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88
3월6일[사순 제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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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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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6iWEdO_ILro
[서울대교구 조현용 프란치스코(수락산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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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율법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과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종래의 예언자나 지도자들과 뚜렷이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유다인들의 특기였던 이분법적인 가르침, 과도한 흑백논리, 폐쇄성과 편 가르기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선민사상에 깊이 빠져, 자신들만 주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요, 나머지 사람들은 개보다 못한 이방인 취급을 했습니다. 자신들은 구원의 뜰안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방인들은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두드러진 점이 개방적이요 통합적이라는 것,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절대 단편적이거나 편향적이지 않고 지극히 보편적이고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잔뜩 사로잡힌 유다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과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은 사실 좋은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섬기고 경배할 것인지? 동료 인간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하느님의 손길이 닿은 피조물과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잘 안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율법에 대한 과몰입입니다. 율법이 포함하고 있는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의 정신은 뒷전이고, 오로지 율법 한자 한 획에 과몰입되고 혈안이 된다면 바로 율법 지상주의입니다. 율법 전체를 바라보고, 핵심 정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율법의 세부적인 항목의 준수 여부를 이웃들에게 강요할 때,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율법 지상주의와 관련해서 경계해야 할 대상이 또 있습니다. 지나친 성전 중심주의입니다. 물론 성전과 성막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고 살아 숨 쉬고 계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 역시 거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좁디좁은 성전 개념을 대폭 확장시키셨습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은 물론이고 당신 발길 닿는 모든 장소가 성전이 되신 것입니다.
세리 두목이 자신의 집에서 준비한 성대한 잔치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편안한 자세로 앉으셔서 포도주잔을 기울이시고 그들과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세리 두목의 집이 거룩한 성전이 된 것입니다.
하루는 갈릴래아 호숫가 한적한 풀밭에 오 천명이나 되는 굶주린 백성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미사를 거행하신 것입니다.
풀밭을 성전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군사들에게 체포되신 에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시다가 성 금요일 오후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비린내 나는 골고타 언덕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께서는 여기저기 수많은 성당과 예배당 안에도 거처하시지만, 너무나도 당연히 주점에도 현존하시고, 노래방에도 현존하시고, 식당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그 모든 장소가 거룩한 성전입니다. 물론 그곳에 비록 때 묻고 남루하지만 거룩함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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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ob4p05Y-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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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도 어머니가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각자 자기 성경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런 환경에서 누가 가장 성경을 완전하게 해석하는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아버지는 하느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성경에도 어머니도 있지 않을까요?
성경을 대하는 첫 번째 단계는 성경에 어머니는 없다고 여기는 부류가 있습니다. 자신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교만해서 하는 부류입니다. 나자렛 사람들과 같은 부류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설명해 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성경에 어디에도 성경을 해석해주는 이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라는 말은 없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고 내려올 때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에게 대한 배신이기도 했지만, 먼저 모세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소용없음을 알고 십계명 판을 깨버렸습니다. 여기서 보면 성경의 어머니는 모세처럼 보입니다. 모세에게 순종 하지 못하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에도 당연히 순종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경 해석의 도움을 구하는 이들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 곧 계명이 쓰인 책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 계명을 온전히 이해하고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나아만과 같은 인물이 그런 사람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가 나병이 고쳐지기를 청했습니다. 엘리사는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그런 시시한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를 도와준 인물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부하들이었습니다. 부하들은 나아만이 더 어려운 일을 시켰으면 했을 텐데 쉽다고 안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를 설득합니다. 나아만은 부하들의 도움으로 몸을 씻었고 나병이 나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을 보고는 엘리야의 하느님을 믿게 됩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면 그러한 표징들이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 지켜지게 하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진정한 성경 해석자는 성경 말씀을 본인도 지키고 다른 이들도 그대로 지키라고 가르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그에게 먼저 순종할 수 있어야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성경 해석자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단계입니다. 참 어머니를 찾는 일은 쉽습니다. 어머니는 아기가 쪼개져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솔로몬이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두고 싸울 때 진짜 어머니를 어떻게 찾아냈습니까? 아기를 쪼개보라고 할 때 그것에 반대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라면 그래야 합니다. 여기에서 개신교의 성경 해석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는데 하늘 나라의 열쇠를 지닌 베드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가 당신의 살과 피가 되는 예식을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예식을 통해 빵과 포도주가 진짜 당신 살과 피라고 하셨습니다. 이 핵심적인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성경을 쪼개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성령을 주시며 죄를 용서하라고 교회를 파견하셨지만, 사람이 죄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의 어머니가 모세이고 성경의 어머니가 가톨릭교회임을 잘 압니다. 