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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생활 속의 금강경
-금강경을 공부하기 전에...-
序
밤에 꿈이 있는 자는 들어가지 못한다
입에 혀가 없는 자는 마땅히 머물러라
夜有夢者不入口無舌者當住
이는 근대의 고승이신 석두(石頭)노스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처럼 밤에 꿈이 있는 자는 금강경의 법문(法問)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입에 혀가 없는 자라야 금강경의 세계에 머물 수가 있습니다.
대승경전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된 금강경의 가르침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직설적입니다.
따라서 그 내용이 심오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원리를 알고 보면 결코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의 그릇된 마음을 항복받는 방법을 설하여
깨달음의 마음, 지혜로운 마음, 곧 보리심(菩提心) 속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이 금강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실천하면
참으로 복되고 지혜롭고 영광이 가득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그릇된 풀이와 그릇된 이해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날 한 스님이 어느 노스님의 친필인
'명암무이시비일진만무이유무동(明暗무無二是非一眞妄無異有無同)' 을 들고와
다음과 같이 풀이를 해 주었습니다.
"밝음과 어두움은 득이 없고 옳고 그름이 하나이며
참됨과 그릇됨은 다름이 없고 있고 없음이 같도다."
이 풀이에 대해 , "그렇게 해석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계합하지 않으니
다시 풀이를 해보라" 고 하였으나, 글을 써주신 노스님도
이렇게 해석을 해주었다며 계속 '맞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귀의 바른 풀이를 일러 주었습니다.
"밝음과 어두움은 둘이 없지만 이것이 하나는 아니다.
참됨과 그릇됨이 다름 없지만 같지 않는 점이 있다."
불교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이라면 이 두 해석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금강경에도 이 구절과 같은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간결하고 직설적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금강경의 내용을 그릇되이 풀이하고 그릇되이 이해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처님께 죄를 짓고 어리석은 길로 빠져드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다해 금강경을 공부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부디 우리 불자들이 생활의 현장에서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응용하여,
참된 자유와 영광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축원드립니다.
불기 2546년 성도재일
雨 龍 합장
꼭 새겨야 할 네가지 주춧돌
금강경은 우리나라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 곧 이 땅에서 마음공부를 하는 불자들이
믿고 의지하는 기본경전입니다.
따라서 많은 불자들이 이 경전을 즐겨 독송하고 깊은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금강경의 주제가 보리심(菩提心)을 ‘어떻게 유지하고 어떻게 나의 그릇된
마음을 항복받을 것인가(云何住 云何降伏基心)’ 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공부하는 이가 드뭅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을 공부하기에 앞서 꼭 마음에 새겨야 할
네가지 사항부터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보리심이 무엇인가
첫째는 ‘보리심’ 의 참뜻입니다.
‘보리’ 는 범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Anuttara-samyak-sambodhi)의 줄인 말로써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번역합니다.
가장 높고 가장 바르고 가장 완전한 깨달음으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가리킵니다.
다라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 줄여서 ‘발보리심(發菩提心)’ 이라고 하면,
‘가장 높고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어 나도 부처가 되겠다’ 는
서원을 담고 있으며, 이 단어 하나로써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요
깨달음을 주춧돌로 삼는 종교임을 나타내어 주고 있습니다.
보리, 깨달음!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장 완전한 부처님의 깨달음!
그래서 사람들은 보리심을 너무나 높고 아득한 경지로 받아들여 감히 접근조차
하려 들지를 않습니다. ‘나’ 와는 무관한 것으로 착각까지 합니다.
그러나 보리와 발보리심,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멀고 아득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남편·아내·부모·자식·형제·친구 등과
대화를 나누거나 행동을 한 다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잘못했다’ 고
반성하는 그 마음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요, 생활 속에서 일으키는
바른 마음, 밝은 마음, 감사할 줄 아는 마음 등이 발보리심입니다.
그야말로 일상 생활을 하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아차, 잘못했구나’, ‘바로 이것이다’, ‘아, 감사합니다’ 하는
이것이 깨달음의 마음이요 발아뇩다라삼보리심인 것입니다.
문제는 운하주(云何住), ‘이러한 마음을 어떻게 잘 유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리심이 일어난 다음 순간, 과거의 습관이나 환경에 휘말려 다시 허물을 짓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중생이기에, 비록 깨닫는다고 하여도 일시에
모든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릇됨은 또다시 솟아납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 그릇됨이 치솟을 때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릴까’를 늘 생각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코 보리심은 완전히 깨달은 이만이 발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누구나 발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크게 깨달을 때 한 번만 발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자비도량참법》에서는 이를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리심은 한 번 발하여 마치는 것이 아니다. 자주자주 발하여야 한다.”
우리 불자들은 이 께달음의 마음을 자주자주 발하여 자신을 채찍질해야 합니다.
나쁜 습관, 그릇된 환경 때문에 처음에는 잘 안 될지라도, 거듭거듭 반성하고
스스로를 일깨워 향상(向上)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보리심을 자꾸자꾸 발하고
덧붙여 게으름의 구덩이, 습관의 구덩이로 빠져들어가는 마음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이겨나가야만 바르고 착하고 밝은 보리심을 한결같이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십 년 몇백 년까지도 그 마음을 유지하고,
거기에 또다시 바르고 착하고 밝은 마음을 덧붙이고 덧붙이는 불자야말로
‘금강경을 가까이 하는 사람’ , ‘올바로 수행하는 사람’ , ‘향상하는 사람’ 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디 명심하십시오. 금강경의 가르침이 ‘나’ 스스로의 마음을 거듭거듭 점검하고 다스려,
향상의 길로 부처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일어났을 때에도 짜증을 부리거나 화를 내지 않고 한결같이 가족을 위해
축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생다겁동안 ‘나’ 로 말미암아 생겨난
업장이 녹아 내리면서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물론 눈앞에 그릇된 것이 보이는데 한결같이 축원을 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특히 다생다겁 동안 쌓아온 습기로 똘똘 뭉쳐진 지금의 ‘나’ 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아집을 버려라
둘째는 ‘나를 비우고 축원하라’ 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나’를 넘어선 존재라면, 중생은 ‘나’ 에 얽매어 사는 존재입니다.
