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귀분시모음 25편
☆★☆★☆★☆★☆★☆★☆★☆★☆★☆★☆★☆★
《1》
가을비
안귀분
귀를 열었더니
외로운 공중을 적시는 빗소리가
지표에 악보를 뿌린다
먹구름을 떠난 직선이
땅을 두들겨 지상에 제 거처를 만든다
비가 내리는 날은
말라버린 기다림이 다시 일어선다
복숭아의 분홍을 적시고
그 뿌리에는 귀한 말들이 모인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누가 그립다면
마음의 둑이 무너지는 것이다
부엉이는
한밤 비의 벗이 되어 떠나지 않고
왜 새벽까지 울었을까
한줄기 감성이 급류를 타는 밤
비 맞은 하늘을 닦아 별빛을 되찾는다
☆★☆★☆★☆★☆★☆★☆★☆★☆★☆★☆★☆★
《2》
계절의 윤회
안귀분
선선한 바람이
푸르던 능선을 갈색으로 채색하네
여름내 수분이 날아간 탁한 혈관에
가을산소가 스며들어
온몸을 읽으며 표백하네
푸른 언어를 나누어주는
청아한 천상의 세계를 바라보면
마음은 위로 피어올라
흰 구름 곁에서 긴 쉼표로 흐르네
시계방향으로 떠나가
불러도 대답 없는 지난 절기여
하루가 접히는 풀벌레 거처에서
가을 알람소리 슬피 들려 오는 밤
소절의 발소리가 출구로 걸어가고
빈 수평의 들에서 서늘한 어둠이
계절의 윤회를 감싸네
☆★☆★☆★☆★☆★☆★☆★☆★☆★☆★☆★☆★
《3》
내 마음 같다
안귀분
계곡 여울의 찬 물소리에
낙엽 한 장 떠간다
물면에 떨어진 지난 계절의 기억이 흘러간다
붉은 잎들을 올려다보면
푸른 도화지에 수채화다
찬바람의 붓끝이
산을 더 붉게 만들고 계곡 물은 하얗다
붉어서 뜨거운 산은 눈으로 읽고
찬물 소리는 귀로 듣는다
물과 같이 흐르다 흐르다
작은 못에서 가도 오도 못하는 홍엽
내 마음 같다
☆★☆★☆★☆★☆★☆★☆★☆★☆★☆★☆★☆★
《4》
등산화
안귀분
현관 바닥 구석진 곳에
경계도 버린 채
새끼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다.
발바닥에 피멍이 들도록
산과 바위에 많은 자욱을 남긴
너만의 인내에 가슴이 뭉클 해진다
따가운 햇살로부터
세월의 발등을 감싸준
착한 속내를 본다
때론 힘 잃은 내 몸의 핏줄을
팽팽하게 일어서게 해준 너와
오늘도 험한 길에서 동행 한다
☆★☆★☆★☆★☆★☆★☆★☆★☆★☆★☆★☆★
《5》
마법의 거울
안귀분
하루, 시작의 경유지
거울이 내 몸을 감싼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은 마법의 거울
빛의 각도에 따라 색을 입히며
구석구석 나보다 더 잘아는 거울
때로는 지친 미소도
착한 미소로 바꾼다
감정을 유리에 올려 놓으면
나를 쳐다보며 위로해 주는 거울의 눈동자
얼굴에서 읽혀졌던 시간의 흔적에서
가장 아끼던 표정 하나를 꺼낼 수 있을까
청춘이 아득히 밀려가고
오늘이 또 거울 위에서 밀려간다
☆★☆★☆★☆★☆★☆★☆★☆★☆★☆★☆★☆★
《6》
맨드라미
안귀분
툇마루 기둥에 걸린
할머니 닮은 맨드라미
늦가을 기운 해가
허리를 구부렸다 편다
몸통에 다닥다닥 붙은
바스락거리는 저 사연 주머니
할머니의 지난 이야기처럼
마른 대궁 속에서 서걱거린다
☆★☆★☆★☆★☆★☆★☆★☆★☆★☆★☆★☆★
《7》
별에게 길을 물어
안귀분
햇살 좋은 날이면
반사된 항아리에서
얼핏 어머니가 웃고 계시다
행주로 항아리를 자식처럼 닦으며
늘 애타는 마음을 여기에 두셨다
굵은 소금이 숯과 메주에 스미듯
속이 깊으신 어머니
문득 지난 날을 생각 하면 그리움이 숙성된다
손재주가 좋아 가족들과
세상의 옷을 다 만드신 아름다운 손
이 동그란 그리움에 오늘도
어머니 마음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면
울컥 목이 메인다
자식들 이름을 모두 손에 움켜진 모정의 하루
손수 만들어준
모시적삼을 볼때마다 지난 시간이 되살아나
마음 뭉클하다
☆★☆★☆★☆★☆★☆★☆★☆★☆★☆★☆★☆★
《8》
북소리의 진원지
안귀분
소의 엉덩이에
음률이 들어있다
회초리로 때릴때 마다
소의 울음이 북소리로 크고 있다
매를 맞던 황소 가죽으로
숙련된 손을 불러 음을 만든다
회초리는 북소리의 진원지
엉덩이를 때리고 나면 마음이 아파
달래주려고 먹였던 막걸 리가
가락으로 태어났을까
북채를 든 고수의 몸짓이
장구와 북의 긴 잠을 깨운다
허공을 떠도는 가락의 파동은 누렁소의 혼
어쩌다, 상주의 사벌 들녘을 걷다보면
소의 엉덩이에서 장구소리가 들린다.
