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학습만화 '짱글리쉬'의 저자 박주현양은 "영어의 기본은 정확한 발음" 이라고 말했다. | |
“자, ‘milk’ 한번 발음해보세요.”
“밀크!”
“그렇게 발음하면 미국 사람들은 못 알아들어요. 단어 중간에 나오는 ‘l’은 우리말 자음 받침의 ‘ㄹ’로 발음하면 안돼요. 약하게 ‘어’로 말한다는 기분으로 발음을 하세요. 그렇다면 ‘밀크’가 아니라 ‘미역’이라고 하는 게 차라리 원어민 발음에 가깝죠.”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한국식 영어 발음 기호는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박주현(19)양 앞에서 ‘영어 공부 한 게 몇 년째인데…’ 하는 생각은 쏙 들어갔다. 박양이 영어 단어를 읽는 소리는 영어 학습 테이프에서 듣던 모국인의 발음 그대로였다.
지난해 미국 수학능력시험인 ‘SAT’에서 1600점 만점에 1570점을 맞고 하버드대에 합격한 박주현양에게는 ‘짱민정음 창시자’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닌다. ‘짱민정음’이란 박양이 만든 발음기호 표기법으로, 기존의 영어 발음기호와 완전히 다른 방식이다. 예를 들어 ‘love’는 [러브]가 아니라 [ㅡㄹ러v], ‘help’는 [헤ㅓㅡㅍ]이다. 한글의 음운과 자음으로 정확한 발음에 최대한 접근하려고 했다.
5살 때 미국 미시간으로 건너가
한국에서 통용되고 있는 영어 발음 기호는 미국인의 실제 발음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게 박양의 주장이다. 박양은 ‘짱민정음’을 바탕으로 ‘짱글리쉬’라는 만화책을 펴냈다. 고등학생 2명이 학교에서 벌이는 에피소드 속에 중·고교 필수단어와 숙어 4000여개가 담겨있는 영어 학습 만화로 모두 12권이다. 지난 2월 발간된 이 책은 학부모와 학생 사이에 입소문을 타면서 4개월 만에 12만부가 판매됐다.
사실 박양은 ‘국내파’는 아니다. 유학생인 아버지를 따라 5살 때 미국 미시간주로 건너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99년 귀국, 서울 삼육중·고교를 다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한 학기 남긴 지난해 8월 미시간주 앤드루스대학의 교양교직과 교환교수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미국으로 갔다. 박양은 현지 고교에 편입한 후 하버드대에 합격했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19세의 예비 대학생이 기존의 영어 발음 체계가 틀렸다고 나서다니, ‘짱민정음’이라는 명칭 자체가 도발적이다. 기존의 발음 체계를 뒤집는 것으로 모자라 ‘새롭게 만들었다’는 의미로 세종대왕이 창시한 ‘훈민정음’의 이름을 본떴다.
