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기독교측에서 단군교 교주였던 뭐시기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었다며 열라게 선전하고 다닐 때가 있었습니다. 단군상 문제가 불거지던 2000년도에도 꽤 써먹었지요...
그러나, 단군교 교주였다가 기독교로 종교를 바꿔탄 이 "김해경"이라는 인물을 제가 직접 만나보지 못해 뭐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김해경이라는 작자가 이끌던 소위 [단군교]는 말 그대로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수많은 군소민족종교 중에 하나입니다. 종교의 전시장으로 불리우는 한국에는 이름모를 수많은 군소종교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유파도 많지만, 토착적 민족신을 중심으로한 군소종파도 수없이 있습니다. 이런 군소종파 중에 단지 하나일 뿐입니다. 단군관련 민족종교 중에는 대종교가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지만, 대종교는 제가 아는 바로는 [단군]을 신성시하기는 하지만, 어떤 미래의 구원자로서의 초월적인 신으로서의 예수와 같은 위상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해경이라는 작자가 이끌던 [단군교]는 수많은 군소 종파들이 그렇듯이 그의 개인적 카리스마(?)에 의지하여 신도들에게 열광적인 믿음을 강권하는, 소위 말하는 사이비종파적 냄새가 다분합니다. 즉, [단군]을 매개로 하여 장사를 하는 종교 장사꾼이라는 것이지요. 이걸로 재미를 별로 못보니까 기독교쪽에 붙지 않았나 하는 짐작이 듭니다. [환단고기]로 부터 촉발되어 80년대 부터 시작된 민족사에 대한 환타지적 인플레이션 경향에 휩쓸려 사회에서 제법 이슈화 되자 이에 세력침탈에 불안감을 느낀 개신교 측에서 이 김해경이라는 작자를 내세워 여기저기서 제법 써먹었지요...
한민족이 국조(國祖)로 받드는 단군(檀君)을 배향(配享)하는 사우(祠宇) · 묘당(廟堂). 이 사묘는 대개 건물을 세워 그 안에 단군의 신위(神位)로써 위패(位牌) · 영정(影幀) · 조상(造像)을 모신다. 건물의 구조양식이 일정한 것이 없고, 신위의 봉안도 일정하지 않고, 서로 다른 것이 많다.
고대인들의 단군에 향사(享祀)하는 제단은 대개 산상이나 마을 앞뒤에 있는 노고수(老古樹) 아래에 돌을 쌓아 신이 의지한다고 보는 제단을 설치하였으니, 경기도 강화군 마니산의 참성단(塹城壇)이나 황해도 신천군의 어천대(御天臺), 태백산의 제천단(祭天壇), 묘향산 단군굴 석주(石柱), 발해의 보본단(報本壇) 등 국내 각처의 산상에서 볼 수 있는 산왕단(山王壇) · 산신단(山神壇) · 성황단(城隍壇) 등 노천제단(露天祭壇)이 있고, 각 촌락에서 수호신을 향사하는 당산(堂山) 등이 있다. 이와같이, 노천제단을 구축하고 크고 높은 노고수를 당산신수(堂山神樹)로 하며, 솟대를 세워 신역(神域)으로 하여 신에게 제사하는 전통민속은 삼신(三神) 가운데 한분인 환웅천왕이 신단수 아래에 제단을 설치 했던 방식이 오랜 시대를 통하여 유사한 형태로 전승되어 온 것이다.
고구려가 망할 때 발해에서는 백두산에 보본단과 대숭전(大崇殿)을 수축하고 고려에서는 원나라의 침략과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평양에 단군묘 · 숭령전(崇靈殿)을 짓고 평안남도 강동군에 단군릉(檀君陵)과 단군묘(檀君廟)를 설치하고, 단군이 어천(御天)하였다는 황해도 구월산에는 삼성사(三聖祠)를 세움으로써 건축으로 된 단군사묘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조선왕조로 개국된 뒤에도 초기에 평양의 단군묘와 구월산의 삼성사를 수리하는 등 역대의 국조숭배를 계승한 바도 있지만, 단군숭배의 풍조가 가장 극치에 오른 것은 한말에 러 · 일 등 외세의 침략으로 국권이 실추되는 위기에 처하였을 때였다. 이때는 국내의 우국지사들에 의하여 단군영상을 모시는 종단의 조직이 발생되었다. 1890년경 평안남도 맹산사람 김염백(金濂白)이 단군숭배를 목적으로 하는 신교(神敎)를 창립하였다. 1904년 백봉(伯峰) 등 33인이 백두산 대영전(大靈殿)에서 단군교(檀君敎) 포명을 함로써 이를 계승한 나철(羅喆)이 1909년 한성북부 재동교당에 단군영상을 봉안하고 단군교 중광식(重光式)을 가짐으로써 국내에 단군숭배의 의식이 고조되고 단군전 창립의 수가 늘게 되었다.
