 회개할 겁니다.
그런데 불행한 줄 모르기에 계속 불행하게 삽니다.
그렇다면 행복한 내가 왜 불행하다고 하시는 겁니까?
앞서 얘기한 것이고 그래서 다시 얘기하는 것이지만
지금 이 세상의 행복에 만족하기에 불행한 것입니다.
더 풀이하면 이 세상의 행복에 만족하고 안주하기에
저세상의 행복을 살려고 하지 않아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하고
저세상에서도 행복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수는 없을까요?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부터 소유하면 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선언입니다.
“영 안에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가 그것 아닙니까?
영 안에서 가난하면 이미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지금 여기서부터 곧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부터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만 행복하면
그것이 진짜 불행이고 이 불행으로부터 회개하라고
오늘 주님께서 불행 선언의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불행 선언에서 오히려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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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먼저, 공지사항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제가 오늘(7/15)부터 27일까지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장소는 튀르퀴에, 그리스 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그분의 열정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그래서 새벽묵상글이 순례 일정 때문에 불규칙적으로 올라올 것입니다. 이해해 주시길 바라며, 7월 28일 주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새벽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여기에 사과 4개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과 4개 있다는 것을 설명해 보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막막하실 것입니다. 사과가 그냥 4개 있을 뿐인데 여기에 무슨 설명을 할 수 있을까요? ‘사과 1개와 사과 3개가 모여서 4개가 된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과 반쪽 2개와 사과 3개가 모이면 4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수학적으로는 맞는 것 같지만 숫자상으로는 5개의 사과가 아닐까요? 간단해 보이지만 설명하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사과도 설명하기 힘든데,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설명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하느님 존재에 대해 우리는 그냥 아는 것일 뿐입니다. 증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증명하려 할수록 그 모호함에 갇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입니다.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감으로 확인하고 지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느님을 믿겠다는 사람은 어떻게든 믿지 않겠다는 사람입니다. 많은 성인 성녀는 이 신 존재 증명에 대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방법 없음’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분명히 공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숨을 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공기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공기가 없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내가 숨 쉬고 있음이 공기가 있음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음 자체가 하느님이 계신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특별히 신경을 써서 많은 기적을 일으켰던 고을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적을 직접 보고 직접 체험했어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그 모든 기적을 그저 자기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그 모습에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그들은 같이 있는 하느님을 느낄 수 없었고, 그 결과 하늘에 오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주님께서는 많은 사랑으로 함께하십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또 들리지 않는다고 주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과거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불행하여라.”라는 예수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의 삶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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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당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결심하는 그 순간이다(앤서니 라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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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도시들을 꾸짖으시는 장면입니다. 곧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이 경고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사실, 이들 도시들이 꾸짖음을 받은 이유는 복음을 적극적으로 방해했거나 윤리적으로 심각한 죄악을 지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인 죄악으로 본다면, 바알숭배에 빠져 여러 차례 예언자들에게 책망을 받았던 페니키아의 티로와 시돈이, 그리고 부패와 타락의 전형이었던 소돔이 더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래아의 이 도시들에게 엄중한 심판의 경고가 내려진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와 기적들을 대부분 그들 지역에서 행하셨건만,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특은을 받고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들으면서 저에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두려움입니다. 저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혹은 공동체로부터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았건만, 아직 하느님과 형제들을 그만큼 사랑하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루카 12,41-48)의 마지막 구절이 제 마음을 압박해 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저 역시 그들처럼, 영적 무지로 가려져 있고, 완고함으로 굳어져 있음을 봅니다. 지금도 저와 함께 계시는 그분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자꾸자꾸 체험시켜주건만,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파라오처럼 완고하고 변덕스런 제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경고하시는 것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애타는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곧 멸망으로 빠져드는 그들에 대한 동정과 애도의 한탄이요 경고였습니다. 마치 뒷날,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셨듯이 말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애타는 호소를 듣습니다. 우리를 회개로 부르시는, 애간장 태우시는 마음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의 이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주님께서 저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희에게 그 사랑을 주신 까닭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에게 그만큼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부를 건네주신 우리 주님께 우리도 전부를 건네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주님!
당신의 꾸짖음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으듯 품으신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토록 많은 사랑을 요구하심은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음이오니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아멘.