다시 돌아온 밤이 되면
어둠의 하늘에서 피어난
먼 황소별 자리에서
둥둥, 북소리 울린다
☆★☆★☆★☆★☆★☆★☆★☆★☆★☆★☆★☆★
《9》
분홍
안귀분
일출이 풍경에 빛을 입히는 시간
내 눈가로도 새벽이 왔다
차가운 바람이 머물던 마당에
꽃송이가 만발하여
가슴에 분홍 물감을 촉촉이 물들인다
반가운 사람의 허망처럼
몸과 마음의 불화가 타협되지 않을 때
너그러운 꽃은 아름다운 동행이다
하루가 바람 속으로 떠나는 저녁
꽃속에 가득 담긴 고운 언어들
가까운 거리에서
분홍이 늘 나와 함께 같은 페이지에 있었으면 좋겠다
☆★☆★☆★☆★☆★☆★☆★☆★☆★☆★☆★☆★
《10》
불꽃의 면적
안귀분
석양이 지워지고
도시가 눈을 감은 곳
한줄 바람이 지나간 빈 하늘에
장열하게 산화하는 밤의 율동들
하늘은 표정을 바꾸고
불꽃의 면적이 가슴을 흔든다
밤의 행렬이 지나가는 대구 강나루
물면 위에도 복사되어
무음으로 수신되는 밤의 사색
화려하게 수면을 수놓는 불꽃을 읽으려고
다른 바람 하나가 또 지나간다
현란한 밤을 동공 속에 다 담을 수 없어
스마트폰 카메라로 스캔한다
순간에 피고 지는 천상의 불곷
폰에 채집된 화면을 보니 물에 빠져 버렸는지
무수히 피었던
밤하늘의 디테일한 표정은 없다
저토록 찬란하던 밤의 율동들이
스마트폰 갤러리에서
무늬로만 남아있다
☆★☆★☆★☆★☆★☆★☆★☆★☆★☆★☆★☆★
《11》
비의 고백
안귀분
야외의 가든 에서
찻잔에 구르던 빛이 흐릿해 진다
해가 만든 그림자가 지워지고
구름이 푸른 하늘을 숨기고 있다
먹구름이 햇살을 다 지우자
갈증 위에 비가 쏟아진다
우산 속에서 영혼이 빗줄기에 싸여 걷는다
발끝에서 흩어지는 빗물을 보며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겸손을 읽는다
젖었던 새의 발가락과
청 보리에 맺혔던 빗방울이 증발되고
저 편으로 사라지는 비의 입자들
먹구름 속에서 표류하던 태양이
엷은 구름 사이로 노을을 쏟아내고
비의 고백이
지평에 무지개를 그린다
☆★☆★☆★☆★☆★☆★☆★☆★☆★☆★☆★☆★
《12》
새롭게 태어난 자화상
안귀분
싱크대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여자의 고단한 마음을 건드리며
설거지통 물속으로 가라 앉는다
주방 창가에 모여든 초록에
여인의 삶을 새롭게 디자인 하기위해
다른 시간으로 환승한다
거울에 앉아 밀도 높은 영양크림으로
세월의 주름을 촘촘히 메운다
마당 새싹 소리로 귀를 세척하고
어둠이 맺히면
별빛으로 세속에 더러워진 눈가를 씻어낸다
로봇 청소기가 더러웠던 지난 세월을 흡입하고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제 충전기 속으로 들어간다
새롭게 태어난 자화상
여인의 얼굴에서
맑은 웃음이 이슬처럼 구른다
입술에 꽃 같은 붉은 색을 그리면
새 계절이 분다, 젊음이 분다
☆★☆★☆★☆★☆★☆★☆★☆★☆★☆★☆★☆★
《13》
새싹 보리
안귀분
인생의 그림자가 들어있는 씨앗
새싹보리가
생 땅에 제 주소지를 만든다
수천의 햇살을 부르는 새싹의 맥박이
정상 수치로 뛰고 있다
감정을 부드럽게 해주는 초록 낙원에서
내 시간이 함께 흐르고 있다
감성을 열고 들어온 착한 시야
바람에 사색이 스치면 보리 새싹과 하나가 된다
저공의 바람에 어린 보리가 흥을타고
수직으로 제 몸을 길게 늘린다.