성경 계명의 일점일획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문제는 진리가 인간의 이해력에 따라 다르게 적용됐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는 무조건 할례를 받아야 했지만, 신약에서는 안 받아도 된다고 교회가 정하였습니다. 그러니 한 부분만을 잡아서 그것에 대한 순종을 강요하면 이단에 빠집니다. 더 나아가 성경에는 피를 먹지 말아야 하지만, 지금 대부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선지해장국을 먹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 있는 해석자를 만나지 않으면 성경 때문에 오히려 교회가 갈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누구에게 성경을 줬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십계명 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가르침을 따르면 십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정경화 과정’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교회가 생기고 교회가 그것을 정리하여 구약과 신약의 정경을 정하였습니다. 가장 처음 정해진 해가 서기 397년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거의 400년이 지나서 정경이 정해진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경 말씀을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도 교회를 “진리의 기둥”이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인 것은 맞지만, 무엇에 순종해야 하는지 구별이 되지 않을 때 그 진리를 바로잡아주는 가장 완전한 권위의 해석자가 교회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려움이 있을 때 성경이 아닌 교회에 의지하라 합니다.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1티모 3,15)
그 해석자는 분명 하느님의 가르침을 최대한 실천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의 ‘정경화 과정’이 중요한데, 그 과정에서 교회가 권위를 가지고 정경을 정하였습니다. 신약이 27권임을 인정한다면 이는 그렇게 정한 교회가 말씀을 해석할 완전한 권위를 가졌음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아닌 다른 성경 해석자들은 분명 성경의 일부분을 잘라버립니다. 어쩌면 십일조를 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강조하지 않는 가톨릭교회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교회는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 시각으로 온전히 성경에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으로 그 해설자의 권위가 증명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성경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기에 가장 마지막 예수님께서 지향하셨던 계명들이 가장 충실한 교회가 진짜 성경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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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뉴욕에서 댈러스로 떠나면서 이동방법을 생각하였습니다. 비행기로 가면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자동차로 가면 2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신문사의 후임신부님과 코네티컷 신부님이 함께해 주기로 해서 저는 자동차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비행기로 이동하면 간편하지만 불편함을 감수하고 자동차로 이동하기로 한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한번쯤은 자동차 여행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동행하기로 한 신부님들이 있어서 10일의 일정으로 댈러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첫째 날은 필라델피아로 가서 지냈습니다. 동부에 있는 교구 사제들과 식사를 하였습니다. 둘째 날은 버지니아 비치에서 머물었습니다. 아침에 바다에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셋째 날은 노스캐롤라이나의 샬롯에 머물렀습니다. 샬롯의 한인성당은 제가 대림특강을 했던 곳입니다. 넷째 날은 조지아의 애틀랜타에 머물렀습니다. 저는 2006년에 애틀랜타 한인성당에서 대림특강을 했었습니다. 다섯째 날은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온즈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재즈 음악을 들었고, 사순시기 전에 있는 축제를 보았습니다. 남부의 열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뉴올리온즈에서 2일을 머물고 일곱째 날에는 텍사스의 휴스톤에서 머물렀습니다. 휴스톤의 한인성당 신부님이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설날 미사를 휴스턴 한인성당에서 함께 했습니다. 휴스톤에서 2일을 머물고 드디어 뉴욕을 떠난 지 10일 만에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도착했습니다.
이번 여행에 감사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꼼꼼하게 일정을 챙겨주고, 운전을 해 주었던 신부님들에게 감사합니다. 신부님들은 좋은 숙소를 예약하였고, 한국 식당을 찾아 주었습니다. 축제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주었습니다. 신부님들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혼자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여행입니다. 여행 중에 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매일 아침 미사를 봉헌하고 출발하였습니다. 고단한 일정 중에서도 서로를 배려하는 신부님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제게 인수인계를 잘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긍정의 마음, 먼저 경청하는 소통의 마음,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겸손의 마음을 배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여행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이 좋은 인수인계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뉴욕에서 바로 댈러스로 이동했다면 저도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10일간 여행하면서 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에 본당의 미사를 집전하고, 자리를 지켜준 보좌 신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보좌 신부님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은 어려웠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비자 문제로 먼저 귀국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좋은 날씨를 허락해 주시고, 시간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운전에 대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특히 장거리 운전에는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2시간 정도 운전하면 잠시 쉬는 것이 필요합니다. 혼자 하면 힘들기에 교대해 주어야 합니다. 초행길이기에 교통법규를 잘 지켜야 합니다. 운전에는 3가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준법운전입니다. 준법운전은 교통법규를 잘 따르는 것입니다. 사고 대부분은 교통법규를 어기면서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신호체계를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운전 실력을 믿고 과속해서도 안 됩니다. 둘째는 안전운전입니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교통의 흐름을 잘 파악합니다. 앞의 차량과 뒤에 따라오는 차량을 살펴봅니다. 추월하려는 차량은 추월할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운전하기 전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갑니다. 운전하기 전에 미리 차량을 점검합니다. 타이어의 상태, 엔진 오일 점검, 가야 할 목적지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해 놓습니다. 운전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은 안전운전을 잘해야 합니다. 셋째는 양보운전입니다. 운전하면서 길가에 고장 난 차가 있으면 내려서 도움을 줍니다. 본당에서 차량 봉사를 원하면 기꺼이 봉사합니다. 짐을 들고 걸어가는 어르신이 있으면 모셔다 드립니다. 이런 분에게 운전은 사랑을 실천하는 선행이 됩니다. 운전 중에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이런 분에게 운전은 기도하는 시간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준법운전은 물론 안전운전에 양보운전까지 해주었던 신부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율법의 완성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귀보다 가난을, 건강보다 질병을, 장수보다 단명함까지도 택할 수 있는 결단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상대방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나도 따라 지고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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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7-19: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쳐라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지 아니하고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건네준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하셨다. 