받고 또 받으면서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비뚤어지고 변덕스런 제 마음을 바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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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쁨이 충만한 날
수험생이 시험을 치르는 날은 긴장된 날이지만 노력한 결과를 시험하는 날이기 때문에 기대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동안의 수고와 땀의 결과를 대면하는 날이기에 기쁨이 충만한 날입니다. 자기의 모습을 환히 볼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새로운 희망을 간직한 날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마지막 심판 날이 다가온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정받게 되는 나이니 기대가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였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는 이에게는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때입니다. 구원의 날이요,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감사하는 날이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판의 날이 두렵습니다. 살아온 지난날이 흔들 비쭉, 허물로 누벼놓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믿는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 주시고 자비와 용서로 함께해 주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에제18,30).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아니 지금, 이 순간에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칫 잘 살아왔다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될 때 그 인생이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과거는 올가미가 아니라 새 삶의 디딤돌이어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여기서 새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과거를 들추어내며 무어라 하든지 내가 주님 앞에 허물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 가야 합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열심히 활동하신 지역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은총을 거부하였고 결단의 시간을 낭비하였습니다. 은총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간수 하지 않으면 불행합니다. 반면에 티로와 시돈, 소돔은 이방인 도시로써 교만과 사치스러운 부의 표본이 된 곳으로 퇴폐와 음란, 악의 도시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더 큰 구원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허물과 연약함에 대한 인정과 새 삶에 대한 희망이 꿈틀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기적이 그곳에 있었더라면 그들은 분명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은총이 아무리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언제나 깨어 준비하는 삶이 요구됩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교만의 죄입니다.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죄는 하느님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코헬12,14). 고 하셨으니 마음을 다잡아 오늘을 충실히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불 속에 던지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니만큼 알곡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먼저 자신을 잘 살핀다면 심판은 기쁨이요, 곧 하늘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갖고 심판을 맞이하십시오. 허물과 죄,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나의 잘못에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길 다짐하며 오늘을 봉헌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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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게도 ‘오십견’이 찾아왔습니다. 매일 걷지만, 스트레칭을 자주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물리치료를 받는데 선생님이 오십견 치료에 쉬운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자꾸만 어깨를 돌려주고, 늘려주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합니다. 그 과정이 아플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야 치료가 된다고 합니다. 심할 때는 마취하고 어깨를 늘리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오십견인데 60이 넘어서 왔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의 몸도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로 꾸준히 관리해 주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듯이,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의 오십견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믿음이 약해지고, 의욕이 없고, 불평과 불만이 늘어나고, 기도 생활 보다는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몸의 오십견은 증상이 있고, 불편하여서 치료받지만, 신앙의 오십견은 증상도 느끼지 못하고, 불편함도 느끼지 못해서 점차 심해지게 됩니다.
신앙의 오십견을 치료하기도 쉬운 방법이 없습니다. ‘회개’가 최고의 방법입니다. 회개란 어딘가로 향하는 것과 어딘가로부터 빠져나오는 것, 이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어딘가로 향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갈구하고 찾는 회개에 있으며, 어딘가로부터 빠져나온다는 것은 그동안 하느님 사랑에서 벗어나 우리의 본래의 지향을 어지럽히는 무질서한 충동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회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며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단죄했던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잡으러 다녔던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체험은 하느님의 뜻을 갈구하고 찾는 회개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자,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 사도는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눈물은 무질서한 충동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회개였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상실에 대한, 고통에 대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강대국들의 위협 앞에 두려워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때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확실히 가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졌던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납니다. 알이 깨어지는 아픔이 없이 병아리는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힘들고 어려운 일은 있었습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절망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고, 장애물을 넘어서는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품는 것도 우리의 선택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진흙탕에 빠질지라도, 옷이 더러워질지라도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에 안주한다면, 섬기려 하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고 한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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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거야! 악과 손을 잡으면 심판 날에 벌을 받을 거야!’라고…. 맞습니다. 분명 우리가 믿는 바대로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고, 그렇게 심판하시겠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벌을 받을 일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푸십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모두 주님께서 활동하던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역이었지요. 띠로와 시돈은 이방인의 지역이었고요. 주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런 기적을 자신들에게 베푸시는지, 하느님께서 왜 주님을 여기에 보내셨는지 말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어쩌면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렇게 지면으로 여러분을 만나게 해 주심에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시려고 그러셨습니다. 알아차린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깨닫는 것도 있겠지요! 또한 여러분에게 저의 이 글을 보내 주신 이유도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서로가 만난 이유가 있습니다. 서로는 서로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찾으십시오. 매일매일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베푸시는 하느님, 그 무엇을 매일매일 찾아 얻으며 기뻐하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길 빌어봅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을 통해 선물을 주십니다. 서로서로 선물이지요. 그곳에 녹아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 하느님께로 하루하루 걸어갑시다. 이것이 우리가 걷는 신앙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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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불교적인 용어로 그 의미는 이러합니다.
