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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손을 씻고 나온 희진은 털썩 소파에 몸을 내던지듯 쓰려져버린다. 그런 희진의 눈 앞에 시연은 차가운 맥주캔을 들이 밀었다. 시연이 내민 캔 맥주를 본 희진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낚아채듯 맥주캔을 빼앗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긴장하고 있었나보다.
"하여튼 내가 니 년때문에 제 명에 못 살지. 어째 하루도 조용 할 날이 없냐?"
"조용하면 재미없잖아. 가끔 스릴을 만끽해야.........."
"뚫린 입이라고 대답은 납죽납죽 잘도 하네."
"아무튼 고마워. 이 웬수 꼭 갚을께."
곁에 다가와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시연을 튕겨버린 희진이 하얗게 눈을 흘겼다. 미안한 듯 손에 들린 맥주캔을 부딪혀 보이는 시연을 보며 희진은 정색을 해 보였다.
"너 오늘 이거는 완전 대형 사곤 거 알아?"
"내가 친 사고 아니야. 저 아저씨가 친 사고지."
"미친년, 니가 친 사고 아니라면 경찰을 부르던가, 아님 119를 불러서 실고 가라고 하면 될 걸 기여이 집안으로 끌여들여서 사고로 만든 건 또 뭐야. 일을 이지경으로 만들어놓고는 그래도 사고 친게 아니라고 뻔뻔스럽게 주둥이를 놀리냐?"
"그럼 어쩌냐? 다 죽어가면서도 경찰은 안된다고 통 사정을 하는데, 옛말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 잖아. 근데 저 아저씨는 아직 살아있는데, 부탁 들어줘야지."
"어이구 지랄이 풍년을 하는구나. 오지랖이 넓어도 니가 감당 할 수 있을 만큼만 넓어야지, 뭐 아저씨? 저 자식이 어째서 니 아저씨냐? 저 자식이 뭐 하는 인간인 줄 알고 그런 부탁을 들어준거야?"
"그거야 뭐......."
"저 상처, 무식한 니가 봐도 칼에 찔린거라는 것 쯤은 알고 있겠지?"
"대충은......."
"대충 같은 소리하고 있네. 경찰도 안된다, 119도 안된다 그럼 딱 답이 나오잖아."
"무슨 답?"
"그냥 봐도 조폭 아니면, 마약 밀매상이야. 그것도 아니면 살인 강도? 급이 좀 떨어진다손 치더라도 양아치쯤은 되겠다."
"그렇게 보여?"
"그럼 니 년 눈에는 저 자식이 백마 타고 온 왕자님으로 보이냐?"
"왕자님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양아치는 아닌거 같아서....왠지 좀......."
"너 지금 저 자식 얼굴 반반한거 보고 그러는 거지!"
"그게 아니라 그냥 험한 일을 하는 사람 같지가 않아서 그러는 거야. 잘은 모르겠지만 귀티가 나는 게 있는 집 사람 같아서........"
"있는 집 사람 좋아하네. 좀 사는 놈들이 미쳤다고 저러고 다니냐? 하긴 족보있는 순종 마티즈나 똥개나 먹고 싸는 건 똑같다."
"하여튼 비교를 해도.......넌 참 이상해. 동물을 사랑해서 수의사를 하겠다는 게 맨날 개 새끼, 소 새끼를 입에 달고 살아. 너 정말 동물을 사랑하기는 하는 거냐?"
"망할 년이 할말 없으니깐 말을 돌리고 있어. 당근! 애착이 있으니깐 욕도 하는거야. 욕쟁이 할머니들 봐. 욕하면서도 해장국 같은건 푸지게 퍼 주잖아."
"그거랑은 차원이 다르지. 암튼 21세기를 살아가는 인재의 입에서 나올 말들은 아니야."
"왜? 우아하게 손가락에 물 튕기면서 고상 떨고 살아야 21세기를 이끌어가는 인재가 되는 거냐?"