거룩한 계명들은 어느 것 하나도 폐지해서도 고쳐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며 잘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작고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것이 아니라, 필요하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그 계명들을 모두 가르치셨고 또 지키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절) 율법과 예언서는 둘 다 중요하다. 이 책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과 살아가는 일에 관한 법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둘 다 완성하셨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그 율법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완성해 갈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 하느님께서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면, 그에 따라 옛것은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라는 말씀은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 의미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것이 복음서에 요약되어 있음을 알려 주는 표현이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19절)는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으로, 마지막 날에 가장 작은 자, 내쳐진 자요, 말째가 되어 벌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사순시기를, 부활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단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사로만 끝난다면, 우리가 맞는 부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부활은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촉구하고 있으며, 또한 영광스러운 나 자신의 하느님 안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부활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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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그 어느 때보다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나 기존 전통을 종식시키시고, 그와 상반된 도전과 파격을 주시려고 오신 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율법은 인간의 삶에서 ‘실천’하도록 제정한 지침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직된 전통주의와 주입식 강요는 이를 실천하고 생활화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획일화된 이론은 공감으로 이어지지 못하였고, 공감하지 못하니 실천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지도층의 도식화된 교육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율법 학자들은 그 허술함을 감추려고 더욱 가혹하게 율법과 규정의 잣대를 들이대었고, 그 결과 가식과 위선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와 다른 방식을 택하십니다. 공생활을 통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가까이 계시면서’ 참된 진리를 몸소 보여 주셨고, 목숨까지 바치심으로써 사랑의 진정성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분은 정녕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참된 쇄신과 개혁은 이전의 것을 폐기하고, 과거와 단절하며 완전히 새로운 파격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통과 역사 안에 한결같이 존재하여 온 진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를 공감하게 하여 구체적으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혁명이고 참된 진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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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율법 실천의 완성>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여기서 ‘율법의 완성’은, 율법 자체의 완성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율법 실천의 완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이 말에서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라는 말은 “사랑은 늘 빚으로 남아 있다.”, 즉 사랑 실천은 아무리 많이 해도 늘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도 “이만큼 했으면 충분히 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사랑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은, 율법 실천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 없이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은 율법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루카복음 18장에 있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0-14ㄴ)
이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십계명을 잘 지키고 단식도 자주 하고 십일조를 바치는 일도 잘하지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없이 겉으로만 잘하는 사람이고, 하느님을 사랑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잘난 체하려고 신앙생활을 흉내 내는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 자랑’만 잔뜩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세리의 기도만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셨고, 바리사이의 기도는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기도만’이 아니라, 그의 생활 자체가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생활입니다.>
‘율법 실천의 완성’이라는 말은,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라는 말씀은,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은 사랑이고, 그것들을 실천하는 일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니까 사랑으로 실천할 때 율법 실천이 완성됩니다. <완전하게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계명’과 관련해서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십계명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0-22)
이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를 예수님께서 ‘사랑스럽게’ 바라보셨기 때문에, 그는 위선자가 아니고, 그가 십계명을 다 지켜 왔다는 말은 진실한 말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긴 한데, 마음 한구석에 재물에 대한 사랑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만, 재물도 사랑하는 것이 그의 부족한 부분입니다.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그가 재물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해서 그냥 예수님에게서 떠나갔음을 나타냅니다. 사랑이란, 둘로 갈라질 수 없습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처럼 사랑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주 많이 부족한 것이고, 그러면 그의 십계명 실천도, 비록 진실한 실천이긴 하지만, 불완전하고 부족한 실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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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성기 헨리코 신부님]
<법을 지키는 의로움, 법을 완성하는 의로움>
우리는 많은 부분 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 태어나는 일도 만만치 않아서 출생신고니 호적등재니 여러 가지 법적 절차를 거치게 된다. 죽는 일도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사망신고니 사망진단서니 하는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한다.