일체유심조-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뜻으로, 모든 일에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이르는 말.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산이 못 오를 산이면 못 오를 산입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산이 인생길 산중의 하나일 뿐이면 오를만한 산입니다.
할 수 있다고 마음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다고 마음먹으면 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 기쁘면 가득할 수 있다고 마음먹으면 우리 하루는 기쁠 것입니다.
오늘 하루 감사함으로 가득하다고 마음먹으면 모든 것이 감사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 마음 기쁨에 있고, 우리 마음 감사에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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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경청, 회개, 그리고 믿음의 여정
“무신불립(無信不立)”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95;7.8)
오늘 복음 환호송 시편입니다. 경청에 따른 회개요 믿음의 성장입니다. 어제 교황님이 방문하신 수녀님들에게 강조한 두 핵심요소가 “아름다움과 단순성”입니다.
“오늘날 세상안 구체적 환경속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발산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피상적인 것을 떨쳐버리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선택하라. 단순성이다. 날마다 복음 안에서 빛나는 하느님 사랑의 단순성에 의해 형성되도록 하라.”
단순할 때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도 있듯이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케하고 정화하고 치유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교황님은 성소를 위한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기도하라, 기도하라! 그리고 양성(formation)에, 좋은 양성에 집중하라!”
기도가 답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회개에 대한, 믿음에 대한 답도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해야 회개에 믿음이요 두려움도 약화됩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요 믿음입니다. 참 좋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닮아 아름답고 단순합니다. 다산의 말씀도 믿음의 어른들에게, 특히 믿음의 상담가에게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어른은 독촉하듯 뒤에서 밀지 않고, 응원하듯 앞에서 끄는 존재다.”<다산>
어제 면담고백성사를 봤던 분이 생각납니다. 나름대로 60-70평생 험하고 어려운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생각하면 절로 연민의 마음 가득해지기 마련입니다. 많은 분들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속에서 살아갑니다.
“신부님, 한 번 안아주세요!”
어제 면담고백성사를 마치며 청했던 60대 후반 자매의 ‘외롭고 힘든’ 마음을 환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수없이 생미사나 연미사를 봉헌하다보면 참 다양한 사연에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인간 사회 현실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고 용기를 줍니다. 아람 연합군이 에프라임에 진주하였다는 소식에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 듯 임금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떨렸다 합니다. 예나 이제나 두려움 앞에서는 똑같이 불안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전달을 받아 아하즈 임금을 격려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힘이 됩니다.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마디는 성서에 가장 많이 나올 것입니다. 무려 365회 나온다니 예나 이제나 두려움 속에 포위되어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1년 365일 날마다 ‘두려워하지 마라’ 격려하십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 늘 거기 그 자리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환대하는 예수성심상 바위판에 새겨진 주님의 말씀도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격려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성심상 앞을 지날 때 마다 잠시 멈춰, ‘슬퍼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불안해 하는 이들에게 평화를, 아파하는 이들에게 치유를’ 청하는 기도를 바치곤 합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위로와 평화와 치유를 찾아 수도원에 옵니다. 오늘 이사야서 마지막 말씀은 평생 마음 깊이 새기고 지나야 할 말씀입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Unless your faith is firm, you shall not be firm!)
‘믿다’ ‘서있다’ 동사는 같은 동사 히브리어 ‘아만(aman)’의 두형태로 ‘견고하다’ ‘확고하다’는 뜻이고 ‘아멘’도 같은 어근에서 나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신불립(無信不立)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합니다. 사상누각(沙上樓閣) 모래 위의 집처럼 허약하여 곧 무너집니다. 반석같은 믿음 위에 인생집을 짓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믿음의 삶은 필수이며, 이런 믿음으로, 믿음을 위해 날마다 쓰는 제 강론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의 대상이 된 세 도시의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바로 이 세도시의 사람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었기에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경청하지 않았고 주님의 기적에 회개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의 반복되는 불행한 현실의 모습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며느 그들은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을 것이다. 너, 가파르나움아,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있을 것이다.”