"딱히 그런건 아니지만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이 있는데 어느 정도 정화가 필요하다 생각하지 않아?"
"욕은 인류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야. 지친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원동력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덕분에 스트레스 같은 건 절대 쌓이지 않을테니 평생 암에 걸릴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니깐. 그러는 의미에서 너도 내숭 떨지말고 한 번씩 해봐! 많이는 말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내가 절대 소문도 안내고 못 들은 척 해줄테니깐."
"난 양반이라서 속으로만 욕 해."
"그래 너 잘났다. 재수없는 년!"
별로 설득력 없지만 그래도 희진이 동물을 사랑한다는 건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남아있는 맥주를 들이키는 희진을 보며 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댄다. 저 예쁜 입에서 나오는 말이 조금만 순화된다면 분명 현모양처가 따로 없을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너, 솔직히 동물들이 니가 욕하는 거 못 알아들으니깐 수의사 한다고 한거지?"
"어이구~ 똑똑한 년! 누가 데려갈지 무섭네. 사람한테 이 새끼, 저 새끼했다간 바로 고소당할껄! 환자의 인권이 어쩌구 저쩌구........ 동물은 그런게 없지. 개 새끼든 소 새끼든 진료실에 들어가서 뭔 소리를 하든 지 주인한테 이를거냐 어쩔거냐. 그저 마음으로 성심을 다해 진료를 해주면서 사랑을 주면 내가 무슨 욕을 하든 핡짝핡짝 핣아주거든."
"그러지 말고 다시 시험 쳐 보는건 어때? 내가 충분히 밀어줄 수 있는데...."
"밀어주긴 뭘 밀어주냐? 벼랑 끝에서 밀어줄거야 아님 목욕탕에서 등 밀어줄거야?"
"나 돈 많은 거 너 알잖아."
"미친 년! 하여튼 욕이 고파서 안달났지. 그 많은 돈 놔두고 넌 왜 맨날 다리 퉁퉁 부어가면서 알바뛰는 건데?"
"그거야........"
"원산지 불순한 돈을 왜 나한테 떠넘겨?"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는 인간적인 의사를 만들어주는건데, 원산지가 불순하든, 냄새가 나든 뭔 상관이야. 오히려 환골탈퇴하는건데, 게다가 그 돈 주인들도 자신도 모르게 사회의 정의를 위해 일부 기여하게 되는 거고....."
"잘났다. 그래서 오늘도 한 껀 했냐?"
순간 시연의 표정이 굳어지며 말이 없어졌다. 희진은 그런 시연을 보며 새로 딴 맥주캔을 내밀었다. 말없이 맥주캔을 받아든 시연이 맥주를 들이킨다. 같이 알바를 하는 지영이 그새 희진에게 알렸나보다. 하긴 어차피 내일이면 다 알게 될 일이다.
"그래도 오늘은 물 안 뒤집어 썼잖아."
"장~하다. 그래서 오늘은 물 대신 얼마를 던져주디?"
"글쎄......."
가방을 뒤적이던 시연이 구겨진 흰 봉투를 꺼내 희진 앞으로 툭 던져주며 아직 남아있던 캔을 마저 비워냈다. 시연이 던진 봉투를 주워 안을 확인하던 희진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툭하니 다시 봉투를 던져버린다. 개새끼, 소새끼 욕지꺼리를 해도 핡짝핡짝 핡아대고 부벼대며 애정어린 몸짓으로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해주는 짐승들이 백번천번 낫다는 생각이 또 한번 드는 순간이다.
"싸가지 없는 고딩 쉐끼가 겁대가리를 상실해도 유분수지. 확 눈썹을 몽창 뽑아버리지 그랬냐!"
"아~ 맞다. 진짜, 그렇게 해줄껄. 생각해보니깐 그냥 보낸게 아쉽네."