사는 동안에도 장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법의 테두리가 정해져 있고, 병원에 가는 일, 아이를 낳는 일, 누군가를 만나 가정을 꾸미는 일에도 보이지 않는 법 절차가 있고, 이를 따라야 제대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매일같이 우리 삶의 과정을 규정하고 기준을 정하는 법은 우리가 그 법에 동의하건 않건 간에 사회에 의로움을 담기 위한 우리 모두의 몸짓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도 어디선가 새로운 법을 쓰고 또 고치고, 다시 쓰고 고치는 일을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키는 데서 오는 의로움과 율법을 완성하는 데서 오는 의로움이 있음을 구분하신다. 바리사이의 의로움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의로움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법을 지키는 의로움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해당된다. 곧 종교적 계명이 있는 그대로 지켜지는가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래서 안식일에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의 목록이 만들어지고, 그 목록의 준수 여부가 한 사람의 의로움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법을 완성하는 의로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로움이다.
계명을 지키되 계명 안에 담겨 있는 진실을 놓치지 않는 자세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하는 율법 준수다.
사실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리사이의 의로움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매주 성당에 나오고, 고해성사를 꼬박꼬박 보고, 선을 넘지 않는 생활로도 충분히 의롭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한 발짝 더 나아가기를 요구하신다. 율법 준수뿐 아니라 실제로 율법에 담긴 정신을 살아갈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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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합당한 길일까?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기도는 어떻게 하고 또 무엇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도 수없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율법은 이런 질문들에 가장 효과적으로 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율법의 본질적 역할은 잊은 채 글자 그대로 이를 따르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은 점점 형식화되고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 주는 것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자신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은 율법의 의미를 되살렸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을 가늠해 보고 성찰할 수 있는 계명과 율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바른길을 가리키는 이정표이자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도움을 줍니다. 따라서 계명과 율법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도록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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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이태리에서 유학을 하던 시절, 박사과정에 들어간 뒤 저는 매일 아침 수영장에 가서 1km 씩 수영을 했습니다. 시간이 남아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부 때문이었습니다. 책상에 오래 앉아있기 위해서는 체력이 필요하고 지루한 생활에 삶의 활력을 위해서라도 운동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수영을 잘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200m 정도만 한 번에 할 수 있었고 조금만 더해도 숨이 차 헐떡거렸습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성실히 하자 결국 2km까지도 쉬지 않고 수영을 할 수 있는 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좋은 것은 아주 많았습니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어도 허리가 다시는 아프지 않았고 밤에 잠도 잘 왔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은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장점을 느끼자 박사학위를 받아도 꾸준히 수영을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박사학위를 받고 나니 그러한 결심이 금방 사라져 버렸습니다. 공부라는 목표가 사라지자 하루 이틀 미루기 일쑤였고 결국 이태리를 떠나기까지 한 달여의 시간 동안 겨우 두 번 정도만 수영장에 나갔습니다.
수영장은 기숙사에서 걸어서 5분 정도의 지척에 있었음에도 저도 모르게 게을러진 것입니다.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휴식을 취하자 수영은 이제 저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짐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잦은 회식과 약속으로 살이 쪄서 한국에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유지했던 건강한 몸과 체력은 어느새 사라졌었습니다.
이 경험을 떠올려 보면, “목표”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확한 목표가 있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해야 할 일에 성실하게 임하게 되고, 그것은 짐이 아닌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 목표가 간절하지 않다면 혹은 모호하게 설정되어 있다면 해야 할 일은 짐처럼 여겨져 그릇되기 일쑤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파들과 율법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본래 “하느님의 나라”였는데, 이것은 “현세의 권위”와 혼동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니 결국 하느님 나라를 위해 꾸준히 행해야 할 사랑은 다른 사람에 대한 권위 행사와 교만으로 그릇되게 나타났습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무엇이든지 정의를 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노동”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림으로써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규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에 사람이 등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길 수 있는지, 옷을 만드는 사람이 자기 옷에 바늘을 한 번 댔는데 이것이 죄인지 아닌지, 안식일에 아기를 들어 올릴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해 논쟁을 벌이며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이 이런 규칙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었다면 바리사이파 인들은 이것을 성실히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라는 명칭은 “분리된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그들은 이 모든 세칙을 지키기 위해 일반 사람들의 삶에서 자신을 분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실한 삶을 산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드러내고자 했고 일반인들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강조하다 보니 자비와 이해 없이 남을 억압하고 종용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멍에를 가볍게 해주려 하셨습니다. 율법의 기본 정신이 “하느님의 사랑”에 있음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강조하십니다.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원수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사명, 보잘것없는 이웃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책임. 그밖에도 우리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성경의 계명들은 우리의 마음을 다소 불편하게 하고 짐처럼 느껴집니다. 이 과정 안에서 우리는 되려 하느님을 도외시하게 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너무 어렵다고 치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목표를 향하고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은 결국 우리에게는 크나큰 은총이며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명확히 마음에 새길 때에 계명은 우리에게 커다란 활력이 되고 새로운 힘을 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것을 쟁취하는 방법은 성실함입니다. 예전에 저에게 기타를 가르쳐주던 선생님께서 처음 기타를 잡고 낑낑대고 있는 저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날을 잡아서 열 시간 연습하는 것 보다, 매일매일 15분 연습하는 게 훨씬 나아요. 기타 잘 치는 게 상상이 안 되죠? 걱정 마세요. 포기하지만 않으면 결국 다 돼요.”