청보리 파릇한 오월
짙은 안개가 몰려와 보리 밭을 지울까봐
내 마음에 너를 들인다
녹색 서정을 모종해 주는
총ㅇ보리 밭을돌돌 말아 왔다
초록빛 지평이 잠에서 물결친다
내 고장 상주에서 청보리가 출렁인다
☆★☆★☆★☆★☆★☆★☆★☆★☆★☆★☆★☆★
《14》
생장점의 온도
안귀분
봄은 생장점을 여는 온도
생장점의 발끝은
땅 속으로 땅 속으로 뻗어 가고
잠들었던 씨앗들이
기지개를 켠다
줄지어 서 있는 파밭에
촛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감자는 제 몸을 양분삼아
티죽티죽 삐져 나온 다래끼로
몸살을 앓는다
심장에 씨를 앉히는
파꽃,
감자는 살이 오르기 시작한다
태동이 시작되는 봄
대지가 온통 푸르다.
☆★☆★☆★☆★☆★☆★☆★☆★☆★☆★☆★☆★
《15》
선물 같은 한가위
안귀분
어린 시절
기다림을 껴안고 자던
선물 같은 한가위
다람쥐가
가을볕이 가득 묻은 도토리를
입 속에서 굴리는 계절
대문 밖에는 가을 묶음이 배달되었다
저온의 바람이 불 때마다
옷의 두께가 낮은 온도를 덮는다
풍경을 흔들던 창가의 여백에
뿌리도 없이 핀 보름달이 굴러오면
마루에 누워
가슴 위에 둥근 빛을 올려놓고
우울해져 그늘진 마음을 지운다
계수나무와 달 토끼의 속삭임이 들리는 한가위
어쩌다 월광이 구름에 들어가면
못다 들은 이야기는
지난 추억에 귀를 가까이 댄다
☆★☆★☆★☆★☆★☆★☆★☆★☆★☆★☆★☆★
《16》
시월의 체온
안귀분
저온의 바람과 함께
가을이 도착 했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피부에 불어오고
시월의 체온이 금풍에 나부낍니다
풀벌레 소리에 귀가 열리고
눈에 머물던 숲의 소리는
어느듯 가을이 되었습니다
마른잎 몇 개 매달고 있는 잔가지가
쓸쓸한 공중을 흔드는 곳에서
저온에 떨어진 고엽의 그림자는
한 장의 정적입니다
붉게 깊은 가을의 둘레에서
내 가슴에 차오르는 어머니는
저 멀리 있지만
만발한 시월을
빨간 우체통에 넣어 보냅니다
☆★☆★☆★☆★☆★☆★☆★☆★☆★☆★☆★☆★
《17》
아무 말 못하는 그리움
안귀분
찰랑이는 물가에서
내 것이 아닌 줄 알면서
물새를 보다가
눈감고 몇 걸음 떼었더니
내 마음도 모르고
강바람이 새의 날개를 채간다
수면 우위에 비가 내린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물살이 빗줄기의 끝을 앗아간다
물이 빠진 비와 함께
긴 꼬리를 끌며 사라지는 강물
모두를 데리고 간다 해도
아무 말 못하는
그리움만은 데려가지 말아요
물가의 풀잎으로 앉아
먹구름 속에서 빗물이 동날 때
뛰는 가슴으로 기다릴게요
☆★☆★☆★☆★☆★☆★☆★☆★☆★☆★☆★☆★
《18》
안심을 찾고 싶네
안귀분
막 생긴 돌일수록
이틈새 저틈새 맞추기 힘드네
뜻없이 나뒹굴던 돌맹이가
척척 맞질 않고
견고한 돌탑이 되기까지 고민만 쌓이네
돌무덤 곁에 있던
호박안의 씨앗들이 웅성거리네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근심을 안고
하늘이 무너질까 애태우다 떠 받치고 잠들었네
근심을 읽어내는 비가
막돌위에도 이유 없이 오네
젖은 옷이 마르기 전에 다시 젖네
비맞은 머리칼은 몇 올씩 빠지고
걱정속에 내가 있네
다시 안심을 찾고 싶어
돌탑 정한수 앞에서 두손 모으네
☆★☆★☆★☆★☆★☆★☆★☆★☆★☆★☆★☆★
《19》
오묘한 명산 불암산
안귀분
펄럭이는 잎잎들 사이로
치솟은 수직 바위
안식을 가슴에 모종해주는
저 거대한 봉우리에서 정적이 흐른다
