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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안갈려고 하니 한심스럽 습니다. 물론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일부 몰지각한 몇사람들 때문에 이건 나라 망신 입니다. 제 아들 둘다 갔다왔고. 저역시 병장 출신 입니다. 지금으로 부터 36년전 생각이 떠올라 몇자 적어봅니다. 기본교육 6주를 마치고 자랑스런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후반기 특과병 교육 대전 병참학교에서 교육받고 101보를거쳐 1사단11연대 근무중대 본부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힘들었든 졸병 생활 밤늦게 줄 빳다. 영하 20도에 중대사전에 반스 바람에 집합. 이럴때는 추운것이 아니라 살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여름밤에 반스 바람에 집합은 모기 때문데 더 큰 고통 이였습니다. 모기 회식을 시켜 주었으니 까요 ㅎㅎ 서부 전선은 왜그리 춥고 눈이 많이오든지 첫 겨울은 눈치우다가 다 보냈습니다. 그리고 지오피 생활도 1년 했습니다. 지오피 생활에 기억에 많이 남는것은 임자없는 밤따서 먹고 가끔식 수송부 운전병들이 야간운행에 잡아오는 사슴 고기 먹었든것 많은 추억이 있었습니다. 정기 휴가는 소총 중대에는 15일식 1년에 두번 기행부대에는 1년에 한번 25일 저는 1년에 한번식 25일 휴가였습니다. 어려운 고통도 많이 있어지만 즐거움도 많이 있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군인정신" 사회 생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병장 진급이 장군 진급만큼 힘들었습니다. 월남 철수 병장을 빼면 겨우10%정도 아마51-52년생은 그진 상병제대였습니다. 저는 운좋게 병장 작대기 4개를 달았습니다.^^ 중대장님은 병으로 입대하여 병장까지 달고 장교로 지원하여 삼사 1기라 했습니다. 별명이 미친개 였습니다. 얼마나 혹독 했든지. 그러나 몇년전에 10여명의 전우들이 만나 소주 한잔 나누면서 별명 예기하며 웃었습니다. 중대장은 대위로 예편하여 부천에 살고있다고 합니다. 중대장을 비롯하여 저를 기준으로 1년고참 1년후배들은 폰으로 연락이 가능 하며 가끔식 만나 회포도 풉니다. 연대본부에는 본부중대 근무중대 의무중대가 있었는데. 제가고참이 되었을때 본부중대 근무중대가 통합이 되어 본부대가 되었습니다. 다른 과는 그대로 통합이 되었는데 유독 본부만 산산조각 뿔뿌리 흩어 졌습니다. 저는 의무중대로 갔고 인사계님은 (배종태 상사님) 전투 지원중대 인사계로 가셨습니다. 인사계라 하면 그 당시 군생활 했든 분들은 모두가 X 싸계라하죠ㅎㅎ 그래도 저는 그분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배종태 상사님!! 타 중대로 가셔서 만나기도 힘들었는데 제가 제대 특명을 받고 모든 업무에 손을 떼고 지겨운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때 제대 딱 1주일 남았을때 일부러 연대본부에 들려 저를 찾아와 전역하여 열심히 살아라 하시며 건네 주시던 1주일 짜리 휴가증 이였습니다. 군대나 사회나 끈끈한 정은 있습니다. 지금 나이가 70 이 넘었을줄 압니다. 한번 보고 싶습니다. 저의 군대 생활 34개월 14일 만에 전역을 했습니다. 36년이 지났지만 생각이 나서 한번 적어 보았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한번 가보세요. 많은걸 배웁니다. 그리고 각종 모임 회식 자리에 꼭 한번은 나옵니다.. 군대생활 이야기... 물론 진실반. 뻥 반 이겠죠 ㅎㅎ 요즘 가을 날씨가 너무 좋습니다. 항상건강하시고. 즐겁게 사시길 바랍니다. 열중셨---중대차렸--<전-진>-- -상록수- 1.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일도 많다만, 너와나 나라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뜨고 해가 질적에, 부모형제 나를믿고 단잠을 이룬다. 2. 입으로만 큰소리쳐 사나이라드냐? 너와나 겨레지키는 결심에 살았다. 훈련과 훈련속에 맺어진 전우야, 국군용사의 자랑을 가슴에 안고, 내고향에 돌아갈땐 농군의 용사다. 3. 겉으로만 잘난체해 사나이라드냐? 너와나 진짜사나이 명예에 살았다. 멋있는 군복입고 휴가간 전우야, 새로운 나라 세우는 형제들에게, 새로워진 우리생활 알리고 오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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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도 주님 주신 좋은날 입니다.주안에서 평강이 넘치시길 기도 합니다
~할렐루야~ 주의 사랑으로 항상 행복한 삶 되세요.-박상수 집사-
좋은글 고맙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