아마 오늘 복음 말씀을 읽으며 가장 작은 계명조차 어김없이 잘 지키는 본인의 모습이 상상이 안 될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일단은 지키기 쉬운 계명부터 하나하나 천천히, 그러나 성실히 임할 것을 다짐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정확한 목표를 잊지 말고 작은 것 하나하나 천천히 실행한다면 하느님을 향해 헤엄치는 우리의 영적인 체력은 더욱 좋아질 것이고 어느덧 사랑을 행하는데 지치지 않는 건강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한 인간이기에 가끔은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고 정해놓은 목표를 깜빡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좋은 체력을 다시 공급해 주시는 하느님이 곁에서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만 않으면, 결국엔 다 될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적어도 그 마음을 전능하신 하느님이 알아주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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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여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5,19)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여 잘 지키고 실천하며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 주어라.”(신4,1.6.9참조)고 당부합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5,17)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율법을 먼저 지키고 가르치라고 가르치십니다. 사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예수님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남이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7,12) 우리가 참으로 이웃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받고 싶은 욕망! 그러기에 사랑은 역설이며 사랑은 유혹 곧 사랑받고 싶은 사람을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5,18) 는 말씀은 사랑이 충만하고 사랑이 완성될 때까지 율법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에는 양적인 의미에서 큰 사랑 혹 작은 사랑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사랑만이 있습니다.
어느 때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가 사랑하려고 사랑이신 주님을 부를 때마다 주님은 가까이 계셔 주시고(신4,7),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며 돌보아 주십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의 시선에서 보면 사랑에서 큰 사랑과 작은 사랑이란 차이가 없지만 사랑을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큰 사람과 작은 사람으로 구분되고 차이가 드러날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바로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5,6)에서 율법과 예언의 정신을 먼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입니다.(5,19 참조) 사랑으로 실천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자신이 깨달은 하느님의 규정과 율법인 사랑을 스스로 먼저 살고 또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은 “참으로 지혜롭고 슬기로운"(신4,6)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수마허의 작은 표현이 우리네 일상의 많은 부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봅니다. 한때 사진 찍음을 취미로 즐겼지만, 요즘은 사진 찍는 것이 시들어지고 게을러진 듯싶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늘 콩밭에 가 있듯이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여러 이유에서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 이렇게 계절이 바뀌면서 들녘에 만발할 작은 들꽃을 보고 싶고 찍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사진을 찍다 보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더 공감이 갑니다.
지금 여러분이 제주의 오름을 오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오름 전체가 온통 들꽃이요 사방이 전부 들꽃이 만발해 있다고! 그곳에서 느끼는 것은 생명이 그렇고 자연이 그렇고 우리 모두 다 아름답다, 는 사실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늘 큰 것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우리의 일그러진 마음을 작은 들꽃의 무리가 모여 펼쳐진 풍광을 볼 때 참으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들꽃 하나를 접사 혹 초접사로 찍는다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더 실감하실 수 있고, 그 작은 것 안에 모든 우주의 생명과 생명의 리듬을 볼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렇습니다. 저 광활한 대우주도 그 시작은 아주 작은 먼지 하나뿐인 작음으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작음을 외면하고는 큰 것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이나 계명도 작은 것의 실천으로부터 큰 계명이나 하느님의 큰 뜻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같아지기 위해서 세상의 가장 미천한 존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체 안에 계십니다.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할 수많은 존재 중의 한 존재로 마치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겨자씨 한 알(마13,31-32 참조)처럼 작은 존재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통해서 지구라는 행성에 살았고 살아갈 인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아갈 모든 사람에게 당신 존재와 삶을 통해서 걸어야 할 길이 되시고, 살아야 할 진리가 되시며, 누려야 할 생명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진리와 생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결국 세세 대대로 율법과 예언서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가르침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완성하다.’는 그리스말로 ‘이루다’ 혹 ‘채우다.’라는 뜻인데, 본문에서는 단순히 이루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 본래의 뜻을 채워서 율법의 본뜻을 다시 찾게 하시려는 의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이나 계명을 얼마나 충실하게 잘 지키는지 지키지 아니한지를 따지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계명이나 율법 본래의 의도와 정신을 채워 온전하게 한다는 의미 또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계명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을 어기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되고,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 사람이 된다.”