"이 년은 어째 머리도 나쁘지 않는것이 가끔 맹하단 말야. 암튼 그 고딩 쉐끼, 내 눈에 다시 띄기만 해봐! 아이구, 누님 살려주십시오 소리가 절로 나오게 늘씬하게 패줄테니깐. 망할놈의 자식!"
"또 시작한다."
"그 애미라는 것도 참 한심하다. 애 새끼가 그모양이면 확 머리채를 휘어잡고 끌고가서는 꺼꾸로 매달아서 삼박 사일 몽둥이 찜질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해줘야지, 똑같이 노는 꼬라지하고는. 어째 한술 더 떠서 지랄을 떨어. 하여튼 오늘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것들 다 죽었어."
"그렇지? 아쉽긴 하더라."
한껏 흥분한 희진을 보며 시연은 배시시 웃어보였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엄마에게서 그런 자식이 나올수는 없는거다. 뭐 어쩌다 부모와는 상관없이 싸가지 없는 자식이 있을 수도 있다지만 오늘 그 모자는 세상사는 의미를 또 한 번 잃어버릴만큼 허탈하기만 했다.
"뭐 죽을 죄 졌다고 코를 빼고 앉았어! 하여튼 내가 이래서 인간들이 싫다."
"너두 사람이구 나도 사람이야.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거잖아."
"사람이 싫은게 아니라 인간이 싫다구! 인간 군상들!!"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키는 희진을 보며 시연은 이렇게 앉아서 그들이 한 행동에 욕을 퍼붓고는 있지만 어쩌면 자신 역시 그 인간 군상들 속에 속해있을거라는 생각에 씁쓸하기만 하다. 빈 맥주캔을 톡하니 던진 희진이 벌러덩 방석을 반으로 접어선 베고 누워버린다.
"안 갈거야? 여기서 잘려구?"
"지금 몇신줄 아냐? 올 때도 택시 할증료 내고 왔는데 또 할증료 내고 가라고? 망할 것. 그리구 조폭인지 양아친지 모를 저런 시커먼 사내놈이 떡하니 아저씨, 아줌마 안방을 차지하고 누워있는데 어떻게 가냐? 하여튼 겁대가리 없다니깐. 그러다 저 자식이 확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러구 그러냐?"
"아무리 조폭이구 양아치라도 설마 생명의 은인을 덮치기야 할려구?"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다. 자고로 남자라는 족속들을 치마만 두르면 무덤이라도 파헤친다더라."
"누가 그런 소릴해?"
"위대하신 우리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니깐 믿어도 돼!"
"무슨 육이오때 얘기를 하냐? 칼 맞고 꿰매놨서 제대로 일어서기도 힘들건데 덮치기 씩이나.........혹시 내가 덮친다면 또 모를까."
"그것도 무시할 수 없는 거고."
"설마 너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건 아니지?"
"미친 년! 내가 아무리 아쉬워도 양아치는 노땡큐다. 그리고 저 조폭, 오늘밤 열이 오르는지 살펴봐야 해. 링겔도 살펴봐야 하고........어휴!! 내가 아무리 강심장에 막가파라고는 하지만 내 평생, 개 새끼들 약을 사람한테 써보긴 첨이네."
"그러고보니 그러네? 괜찮을까?"
"참 빨리도 걱정한다."
"설마 괜찮겠지?"
"나도 몰라. 나도 저 자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왈왈거릴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구. 하다못해 가슴팍에 털이라도 북실거리고 난다면............ 아니지 가슴팍에 털은 패스!!! "
"그건 왜 패스야?"
"가슴에 난 털은 왠지 섹시하잖아."
"이그~변태! 징그럽게시리......."
"아무튼 당분간은 나 여기서 먹고 자고 할테니깐 그렇게 알아."
"나야 좋지."
"근데 너 저 자식 어떻게 옮겼냐? 상태보니깐 자기 발로 걸어온 건 아닌거 같은데."