1913년 충청남도 사람 이진탁(李鎭澤)이 논산군 두마면(계룡산 신도안) 작산(作山)마을에 단군전을 세우고 단군영묘계(檀君永墓계)라는 조직을 가지고 향사운영을 하게 된 것이 지방단군전 건립의 효시가 되었다. 또, 이해 충청남도 서산사람 이민걸(李敏杰)이 단군영정봉안회를 조직, 운영하였다. 1916년 전라남도 곡성의 사학자 신태윤(申泰允)이 곡성읍내 뒷산 골짜기에 움막을 짓고 단군을 봉사하였으며, 1923년 전라남도 해남사람 이종철(李鍾轍)이 해남군 화산면 금풍리(金豊里) 자기의 종산에 재실모양의 삼성사를 세우고 단군을 모시었다.
1930년 단군교의 중진인물인 정훈모(鄭熏謨)가 나철과 의견을 달리하여 친일파 박영효(朴泳孝) 등의 협조를 얻어 경기도 시흥군 녹동(鹿洞)에 단군전을 세웠다.
8 · 15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단군숭영회 주관으로 경상남도 밀양군에 밀양천진이 세워지고, 1947년 충청북도 중원에 원용선(元容璿)이 주덕면 어래산에 제천단과 단군비각 단군소상까지 세웠다. 이무렵 충청남도 연산 개태사(開泰寺)에서는 단군각을 따로 세우고 단군을 모셨으며, 계룡산 신도안 법정사(法正寺)에서 사내에 단군을 모시는 전각을 따로 세우고, 또 절밖에 단군만을 봉안한 계룡천진전(鷄龍天眞殿)을 세웠다.
1948년 충청북도 증평사람 김기석(金箕錫)이 단군숭봉회를 조직, 사재를 털어 증평단군전(曾坪檀君殿)을 세우고, 이해에 부여 장암면 장하리에 대종교인 강진구(姜鎭求)에 의하여 장하단군전(長蝦檀君殿)이 세워지고, 1951년 대종교인 김현승(金顯昇)이 이리단군전(裡里檀君殿)을 세우고, 1955년 대구의 최창묵이 대구단군전을 세웠다. 이해에 대전에서 이남성(李南星)이 대전단군전을 세웠다.
1958년 대덕사람 박노철(朴魯喆)이 유성면 감동에 단군대황전(檀君大皇殿)을, 이백님(李白任) 여인이 연산 청동리에 단군천진전과 개천탑(開天塔)을 세웠다. 이듬해에 부여 내산면의 조일광(曺一光)여인이 내산천조전(內山天祖殿)을, 1964년 계룡산 신도안 남선리에 남지훈(南芝薰)여인이 남선단군전(南仙檀君殿)을 세웠다.
1960년 경상남도 마산사람 강길룡(姜吉龍)이 단군전을 짓고, 1957년 조용승(曺容昇)이 단민회(檀民會)를 조직, 석전등에 왜관단군전을 세웠다. 1960년 신길룡(愼吉龍)이 경상남도 진주 옥봉동에 진주단군전을, 이해에 청원살람 김재형(金在衡)이 국조단군봉찬회를 조직, 강매면 은적산(銀積山)에 단군제단을 설치하였다. 함경남도출신 박효달(朴孝達)이 1957년 서울 남산석굴을 이용, 그 안에 단군소상을 봉안하고 단군굴(檀君窟)이라 명칭하였다.
1961년 전라북도 순창의 유학자 신학우(申學雨)는 단군전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 군민의 성금을 모아 순창읍 가남리에 단군전을 짓고, 충청남도 연기에 본부를 둔 단군천선금강대도(檀君天仙金剛大道)에서 1962년 경상남도 거창 월천면에 세운 그의 지부법당 한쪽에 단군영상을 모시고 자칭 거창단군전(居昌檀君殿)이라 하였다. 1962년 정재천(鄭栽千)이 대황조단군봉안회를 조직, 우선 부산직할시 서대신동 사택에 단군영상을 모셨다.
충청남도 부여의 역학자(易學者) 강화(姜和)가 부소산단군전봉찬회를 조직, 1964년 부여읍 쌍북리 자기집 대지에 임시노천제단을 쌓았으며, 개성사람 김흥인(金興仁)이 1965년 서울 도봉산에 수양원을 짓고, 법당에 관세음보살과 단군상을 모시고 뜰앞에 단군소상을 세웠다.
1967년 서울 누상동 천화불교(天華佛敎) 대표 이숙봉(李淑峰)이 사직공원 안에 백악전(白岳殿)과 사직기념관을 세워, 이희승(李熙昇) 등 원로학자들이 설립한 현정희(顯正會)에 넘겨 운영하게 하였으며, 1978년 현정회 제작 단군영정이 정부표준영정으로 지정받게 됨을 계기로, 단군전 재건립운동이 일어나 한때 찬반논의가 있었으나, 1990년 그 자리에 새 단군전을 다시 세웠다.
1968년 단단학회(檀檀學會)대표 이유립(李裕립)이 강화 마니산록에 환인 · 환웅 · 환검의 삼신일체환환상제(三神一體桓桓上帝)를 모시는 커발한 개천각(開天閣)을 세웠다. 앞에서 든 단군사묘중에 계룡산 신도안에 군(軍)의 지역개발로 인하여 작산 · 계룡 · 남선 등 3개 단군전이 철폐되고, 모촌 · 시흥 · 은적산 · 대전 · 유성 · 내산 · 순창 · 부산 · 부여 · 마산의 단군전이 이개축(移改築)과 운영기관의 변동이 있을 뿐이고 모두 건재하다.