(5,19)라고 말씀한 것은 계명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계명의 본래 뜻과 정신을 되살려 완성하시고자 함이지 여러 가지 행위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사실 누가 계명의 크고 작음을 구분할 수 있겠으며, 누가 자기 편리대로 어기고 어기도록 가르친다면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편리나 안위를 위한 것이지 하느님의 뜻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 땅에 사셨던 예수님은 때론 큰 것보다 작은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99마리 양을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셨고, 한 작은 아이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2마리를 작다고 하시지 않으셨으며,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마18,6) 불행하다고 하였으며.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18,10)고 당부하셨습니다.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며 작은 것은 큰 것의 시작입니다.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이 됩니다. 넓고 큰 강도 작은 개울이 모여서 만들어지고 큰 바다도 한 방울의 물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큰일을 할 자격과 능력이 있고, 작은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큰 것도 소홀히 하게 마련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탈렌트 비유에서 분명하게 밝히신 바가 있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마25,21)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지키도록 내려주신 계명에는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계명은 계명일 뿐입니다. 어쩌면 작은 계명 안에 하느님의 큰 사랑이 담겨 있는지 모릅니다. 하찮다고 생각하는 시시한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사랑의 실천이며, 작은 사랑의 실천이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받는 길입니다. 작은 것들을 무시하며 살아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 수 있지만, 반대로 일상에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오늘 하루의 작은 일들을 작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하늘에 나는 작은 새도, 들에 핀 작은 나리꽃들 하나에도 관심을 쏟으시는 주님께서는 모든 꽃이 다 아름답고 좋게 보시기에 우리가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몸짓을 참으로 사랑스럽게 보실 것입니다. 하느님 눈에 어느 것 하나 작고 의미 없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게 다 좋게 보입니다. 우리 역시도 소화 데레사처럼 작은 계명 하나라도 큰 사랑으로 지키고 또 지키도록 도와주고 가르치는 우리 자신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을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시며, 저희 앞에 내놓은 당신의 율법과 계명을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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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등학교 때 처음 타자기를 보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는 보편화되지 않았지요. 따라서 타자기는 너무 신기했습니다. 더군다나 직접 타자를 쳐보면서 종이에 글이 찍히는 것을 보면서 마치 책을 출판하는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자판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 이름을 타자 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특히 두 손가락만을 이용한 독수리 타법이라서 1분에 3~40개의 단어만 띄엄띄엄 타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 실력을 향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두 손가락의 독수리 타법으로는 실력 향상이 불가능했습니다. 저의 이 독수리 타법을 본 누군가가 양손을, 그러니까 모든 손가락으로 타자를 하면 속도가 빨라진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계속된 연습으로 양손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고, 또 타자기 자판도 모두 외우면서 속도가 비약적으로 향상했습니다. 한때, 1분에 800타까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두 손가락만 사용하는 독수리 타법만을 고집했다면 실력 향상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몸에 익히면서 비로소 향상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과거의 방식에만 매여있으면 어떤 발전도 이룰 수 없습니다.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을 만들어 갈 때,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와 너무 다른 이 현재를 살면서, 이 현재에 맞게 신앙생활도 계속 변화 발전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그때가 좋았어.’만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과거에만 매여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만을 강조하면서 그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조항은 모두 613개에 이르지요. 사실 이 조항 613개를 거슬러 올라가면 십계명이 되고, 또 이를 다시 줄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이 사랑이 율법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매여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사랑은 보지 않고 613개의 조항만을 봅니다. 사랑의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 녹아 들어갔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인 삶이 아니라, 지금 실천해야 하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 나라로 힘차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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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의 완성>
마태오 5,17-19 (예수님과 율법)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사랑의 완성>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사랑과 맞서는 사랑을
사랑과 벗하는 사랑으로
사랑을 가르는 사랑을
사랑을 모으는 사랑으로
사랑을 가두는 사랑을
사랑을 놔주는 사랑으로
사랑을 말리는 사랑을
사랑을 돋우는 사랑으로
사랑을 허무는 사랑을
사랑을 이루는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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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은 삶의 규범입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은 613개 조항에 이릅니다.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개 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십계명이 되고, 더 줄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됩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무시하거나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지켜야 합니다.