회개를 위한 충격요법적 표현입니다. 무신불립의 세 도시들입니다. 이들이 믿음이 있었더라면 주님의 기적에 응답하여 마음을 열어 경청하고 회개하였을 것이며 믿음도 더불어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경청과 회개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언젠가의 갑작스런 경청도, 회개도, 믿음도 없습니다. 말그대로 평생 경청의 여정에, 회개의 여정에, 믿음의 여정에 충실하는 길뿐입니다. 새삼 경청의 선택, 훈련, 습관을, 회개의 선택, 훈련, 습관을, 믿음의 선택, 훈련, 습관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믿음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유비무환의 진리입니다. 그리하여 경청과 회개 와 믿음의 반석같은 삶을 위해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를 바치며 믿음을 비축해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경청과 회개,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7,9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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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두 가지 방향>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회개로
나아가는
기적
기적으로
나아가는
회개
회개로
초대하는
기적
기적에
응답하는
회개
하늘에서
땅으로
기적
땅에서
하늘로
회개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기적
사람이
하느님께
회개
모든 것임이
아무것도 아님에로
기적
아무것도 아님이
모든 것임에로
회개
회개를
낳는
기적
기적을
품는
회개
회개로
나아가는
기적
기적으로
나아가는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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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0-22)
기적을 보고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우리 구원자께서 갈랄래아의 고을들인 코라진과 벳사이다를 두고 탄식하십니다. 그들이 이같은 큰 기적과 선의에서 이루어진 행위를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를 비룻한 많은 악에 물든 티로와 시돈이 오히려 이 고을들보다 더 낫다고 하십니다. 티로와 시돈은 율법을 짓밟았지만, 코라진과 뱃사이다는 자연법과 성문법을 어겼을뿐더러 그들 가운데에서 일어난 기적들에도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코라진과 벳사이다에서 일으키신 기적들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 내용을 앞에서 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모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23) 같은 말씀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 갈랄래아”에 코라진과 벳사이다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우리에게 기울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신성을 제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적인 사랑올 받고 있다. 이 진리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하느님은 어진 사람들 속에만 있다, 이 진리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하느님과 영혼의 합일은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원하다. 이 진리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우리는 하느님이 가까이 있음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조작을 통해서는 경험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만 경험된다. 모든 것올 하느님 안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맑게 비치는 세계임을 깨달아야 한다. 죽은 젊은이나 죽은 여자 아이 이야기에서 살폈듯이, 우리는 지신을 깨우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 일을 한다. 우리를 깨우는 일이야말로 자비로운 하느님의 거룩한 일이다. 예수는 몸소 그 일을 이루고 싶어 한다.
“하느님은 이러한 일을 몸소 수행하고 싶어 하십니다. 사람은 무슨 일에서든 그분을 따라야지,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영혼이 안에서만 둥지를 틀게 하십시오. 그러면 만물이 곁에 있게 될 것입니다.”(204)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당신께 영광을 드리는 이 순간, 마리아께서 어머니 안나의 태중에 영광스럽게 잉태된 순간을 떠올립니다. 요아킴과 안나는 기도하고 단식하며 이 일을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새롭고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피조물인 마리아, 피조물 가운데 가장 완전한 피조물을 잉태하게 될 마리아께서 거하실 자리를 마련했나이다. 이제 저는 마리아가 당신을 잉태한 순간을 봉헌하며 시편 저자와 함께 노래합니다.
정녕 저는 죄 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미가 저를 배었나이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가슴속의 진실을 기뻐하시고
남모르게 지혜를 제게 가르치시나이다.
우슬초로 제 죄를 없애 주소서. 제가 깨끗해지리이다.
저를 씻어주소서. 눈보다 더 희어지리이다.(시편 51,7-9)
제가 무에서 살아 있는 피조물이 되고 당신께서 저를 존재하게 하시며 저에게 생명을 주셨던 그 순간을 온 마음 다해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창조적 사랑이 저를 향하여 ‘생겨나라’ 하고 말씀하신 그 순간을 감사드립니다! 생명을 주신 당신께 감사드리고 나약한 제 자신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0 예수님, 저를 죄와 그 결과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오늘 저에께 새 마음을 심어주소서!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261)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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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1, 20)
당신의 삶에서 은혜와 감사가 아닌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는 표현을 기억하고 산다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으로부터 꾸짖음을 당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정말이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사라는 단어가 우리의 삶에서 사라질 때, 우리네 삶은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삶과 하등의 차이가 없으리라 봅니다. 부족하고 모자라고 열악한 환경인 베트남에서 생활하다 되돌아와서 저는 새삼 살아 온 날들이 다 은총이었고 느끼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전보다 훨씬 감사합니다, 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당연한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그런 사소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뿐 왜 그러지 당연한 일을 가지고.”
이런 경험 때문에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11,20)라는 말씀이 새삼 무겁게 제 가슴을 후려칩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베푸신 사랑과 은혜들을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였기에 감사할 줄 모르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라 봅니다. 사실 너무 많고, 너무 흔하면 귀한 줄 모르고, 늘 사랑받고 있으면 사랑받음을 당연하게 여기며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 상태라고 봅니다.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사랑과 그 은혜가 너무 컸고 소중한 것임을 느끼는 게 사람인가 봅니다.