"완전 죽을 뻔 했어. 진짜 무거운데 그래도 급하니깐 어떻게 옮겨지기는 하더라. 근데 도저히 내 방까지는 못 끌고 가겠더라구"
"거실까지 끌고 온 것도 다행이다. 둘이서 아줌마, 아저씨 방으로 옮기는 것도 완전 진을 뺐구만."
"괜찮을지 몰라. 그후로 한번도 사용안했는데, 보일러도 잠궜었는데."
"골고루하고 있네.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아저씨 아줌마 방까지 내줬으면 됐지, 보일러 걱정까지 하냐?"
"춥잖아. 그렇다고 거실에 그대로 놔둘수도 없는 일이고."
"어이구~ 웬수 덩어리. 나도 모르겠다. 니 집인데 니 꼴리는대로 해라."
빗쟁이처럼 거실 소파에 벌렁 누워버리는 희진이지만 실은 혼자 있을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걸 잘 안다. 유치원때부터 지금껏 함께 자란 친구, 엄마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에 떠나고 혼자 남겨졌을 때도, 곁을 지켜준 친구 희진이 시연은 한없이 고맙기만 하다. 시연은 덩달아 쿠션을 베게삼아 끌어당겨선 벌러덩 희진의 옆에 누웠다. 그나저나 희진이 말처럼 저 사람, 동물 약으로 치료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혹시 부작용으로 가슴팍이 아니라 얼굴이나 손등에 털이 나면 어쩌지? 시연의 개그같은 걱정에 아랑곳없이 희진은 벌써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고맙다 친구야. 그런 의미에서 내일 아침은 콩나물 국에 두부 조림이다."
"나 왔어!"
"왔어? 저녁은 먹었어?"
"당근 못 먹었지. 알바까지 땡깠는데 어디서 저녁을 먹냐?"
현관에 주저앉아 낑낑거리며 종아리를 감싸고 있던 롱 부츠를 벗어던진 희진이 무릎 걸음으로 재빨리 시연에게로 기어왔다. 거실 탁자 가득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고 있던 시연은 옆으로 기어와 앉아 턱을 고이는 희진을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야!"
"왜?"
희진이 탁자 가득 펼쳐진 책에서 시선을 떼지않고 있는 시연을 보며 심술이라도 난듯 그녀가 보던 책을 탁 덮어버린다. 돌발 행동에 놀란 시연이 번쩍 고개를 들었을때 희진은 턱짓으로 방을 가르켰다. 어젯밤 흘러들어온 정체모를 남자의 안부를 묻는 것이라는걸 잘 아는 시연은 여전하다는 듯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다시 책을 펼치려했다. 하지만 대답이 성에 차지않는 희진은 다시 펼치려는 책을 꾹 눌려버리며 시연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어젯밤에 그런 개 고생을 시켜놓고는 고 따위 성의없는 대답이 고작인거야."
"성의 있게 대답한거야."
책 보는 걸 포기한 시연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희진과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여지껏 기다렸던 터라 배가 고팠던 시연은 이내 주방으로 가 미리 준비해놓았던 저녁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희진이 시연 옆으로 쪼르르 쫓아와선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아직 안 깨어난거야? 아님 깨어났다 다시 자는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왜 몰라!!! 하루종일 도서관도 안가고 알바도 땡까고 지켰으면서!!!"
"야, 목소리 좀 낮춰."
"뭐, 깰까봐? 시간이 몇신줄 알아? 자고 있는게 더 이상하거든."
"그런거야? 걱정되서 집에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하루종일 저 사람 옆에 붙어서 앉아있냐? 꼼짝도 안하고 누워만 있는데 그걸 하루종일 지켜보고 있을수도 없잖아. 아무튼 내가 알기로는 눈 안 떴어."
"눈 안 떴어?"
"근데 희진아, 의식이 없는거랑 잠자는 거랑 뭐가 다르냐?"
"그거야 숨 소리가 고르고........멍충이!! 그러니깐 내가 119에 신고하랬지! 저러다 진짜 죽어버리면 어쩔건데!"