정신을 알고 지키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나 율법이라는 도구를 절대시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형식화됩니다. 따라서 껍데기만을 지킬 것이 아니라 내용을 지켜야 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자체이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최종목적지도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돌판에 새겨진 율법, 의무로 주어진 규정을 지키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성령의 도움으로, 자기 공로가 아니라 은총으로 채워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채우는 것입니다. 형식에 내용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라’, ‘하지마라’고 했을 뿐, 예수님처럼 몸소 백성을 어루만저 주시고 일으켜 세우시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일은 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한계를 뛰어 넘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계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계명 준수만으로는 율법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도 법이니까 지킨다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안전과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나의 생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준수한다면 그것은 큰 사랑의 행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내용과 의미를 살리는 노력이 더 필요합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 하신 예수님 말씀은 우리를 언행일치의 삶으로 초대합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바를 실천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 쏟아놓은 말들을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에페 6,6) 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 하고 고백한 율법 학자를 떠올리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하여 율법을 완성하는 날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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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이 답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분별의 잣대-
"주님,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 86,4)
저에게 공부는 단 둘 뿐입니다. 하나는 “참사람되기위한”공부, 하나는 “잘 죽기위한” 공부입니다. 남은 동안의 평생공부도 둘 뿐입니다. 제가 매일 강론 쓰는 목적도 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자주 소개했던 기도이자 사랑의 표현이었던 만세육창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상하여 하루가 시작되기전 양손을 활짝 펴들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태극기 앞에서 날마다 부르는 “만세육창-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입니다. 그런데 어제 반가운 카톡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만세를 부르자’ 라는 글이었습니다.
“두 팔을 하늘 높이 쳐들고 만세를 부르자.
만세를 부르면 회색빛 심장이 뚝 떨어져 나간다.
어떤 치욕이 우리를 짓누를지라도 우리는 벌떡 일어서 만세를 부르자.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도 힘들다고 징징 울지 말자.
일어나서 만세를 부르자.
몸에서 툭 소리를 내며 고통이 떨어져 나간다.
만세를 부르면 힘이 난다.
치욕도 살비듬처럼 가볍게 떨어져 나간다.
아무데서나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부르자”
-<10cm 예술> 김점선-
만세부르기는 참 좋은 기도이자 운동으로 뇌졸증 예방에도 좋다합니다. 사실 몸과 마음을 다한 만세보다 절박한 기도도, 사랑도 없을 것입니다. 호기심에 "김점선" 이름을 검색해 봤더니, 1946년 출생, 2009년 3월22일 별세. 홍익대 대학원 서양학과 졸업.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내내 그림을 그리고 싶어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했던 화가로 소개되어있었습니다. 만63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참으로 치열하게, 가열차게 살았던 화가이자 시인이었습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삶은 싸움이자 전쟁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에는 일과 싸우고 노년에는 병마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의 싸움은 믿음의 싸움, 희망의 싸움, 사랑의 싸움, 인내의 싸움입니다. 특히 노년에 병고를 겪는 분들을 보면 고통의 삶자체가 “십자가의 길”임을 봅니다.
새삼 습관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영성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 습관입니다. 노년에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습관으로 삽니다. 몸에 밴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일찍부터 하느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노년의 병마와의 싸움에 승리도 이런 신망애(信望愛)의 훈련이 잘 되어 습관화되어 있을 때 가능함을 체험합니다.
제가 근래 참 많이 강조한 “선택-훈련-습관”의 도식입니다. 이런 면에서 수도공동체가 평생 날마다 마음을 담아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신망애(信望愛)의 훈련은 없을 것입니다. 마침 오늘의 다산 어록과 공자의 말씀도 좋았습니다.
“공부는 사람을 깨닫고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이다. 그 시작은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다산
“번지가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知)에 대해 묻자 공자가 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논어
사랑과 앎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사랑할 때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이요 공부중의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요, 우리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평생학인(平生學人)입니다. 저는 이런 자세로 매일 강론을 씁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신망애(信望愛)에는 영원한 초보자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율법”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율법 사랑은 얼마나 단호하고 결연한지요! 율법이나 예언서야 말로 하느님 사랑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들의 완성은 사랑뿐임을 깨닫게 되며, 이어 예수님의 복음은 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알려주는 내용들이 소개됩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은 계명들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계명들을 사랑한 예수님이요, 율법 하나하나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에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의 어떠한 세부조항도 소홀히 다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이 아니라 율법의 준수를 통해 구체성을 띄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표현을 찾습니다. 사실 모든 율법준수나 수행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기도를 사랑하고, 노동을 사랑하고, 공부를 사랑하고, 정결을 사랑하고, 성독을 사랑하고, 단식을 사랑하고, 순종을 사랑하고, 가난을 사랑하고, 수도생활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수행과 더불어 마음의 순수에 내적자유요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러다 보면 저절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1독서 신명기 모세를 통한 주님 말씀은 이런 사랑의 수행에 한결같이 충실한 우리들에게 주는 말씀처럼 아주 고무적입니다.
“너희는 그 사랑의 율법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사람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우리가 부를 때 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를 가진 위대한 민족이 어디 있느냐?”