오늘 복음의 세 지방은 모두 예수님이 주로 활동을 하셨던 곳이며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이곳에서,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이었기에 꾸짖으신 것은 그곳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1,2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고을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흔한 표현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사랑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에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면 기대했건만 돌아온 것은 ‘역시나’ 이었습니다.
그런 그 고을 사람들의 태도와 반응을 보시면서 참으로 안쓰럽고 서글펐기에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너 벳사이다야.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11,21.23)하고 선언하신 것이라 봅니다. 물론 여기에서 불행하다, 는 말은 주의해라, 슬프구나,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그토록 심혈을 쏟아서 복음을 전하였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실패해서 슬프다, 안타깝다, 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고을들과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불행을 자초한 것입니다. 이 고을들이 불행한 것은 그 고장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음에도 그 나라를 향해 돌아서지 않고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그들의 돌처럼 굳어버리고 닫아버린 마음을 보시며 불행하다고 한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셨던 것입니다.
은총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특히 복음은 하느님의 크나큰 선물입니다. 그러나 평양 감사도 자기가 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듯이 예수님께서 아무리 큰 선물과 축복을 주시고자 하시더라도 그 축복과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축복이나 선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주인의 밥상머리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도 만족하고 감사했던 가나안 여인은 전혀 다른 응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당신이 베풀어 주신 것을 되받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서 더 좋은 것 더 거룩한 것을 주고 싶어서 당신에게로 돌아서기만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사랑으로 되돌아감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아무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고 다만 사랑으로 당신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시길 바랄 뿐입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시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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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 그분께 감사하는 그 마음만이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id=2099452&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40715. 21:22 ㅣNo.174232
사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신 축복이다. 우리가 어느 선에서 초능력이 있다 한들 그분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무엇 하나 우리 힘으로 되는 게 있을지?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는 게 좀 있다면, 늘 그분께 감사하며 살아야 하리라. 겸손과 회개로 하느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잃는다면, 어쩜 우리는 그분께서 주신 은총의 축복을 가로챈 ‘배신자로 낙인’찍힐게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많이 일으키신 곳들을 아주 엄하게 꾸짖으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에.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그 많은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에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코라진, 벳사이다와 같은 유다의 여러 고을들을 아주 엄히 질책하신다.
그들은 그분께서 베푸신 그 많은 기적의 은혜를 입었지만, 감사를 느끼거나 지은 죄를 반성할 줄 몰랐다. 회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셨지만, 그들은 엄두도 모른 채 끝내 그 초청을 끝내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그만큼 이미 그들은 예수님 곁을 떠나 있은 채 경직되고 완고했기에. 사실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그만큼 더 높은 도덕적 의무가 요구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뜻하는 그 숭고한 의미이다.
우리 신앙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은 이는 그만큼 더 큰 책임이 부과될 게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기적들과 풍요로움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가득 차면 결국 그분의 꾸지람을 피하지는 못하리라. 우리는 늘 부족할 때에야 주님을 찾는다. 부족함은 우리 마음에 늘 아쉬움을 안겨준다. 또 그것이 더욱 커져 가면 간절함이 되어 누군가를 의지하려 든다. 그러기에 우리는 풍족할 때에 오히려 주님을 제대로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이때에 더 큰 사명과 임무를 주신다. 이 세상에서 살다보니까 어쩌다 죄인 취급받는 이들의 경우도 그렇다. 범죄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그들의 인생 역정을 자세히 살펴볼 때, 우리역시 그들과 똑같은 환경과 처지였다면, 과연 그들처럼 불행한 길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어디 장담할 수 있을까? 그들이 지은 가장 큰 죄는 ‘회개 없는 것’이었을 게다.
사랑을 거스르는 가장 큰 죄도 무관심이리라.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지켜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 은총에 충실히 응답하며, 나날이 회개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가시 틈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장미를 보고 감사하기보다는 가시에 찔렸다고만 투덜거린다. 날이면 날마다 그저 주는 그 많기도 한 축복에 감사는커녕,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을 두고 두루두루 조상 탓하며 불평만을 쏟아 낸다.
어찌 보면 역설적으로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지기 시작한단다. 그래서 십자가에 매달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참된 부활을 체험하리라. 이를 두고 우리는 신앙의 역설이라 일컫는다. 감사할 줄 모르는 이야말로 참으로 불쌍한 이다. 그런 오만 방자함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복마저 언제 그랬냐면서 우리를 서서히 외면하리라. 이 시각 ‘주님, 제게 정말 부족한 당신께 늘 감사하는 마음을 꼭 주십시오.’라며 정성을 다해 기도해 보자. 그러면 그분께서는 감사하는 마음을 꼭 안아 주실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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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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