"죽진 않았어. 아까 니 전화 받고 링겔 뺄 때 살짝 들여다보니깐 숨은 쉬고 있더라구."
"하여튼!!!! 그 머리로 법대 들어간 게 신기하다니깐. 잘 나가다가도 한번씩 맹하는데는 내가 미친다니깐!"
"법대랑 이게 뭔 상관이야. 내가 의사도 아닌데."
"그럼 난 의사냐?"
"너야 비슷하잖아."
"비슷? 아무튼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것보다 알아봤어?"
"뭘!!!"
"약 말야."
"아~ 약. 괜찮대. 아버지 말이 사람 약이나 개 새끼들 약이나 내용물은 비슷하대."
"어휴~ 다행이다. 나 사실 걱정했거든. 진짜 부작용으로 얼굴에 털이라도 북실북실 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망할~ 다행은 개뿔이 다행이냐!! 그거 물어보느라 내 머리통만 작살났다. 나 머리통 부은거 안 보여!! 20년지기 친구년 안부는 안중에도 없고 어디서 굴러먹던 개뻑다귀 같은 양아치 새끼 걱정만 해!! 목숨을 살려줬는데 털 좀 나면 어때서!!!"
"걸렸어?"
퉁퉁 부은 얼굴의 희진은 어젯밤 시연의 아버지 동물병원에서 급한대로 집어온 약 때문에 오늘 제대로 쥐어박히고 오는 길이었다. 아직 면허도 안 딴 학생 주제에 아무리 주워온 개라지만 겁도 없이 임의로 치료를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둘러댈 핑계가 없어 시연이 길에서 유리에 찔려 다 죽어가는 개를 주워왔다고, 그래서 급하게 약을 가져갔노라 변명을 댄 희진으로써는 그야말로 비오는 날 먼지나도록 맞을 뻔 했다. 오유월에 개 잡듯 빗자루를 휘둘러대는 아버지를 피하는 일은 이제 이골이 났지만, 아무튼 그 잔소리를 고스란히 들어야만 했던 희진으로써는 억울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곧이 곧대로 동물 약을 사람에게 썼노라 말할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변명 한마디 못한채 고스란히 욕 바가지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무면허로 길에서 죽어가는 개를 주워와 살렸다 말하는 게 낫지, 길에서 죽어가는 남자를 주워와 치료했다고 했다간 에누리없이 바로 황천길로 직행 했을 것이다. 그렇게 팔자에도 없는 개 고생을 하고 왔는데 친구라는게 얼굴을 보고도 관심은 커녕,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 뻑다귀같은 양아치 자식 얼굴에 개 털 나는거 아닌가 걱정했단다.
"하여튼 친구라고 하나 있는 게 인생에서 도움이 안돼."
"아저씨한테 많이 혼났어? 맞았어?"
"장사 하루이틀 하냐? 노친네가 갈수록 기운이 뻗쳐선, 아무래도 우리 엄마가 나 몰래 보약해줬나봐."
시연은 툴툴거리는 희진을 보며 미안한 얼굴을 해보인다. 알고보면 다 자신때문에 혼이 난건데 몰라줬으니 심통이 날만도 하다. 시연은 이내 아부라도 하듯 준비해 놓은 저녁 식탁으로 희진을 끌어다 앉혔다. 김치, 멸치 볶음 같은 밑 반찬 몇가지와 새로 한 두부조림, 그리고 따뜻한 콩나물 국으로 차린 저녁상은 진수성찬까지는 아니지만 둘이 앉아 맛깔나게 먹을 수 있는 저녁식사였다.
"쏘리, 쏘리, 내가 아저씨 생각을 미쳐 못했어. 아무튼 안 맞고 잘 피했잖아. 그걸로 된거지."
"되긴 뭐가 돼? 그거 최소한 한달짜리거든."
"알았어. 한 달! 우선 밥부터 먹고 얘기하자. 너 오면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어. 이거 다 너 주려고 만들어놓은거야."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해라."