그대로 오늘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준행(遵行)하는 위대한 민족, 가톨릭교회 신자들인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리니 용기백배, 사기충천해지는 느낌입니다. 주님은 하루하루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 보고 들은 사랑을 우리 모두 마음 깊이 새기고 실천하고 전하라 명하십니다.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또한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주어라.”(신명 4,9)
오늘날 교육의 결정적 취약점인 ‘신앙과 전통의 전수(傳受)’ 역시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 16,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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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소 닭 보듯?>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오늘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하느님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분이라고, 그러니 이런 하느님을 모신 이스라엘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렇다면 저는 또 우리 배달 민족은 이스라엘처럼 위대한 민족입니까?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선 저와 우리 민족에게도 가까이 계셔 주십니까? 물론이고 당연합니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민족에게나 가까이 계셔 주십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누가 느낍니까? 모두 느끼고 모든 민족이 느끼는 것 아닙니다.
소 닭 보듯 하는 사람 많습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무덤덤합니다. 그런데 소와 닭은 왜 관계가 그렇습니까?
소가 닭을 잡아먹는 동물이라면 그럴 리 없습니다. 소는 잡아먹으려고 닭을 노려보고 닭은 소가 덮칠까 경계하며 볼 것입니다.
서로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렇다고 둘은 친하지도 않습니다. 관심사가 다를 뿐 아니라 호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끌림이 서로 간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소 닭 보듯 관계가 바로 ‘실천적 무신론’의 관계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은 존재적 무신론이 아닙니다.
존재적 무신론은 신이란 존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적 무신론은 신의 존재 여부에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곧 상관없고 관심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지만 내 삶 안에는 없습니다. 계시긴 하지만 저기 부산에 계신 것입니다.
여기 내게 가까이 있어도 내 삶 안에 없고, 내가 뭘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 좋을 대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하고 원치 않으시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는 것으로 철저히 자기중심입니다
요즘의 무신론은 대개 이런 무신론입니다. 있냐 없냐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기에 고민조차 하지 않는 무신론이고, 그래서 존재적 무신론보다 더 나쁜 무신론이 소 닭 보듯 무신론입니다.
하느님이 아무리 가까이 계셔도 소 닭처럼 계시니 하느님의 계명도 간단히 제쳐버리겠지요?
그래서 오늘 모세가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고 얘기해도 그저 웃기만 하고 코웃음 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이 아무리 가까이 계셔도 없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 계명이 거미줄의 바람 같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와 하느님은 소 닭처럼 가까운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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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미성숙한 사람과 성숙한 사람>
힘 있고 높은 사람에게는 꼼짝 못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함부로 하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 힘 있고 높은 사람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도 공손하고 존중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 독재 권력 아래서는 진실에 어긋나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자율적인 상황에서는 법을 함부로 어기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 독재 권력 아래서건 자율적인 상황에서건 자기 진실에 입각하여 법을 지키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
그런데 이런 미성숙보다도 더 잘못 된 막 되어 먹은 무뢰배가 있습니다. 인자한 사랑을 우습게 여기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오냐 오냐 하니까 할아버지 수염까지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사랑과 인자로움을 손자가 존경과 순종으로 응답하지 않고 방자함과 불순명으로 응답하는 막되어 먹음을 얘기하는 말입니다.
오늘 1독서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복음은 또 얘기합니다.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인자하고 친밀하게 가까이 대해 주시니 주님의 계명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즉 가장 모자란 사람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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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율법의 완성인 사랑!>
오늘 복음(마태5,17-19)은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이 율법은 세상 끝날까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율법의 계명들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으로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 더 나아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 뜻이자, 계명들이고, 하느님 그 자체'입니다.
이 율법이 전하는 핵심이자 본질은 '구원'입니다. 그리고 구원으로 이끄는 '사랑'입니다.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사랑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율법의 핵심과 본질보다는 율법의 글자나 형식에 머물러 있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율법의 핵심과 본질에 머물러 계셨던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로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대했던 그들에게, 그리고 보여지는 형식과 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육화(성탄)와 땀(공생활)과 수난과 십자가 죽음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당신처럼 율법을 완성할 것을 명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새 율법)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날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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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pCmRXFxSN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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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 19)
알지 못해
아픈 것이 아니라
살지 못해 아픈
하느님 말씀과
율법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말씀이 새롭게
돋아나길
기도드립니다.
깍고 다듬어야
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제마음입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사순의
아픈 시간입니다.
하느님 말씀과
율법은 우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제대로 실행하지
않기에 아프고
힘겹게 다가옵니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지않고서는
지키고 가르치는
이모든 일들이
결코 기쁨이 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말씀과 율법은
스스로를 위한
스스로의 것이
되어야합니다.
살아가야 할
가장 분명한 이유는
하느님과 우리자신의
관계에 있습니다.
말씀과 율법을
우리 삶안에
새기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말씀과 율법에서
하느님 마음을
느끼는 사순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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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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