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수
''신이 박연의 아들 박자형을 사위로 맞이했사온데
사위가 제 딸의 혼수품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여자가 뚱뚱하고 키가 작으며 행실이 부도덕하다
며 쫓아내려 합니다.''
1445년(세종 27년)의 일이다.
전 현감 정우(鄭瑀)가 사헌부에 고소장을 제출한다.
고소장에 나타나는 박연은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일컬어진 바로 그 ‘유명한 분’이다.
한데 박연의 자식 교육은 ‘불합격점’을 받을 만 했다.
소장을 보면 정우의 사위가 된 박연의 아들 박자형이
혼수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
부인을 두고 ‘뚱뚱하고 키가 작다’는 둥 박대하는 것도
모자라 ‘실행(失行)’을 저질렀다는 둥 무고까지
해대며 부인을 쫒아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혼수 적다고 파혼 요구
그러나 진실은 쉬이 밝혀지지 않았다.
박자형이 의금부 국문장에서도 끝끝내
혐의를 부인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헌부는 세종 임금에게
‘판결을 내려달라’고 고한다.
과연 만고의 성군이셨다. 세종은 예의 그
‘솔로몬의 판결’을 방불케하는 명쾌한 판결로
“골치 아프다”는 사헌부의 고민을 단칼에 덜어준다.
“신랑(박자형)이 신부의 실행(失行) 사실을
알았더라면 신랑은 그날 밤 곧바로 신부를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신랑은 아무일 없다는 듯 하룻밤을 잤고,
이튿날 혼인예물을 받아갔다.
이로써 혼례는 이뤄진 것이다.
신랑은 분명 이불과 요,
그리고 예복이 화려하지 않은 것을 보고
‘신부의 용모와 ‘실행’이 문제가 있다‘며
혼인을 깨려하는 것이다.”
세종의 하교에 따라 의금부가 조목조목 따지니
그때서야 박자형이 사실대로 털어놨다.
박자형은 무고죄까지 가중돼 장 60대와 징역 1년의
실형을 받았다. 또한 신부와의 ‘완전한 혼인’을 명했다.
사실 혼수의 유래는 뿌리깊다.
전설의 요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말이다.
<서경>을 보면 요임금이 자신의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우순씨(虞舜·훗날 순임금)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혼수감을 마련해서 시집보냈다’
고 했다. 이를 ‘이강(釐降)의 가르침’이라 했다.
‘이강’은 황제나 임금이 자신의 딸을 제후나 신하에게
혼인시키는 것을 뜻한다.
제 아무리 황제라도 딸을 시집보낼 때는
혼수품을 마련해주었음을 알 수 있다.
1790년(정조 14년) 사절단을 이끌고
청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서장관 성종인의 보고서를
보면 황제 가문의 혼수품이 얼마나
호화로웠는지 가늠할 수 있다.
“청 황제의 딸(17살)이 시집갈 때
수백만금의 혼수품을 보냈습니다.
황제는 대궐창고의 은(銀)을 30만금이나 주었고,
모든 대소신료들이 나서 시집가는 황제의 딸에게
절을 해야 했습니다.”(<정조실록>)
제 아무리 지존인 황제 가문일지라도
어쩔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시집간 딸이 잘 살 수 있도록 바리바리 싸 주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혼수’라는 제도가 최소한 요순시대부터
시작됐다니까 4500년을 훌쩍 넘긴 전통이다.
하기야 혼인이라는 것이 당사자 간의 맺음이 아니라
양쪽 가문의 맺음이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인륜지사가 아닌가.
질박했던 고구려 시대 혼수
우리 역사에서도 혼수를
둘러싼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고구려의 혼수품은
‘질박(質朴)’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혼인 때는 남자 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는 것으로
끝난다. 재물이 없이 결혼하는 것이 예법(禮法)이다.
만약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딸자식을 계집종으로 파는 것으로 생각해
부끄럽게 여겼다.
(男家送猪酒而已 無財聘之禮 或有受財者
人共恥之 以爲賣婢)”
<북사(北史)> ‘열전’ 등에 나온 고구려의 혼인풍속이다.
한마디로 혼수품은 신랑집에서
가져오는 돼지와 술 뿐이라는 것이다.
또 혼수를 받는 행위는 마치 딸을
노비처럼 파는 것으로 여겨 매우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질박한 결혼풍습인가.
고구려 평원왕 때 바보 온달과의 혼인을 위해
궁궐을 빠져나온 평강공주가 들고온 혼수품은
금팔찌 수십개였다.
온달과 혼인한 평강공주는 금팔찌를 팔아
농토와 집, 노비, 우마와 기물 등을 샀다.
<삼국사기>는 “이로써 살림살이가 다 갖추어졌다”
고 했다. 온달은 이 때 산 말을 잘 길러
고구려의 유명한 장군이 됐다.
평강공주는 혼수품으로 남편을 출세시킨 것이다.
김수로왕비릉, 야유타국 출신 허황옥의 조상은
16살 딸을 가락국 김수로왕에게 시집보내면서
바리바리 호화혼수를 전해주었다.
뭐니뭐니 해도 우리 역사에서 호화혼수의 원조는
가락국 김수로왕과 국제결혼한
야유타국 공주 허황옥일 것이다.
기원후 48년 7월, 허황옥이 김수로왕과의
혼인을 위해 거센 파도를 헤치고 가락국에 도착했다.
16살 신부가 가져온 혼수는 대단했다.
잉신(잉臣·혼인할 때 신부를 따라온 신하) 2명을 포함, 데려온 사람만 20여명에 이르렀다.
예단과 예물은 금수능라(錦繡綾羅·비단옷감)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경구복완기(瓊玖服玩器·장신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야말로 최고급 중국제 호화혼수였던 것이다.
허황옥의 부친은 어린 딸을 이역만리
먼 곳으로 시집 보내면서 바리바리 혼수품을 싸준 것이다.(<삼국유사> ‘가락국기’)
통일신라 전성기 시절 신라임금과 귀족간의 혼인식은
당대 호화혼수의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683년(신문왕 3년), 왕은 일길찬
(一吉飡·17관등 중 7관등) 김흠운(金欽運)의
어린 딸을 부인으로 삼으면서 엄청난 양의 혼수품을
전달한다. <삼국사기> ‘신문왕조’를 보자.
“~예물 폐백이 15수레였다. 또 쌀·술·기름·꿀·
간장·된장·말린 고기·젓갈이 135수레,
조(租)가 150수레였다.
5월7일 이찬 문영(文穎)과
개원(愷元)을 그 집에 보내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책봉했다.
그날 묘시(卯時)에 (귀족들의 부인) 30명들을 보내
신부를 맞아오게 했다.
신부는 수레에 탔는데,
좌우에서 시종하는 관인들과
부녀자들이 매우 성대했다.
왕궁의 북문에 이르러 신부가 수레에서 내려
궁궐로 들어갔다.”
아마도 당대 서라벌 시내는 모두 300수레의
혼수품 마차행렬로 인산인해를 이뤘을 것이다.
ㅡ 사진아래 추가 자료 있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