여기에 신증된 단군숭봉 기관으로서 서울 휘경동에 박종간(朴鍾干)이 창설한 단군마니숭조회의 교당,
[서울 강동구 삼천동에 김해경(金海京)이 세운 단군교],
서울 강남구 방배동에 정봉화(鄭鳳和)가 세운 단시교(단市敎), 서울 종로구 숭신동에 박계림(朴桂林)이 세운 개천교(開天敎), 서울 청운동에 신정일(申正一)이 창립한 한얼교, 강원도 평창군 청옥산에 배선문(裵善汶)이 세운 삼신신앙대본사(三神信仰大本司), 남해 금산에 김연섬(金淵蟾)이 세운 삼신당수도원에 단군영상 · 소상 등을 봉안하고 있다. 또한 단군을 신봉하면서도 다른 종교와 함께 복합신앙을 하는 인류광명도덕보본회(人類光明道德報本會) 대표 정교순(鄭驕橓)은 유성과 전주에 교당을 두고, 단군정신선양회(檀君精神宣揚會) 대표 한찬(韓燦)은 서울의 본부와 강화 · 김제 등 지부에 단군을 모시고, 충청북도 대전 보문산에서 자칭 도인이라는 김백룡(金白龍)은 단군숭봉을 주로 하는 세계평화탑을 세웠으며, 마산단군전을 세운 강길룡은 근래 지리산에 단군전을 건립하였다.
이밖에 비단군계(非檀君系)종단인 동학계(東學系)의 동도교 · 수운교 · 동학회 등 · 교단과, · 증산교계(甑山敎系)외 증산대도회 · 증산선불교 · 삼덕교 · 보화교 등 70여의 교단에는 단군을 모시는 별전까지 둔 곳이 많다. 불교계 종단인 대한불교미륵종 · 용화종 · 천화불교 · 삼선교 · 법화종 등 단군국조 숭봉을 의무로 하는 불사가 많다. 각세도(覺世道) · 봉남교(奉南敎) · 일관도(一貫道) · 무속계(巫俗系) 기타 계통불명의 대다수 교단에서 단군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기독교계 신흥종단인 정도교 · 천주섭리사상연구원 · 세계일주평국 등 6개교단에서도 단군을 숭봉한다. 이밖에 한배달 · 개천학회 · 한사상연구회 등 14개의 단군연구를 하는 학회와 단민회 · 재천민족대회 · 배달민족회 등 사회단체에서도 단군영상을 모시고 있다. 단군을 주신으로 모시는 대종교의 지부가 전국에 100여개소가 있다.¶
둘째, 단군교(檀君敎).
20여년 前 교주 김해경씨가 만든 단군교(檀君敎)가 있다. 그는 17년 동안 단군교의 교주로, 학봉대선사로, 박수무당으로 수천 명의 신도를 거느린 교주로 있다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속에 사탄의 왕관을 벗고, 그 스스로 단군교를 해체하고 , 신학교에 입학한 후 목사가 되어서 5-6년 전에 강남에서 목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주였던 김해경씨는, 단군교는 철저하게 오늘날의 무당 즉 귀신을 섬기는 자들과 하나되어 있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그도 단군교 교주이자, 박수무당 노릇을 한 것이다. 단지 자신은 교주이니까, 다른 무당보다는 영역(靈力)이 더 강하였다고 한다.
그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단군교를 스스로 해체하고, 그가 쓴 책의 제목은 " 주여 사탄의 왕관을 벗었나이다." 이다. 그는 " 이 땅의 시조 단군이 섬기던 참신이 진실로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라고 고백을 하고있다.
이상에서 볼 때 단군교의 영적 실체를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민족종교로 자부하던 단군교의 교주였으며, 사회 유명인사들이 드나들던 점집의 박수무당이던 저자가 단군교의 해체를 선언하고 주님께 돌아온 과정을 그린 생생한 기록. 출간되자마자 사회적 관심을 끌면서 기독교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차례]
예수 믿는 것들을 잡아죽여라 / 천하가 내 손에 있소이다 / 하나님, 나를 놓아 주소서 / 조상 때문에 망한 사람들 / 단군교를 버리며
글을 쓰고 나서
저자 약력
[내용 맛보기]
지난 날 나를 만난 사람들, 뜬구름 같은 부질없는 인간적 욕망과 탐욕을 가지고 아무런 진리도 목표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성공해야겠다, 출세해야겠다라는 마음으로 나에게서 기쁜 소리, 부자된다는 소리와 출세한다는 소리를 듣고서 거기서 빠져버렸던 사람들. 그들의 엉뚱한 생각에 달콤한 소리로 그들을 속인 나는 진정 사탄의 왕이었으며 주님의 회초리를 맞아야 할 죄인 중에 죄인이었다. -본문 중에서
첫댓글 다음은 태그 먹이기가 넘 힘들어... (-.,-a)
son of bi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