박양은 “짱민정음은 새로운 발음표기의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양은 “알파벳 26개로 표현되는 발음 조합이 1000가지가 넘고,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때까지 발음하는 법을 끊임없이 가르칠 만큼 미국인에게도 영어 발음은 쉽지 않다”며 “한국의 교실에서 가르치는 기호대로 아무리 열심히 연습해도 정확한 발음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박양이 고안해 낸 짱민정음의 발음체계에 따르면, steak는 [스테이크]가 아닌 [ㅅ테이ㅋ]로 발음해야 한다. 자음을 발음할 때는 우리말의 모음 ‘ㅡ’를 완전히 넣지 말고 짧게 발음해야 한다는 것. 또한 ‘R’는 혀를 말아 올리되 입천장에 닿지 않은 상태에서 [ㄹ] 앞에 ‘우’ 소리를 살짝 넣는 기분으로 발음을 한다. 예를 들어 right는 [라이트]가 아닌 [(우)라이ㅌ]로 읽어야 한다. 단어 끝이나 다른 자음 바로 앞에 오는 ‘L’은 절대로 우리말의 ‘ㄹ’처럼 발음하지 않아야 한다. couple은 [커플]이 아닌 [커포ㅡ]로, feel은 [fㅣㅕㅡ]로 발음하는 식이다. 짱민정음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발음 표기 체계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한글을 이용, 그냥 따라만 읽으면 돼 누구라도 쉽게 정확한 발음을 배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박양은 “틀린 발음이 뇌에 인식되면 정확한 발음을 할 수 없고 자신이 할 수 없는 발음은 잘 들리지도 않는다”며 “정확한 발음을 해야 듣기도 잘 할 수 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박양은 “애초에 정확한 발음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아무리 영어 테이프를 들어도 소용없다”며 “짱민정음을 보면서 영어 테이프를 듣는다면 보다 정확하게 발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친구들이 정말 재미없는 단어장을 들고 영어 단어를 어렵게 외우는 게 안타깝더라고요. 그것도 엉뚱한 발음으로 말이죠. 놀면서 재밌게 영어를 공부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만화를 그리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토익 만점
박양은 중학교 3학년 때 토익 만점을 받았다. 영어 문제를 물어보는 친구들에게 늘 둘러싸였다. 영어 공부를 너무나 힘들게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영어 만화책 만드는 것을 구상했다. 삼육고에 입학한 2002년부터 박양은 본격적으로 줄거리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갈등, 우정 이야기를 왼쪽 페이지는 영어 원문으로, 오른쪽 페이지는 한글 번역문으로 실어 비교해가며 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한글 문장 중간중간에 영어단어를 삽입해 한글을 읽으면서도 연상 작용을 통해 영어 단어를 외울 수 있게 했다. 2년 동안의 줄거리 구상을 끝내고 출판사의 전문 만화팀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기존의 영어 발음기호를 ‘짱민정음’식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본문에 나오는 단어의 발음기호는 밑부분에 따로 정리했다. 4000여개의 단어를 ‘짱민정음’으로 바꾸는 작업은 원고를 교정하는 작업까지 합해 6개월 정도가 걸렸다. 이렇게 2년 반의 집필 기간을 보낸 후 출판사 일을 하는 삼촌의 도움으로 지난 2월 ‘짱글리쉬’가 탄생했다.
하버드대학에 지원할 당시 지원서에 첨부한 짱글리쉬를 본 입시 평가위원회에서 “당신의 책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극찬할 만큼 박양의 짱글리쉬는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박양이 영어를 잘하는 것은 단지 미국에 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양의 어머니 이현숙씨는 고등학교 영어교사 출신이다. 미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 박양은 알파벳도 떼지 못한 상태였다. 처음 유치원에 갔을 때는 “애가 말을 안한다”고 유치원 교사가 걱정할 정도였다. 이씨는 박양이 유치원에 가기 전에 한글로 수업 내용을 예습시켰다. 똑같은 내용을 집에서는 한글로, 유치원에서는 영어로 배운 것이다. 이씨는 수업 내용 외에도 박양에게 틈틈이 영어책을 읽어줬다. 박양은 책을 장난감 삼아 지냈다고 한다. 박양이 초등학교 때 읽은 책만 2000여권 정도가 된다.
이제는 최소한 발음만큼은 엄마가 딸에게 배우고 있다. 이씨는 “발음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짱민정음대로 해보니 고칠 부분이 많았다”고 말했다. 박양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영어를 전혀 못하는 외할머니를 위해 영어 발음을 적은 단어장을 묶어 책을 만들어 드리기도 했다. 박양은 “아마 그 때부터 짱글리쉬 책 만들 생각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잠시 귀국한 박주현양은 하버드대학 생활을 위해(미국은 9월에 첫 학기가 시작됨) 6월 14일 다시 출국했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후 UN 고등판무관이 되거나 국제변호사가 돼 한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박양은 “두 개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살려 국제무대에서 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본 기사 작성에는 박국희 인턴기자(freshman2828@naver.com )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