내 무릎 속에는
우거진 풍경속으로 가야할 거리가 들어있다
차마, 저 산이 갖고 싶어
미지의 가슴에 간직 하던 한지 한 장을
정상을 향해 적신다
흘러내리는 오묘한 기운이 한지에 스민다
혼몽 같은 마음으로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몸의 중심이 기웃둥 한다
지층에서 빠진 돌 하나
나는 산의 증표를 갖고 싶어
돌의 깊은 마음을 가지고 간다
내 귀한 뒷모습을 주고
명산의 인연을 들고 왔다
☆★☆★☆★☆★☆★☆★☆★☆★☆★☆★☆★☆★
《20》
용인의 봄 풍경
안귀분
베란다 넓은 창은 봄을 담은 화폭이다
계절을 뚫고 나온
연두색 봄향기는
비바람을 잠재우고
앞산의 나무들은 초록색 꿈을 군다
산책로 산보나온 주인과 견공들은
물안개 피어나는 저수지를 바라본다
가장 행복한 이순간
교회의 십자가 산 능성에 걸리고
빠른 세월을 모아 풍경화를 그린다.
☆★☆★☆★☆★☆★☆★☆★☆★☆★☆★☆★☆★
《21》
작은 정원
안귀분
화원에서 가져온 춘란
푸른 잎들이 내 몸을 유쾌하게 세운다
좋은 기운이 연결되었을 작은 정원
새소리에 춘란이 아침을 여는 시간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보내는 진실이
난의 뿌리에서 가늘게 들린다.
허공으로 번지는 고백들이 꽃으로 환생하여
기쁨을 잃은 아픈 이에게 간격을 메우는
향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춘란이 뿜어낸 향기가
내 후각을 종일 따라 다닌다
☆★☆★☆★☆★☆★☆★☆★☆★☆★☆★☆★☆★
《22》
찬란한 일출
안귀분
지난해 일정이 없어
소외 받던 빈칸의 날짜들
새 달력에 계획을 만들어
오려붙이기를 했더니 마음이 개운하다
을사년 설날,
찬란한 일출이 커튼 사이로 들어와
지난해 비워 있어 쓸쓸했던 빈칸의
새 스케줄에 밝게 다가와 앉는다
이제, 아침에 눈을 뜨면
달력 숫자마다
매일 감사하고 안부를 묻고 살자
그것은 내 시간이 무사히 흐르는
하루하루 행복의 시계이다
☆★☆★☆★☆★☆★☆★☆★☆★☆★☆★☆★☆★
《23》
하얀 풍경의 탄생
안귀분
흐림의 표정에서
하얀 겨울이 떨어진다
열매도 없는 눈꽃이 내린다
쏟아지는 백색 흔들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쉼표가 된다
세상의 수평에 뿌려진 하얀 풍경의 탄생은
눈동자에 담을 수 있는 침묵의 무늬
쌓인 눈을 한 주먹 쥐고 있으면
눈싸움 하던 지난 동심이 달려온다
눈보라 사이로 길게 소리 지르면
떠나버린 유년의 시간을 찾을 수 있을까
지표에 착지한 잎잎들
너의 순백의 반사가 일렁인다
낮은 자세로 지구의 두께를 더하는 눈송이
시계의 속도 위에 눈이 쌓인다
하얀 동화처럼 쌓인다
☆★☆★☆★☆★☆★☆★☆★☆★☆★☆★☆★☆★
《24》
할머니는 기다린다
안귀분
탯줄 끊고 떨어져 나간
작은 우주 내 손주
배를 깔고 헤집던 시간들이
원안에서 초침이 흘러서
10달이 되던 날
엎드려서 들렸던
엄마의 목소리가
두발로 서서는 어떻게 들려질까
아득했던 날
우유 냄새 온기가
타인에게 따뜻한
정을 줄 날들을
할머니는 기다린다
☆★☆★☆★☆★☆★☆★☆★☆★☆★☆★☆★☆★
《25》
향리의 월색
안귀분
들깨 냄새 짙은 밭 위로
흰 구름 흘러가는 한가위
솔 향내 푸르게 배인 송편으로
식구들이 모여든다
토란국에서
하얀 달을 건져내며 얘기를 나눈다
추석이 돌아올 때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