"거짓말까지는 아니고, 사실은 아침 해줄려고 했는데 늦잠 자서 못했어. 어제 우리가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봐."
"맥주같은 소리 하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고작 맥주 두어캔 정도로 나가 떨어질 우리냐? 멀쩡히 잘 뛰고 있던 내 심장이 너 때문에 탈출을 시도해 땅 바닥에 딩굴고 있는 걸 겨우 다시 주워담아서 그렇지."
"사실 나도 많이 놀라긴 했어."
"망할년, 근데 두부 꼬라지가 왜 이 모양이야? 성질난다고 어디 패대기 쳤냐?"
"아니, 어제밤에 저 아저씨때문에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았었거든. 아마 그때 뭉개져나봐. 그래도 먹는데는 이상 없어."
"잘났다. 그럼 뽀개서 동그랑 땡을 하던지 하지, 성의 없이 이게 뭐냐?"
"뭉개지든 뽀개지든 두부 맛이 다 똑같지 어디 가냐? 그래도 너 먹일려구 열과 성을 다해 만든거니깐 앉아."
"망할년, 적성에도 안 맞는 아부를..... 그리고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저 사람 조폭 맞아. 두고 봐라. 눈 뜨자마자 '야! 우리 얘들한테 전화해!' 그럴껄."
"에이~ 설마...."
"나 조폭 아닌데."
"으악!!!!"
"악!!!"
두부 조림을 집어 먹던 희진은 저도 모르게 젓가락을 공중으로 집어던졌다. 희진의 말이 재밌다는듯 헤헤 거리며 막 밥 공기에 밥을 퍼기 위해 밥주걱을 들고 있던 시연 역시 뜻밖으로 들리는 남자 목소리에 놀라 밥그릇과 주걱을 내던지고 비명을 질렀다. 놀라 서로를 부둥켜 안은 두 여자가 뒤를 돌아봤을 때 윗통을 벗은채 옆구리를 움켜 쥔 남자가 불편한 자세로 벽을 집고 서 있었다. 서로에게 찰싹 달라붙어 경계 태세를 갖춘 시연과 희진은 두려움에 가득찬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뜻하지 않게 두 여자를 놀라게 한거같아 미안하긴 했지만 여기까지 본인들이 끌고 왔으니 저렇게까지 경계 태세를 갖추지 않아도 되는게 아닌가 싶다. 눈을 똥그랗게 뜬 채 서로에게 의지라도 하듯 찰싹 달라붙어선 꼭 치한을 보는듯한 두 여자의 반응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한데, 잠깐 화장실 좀 썼으면 하는데...."
"아!!! 화장실!!!! 저기요."
놀란 시연이 얼른 손을 뻗어 화장실 쪽을 가르켰다. 벽을 의지삼아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화장실로 들어가는 남자를 지켜보던 희진과 시연은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듯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거봐, 조폭 아니래잖아."
"넌 지금 저 말을 믿는 거야?"
"자기 입으로 아니라고 하잖아."
"나 조폭이요 그러는 조폭 봤냐? 다들 지들은 사업한다 그러지."
"사업? 무슨 사업?"
"뭐.....옛날에 어떤 영화에서 그러던데....도끼 사업인가?"
"도끼 사업?"
"그래, 좀 오래된 영환데 암튼 거기서 그랬어. 도끼 팔고, 횟칼 판다고."
"에이~ 설마....."
희진의 말에 못내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시연이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자 후다닥 뒤를 돌아보았다. 화장실 문이 열리며 벽을 집고 다시 모습을 들어낸 남자는 여전히 힘든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도끼도 안 팔고, 횟칼도 안 팔아. 아까 말했잖아. 나 조폭 아니라구."
"아~ 들렸구나."
"들으라고 한 소리 같던데."
화장실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던지 남자는 어이없다는듯 피식 웃어보인다. 시연은 처음 보는 남자의 미소가 무척이나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첫댓글 남자는 누군가요
하채경님! 남자는 이 윤성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