중생인 우리가 ‘나’ 의 굴레를 벗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너무나 ‘나’ 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 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갑니다.
그 멍에가 너무나 무겁고 힘든 것인데도 ‘나’를 비울 줄 모릅니다.
오히려 ‘나’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물론 이 사바세계에서 남보다 잘난 맛이 조금도 없다면 오히려
살 맛이 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아집(我執)과 아만이 ‘나’ 의 보리심과 ‘나’ 의 향상을 방해할 뿐 아니라,
‘나’ 와 ‘나’ 주위의 행복을 가로막기 때문에 ‘나’를 비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녕 우리의 아집은 얼마나 강한 것인가?
우리 불자들이 불보살님께 올리는 축원을 예로 들어 봅시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절에 와서 기도를 할 때 자신보다는,
‘집안 편안하고 남편 건강하고 아들딸 잘 되게 해달라’ 고 축원을 합니다.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바른 길로 나아가며,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면 축원을 합니다. 참으로 ‘어머니’ 다운
거룩한 축원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집에 와서 발생합니다. 절에서의 거룩한 축원과는 달리
남편이 실수를 하면 곧바로 바가지를 긁습니다.
“당신! 도대체 왜 그래요? 당신 때문에 못 살겠어.”
또, 아들딸이 그릇되면 잔소리가 끝이 없습니다.
“이놈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하는 짓이 그게 뭐야?”
‘나의 가장 사랑하는 가족’ 이라는 이름 아래 이렇게 짜증을 내고 잔소리를 하여서야
어찌 불보살님전에 참되이 축원을 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보면 내가 올린 축원은 남편과 자식을 위한 축원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을 위한 축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 절에서의 축원과 집에서의 행동이 다른 것은 바로 ‘나’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보다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 이 ‘나’가 들어 모든 것을 망쳐 놓습니다.남편을 망치고 자식을 망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절에서 하였듯이, 집에서 ‘나’ 에게 맞지 않는 일이
지금의 ‘나’ . 실로 지금의 ‘나’ 는 현생에 익힌 습기만으로 존재하지않습니다.
과거 전생의 수많은 생애, 수백 생 수천 생 동안 익힌 버릇이 함께 합니다.
개였을 때의 버릇, 돼지였을 때의 버릇, 양반이었을 때의 버릇, 왕족이었을 버릇 등
수백 생 수천 생의 용심(用心)이 똘똘 뭉쳐 지금의 ‘나’를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 는 징정한 ‘나’ 일 수가 없습니다.
다생다겁 동안 익혀온 버릇따라 움직이는 믿을 수 없는 ‘나’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나’를 믿고 사랑하고 끄달려 사는 동안에는
참된 도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도가 아니라, 자기애(自己愛)에만 더욱 깊이 빠질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에 대한 집착(我執)을 비우라“ 고 하셨습니다.
다생다겁의 버릇따라 움직이는
‘나를 비워버려야(我空)’ 참된 ‘나’ 가 발현된다고 하셨습니다.
가족을 위한 축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나’ 에게 맞추는 축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 에게 맞춘 축원.
‘나’ 의 욕심으로 축원을 하면, 가족이 ‘나’ 에게 맞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실망하고 화를 내고 멀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나’를 벗어버리고 축원을 하십시오.
‘나’를 비워버리고 진정한 축원, 한결같은 축원을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든 업장이 녹아내리면서,
‘나’ 와 가정과 주위에 평화와 환희가 깃들게 됩니다.
만약 ‘나’를 비운 축원을 할 수 없다면, 축원보다는 참회를 하십시오.
절에서나 집에서나 참회를 하십시오.
‘제가 지은 모든 죄업을 참회합니다.’
이헐게 참회를 하여 가슴 속에 얽히고 설킨 것들을 먼저 풀어보리십시오.
참회를 통하여 맺힌 것을 풀고 나면, 가족을 위해 일부러 축원을 하지 않아도
집안이 편안해지고 잘살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참회를 통하여
‘나’의 욕심이 떨어지고 ‘나’ 의 감정이 떨어진 다음 축원을 하면,
그 축원의 효력은 바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욕심이 빌버둥치는 모습으로 기도를 하거나 축원을 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백지로 돌리고 ‘나’를 비우는 실천이 앞서야 합니다.
‘나’를 비우는 아공(我空)!
이것이 금강경에서 일관되게 가르치는 핵심법문임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법집을 벗어나라
셋째는 ‘법집(法執)을 벗어나라’ 는 것입니다.
집착은 고통 낳고 깨달음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버려야 할 두 가지 큰 집착으로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꼽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아집이 ‘나’ 에 대한
집착이라면, 법집은 법에 대한 집착입니다.
‘법집’ 이라는 단어 속에는 우주만물에 대한 집착, 진리에 대한 집착,
내가 믿는 종교에 대한 집착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불자들이 쉽게 범하는 법집, 곧 계급의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 불자들 중에는 자기의 싱행생활을 자랑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나는 절에 다닌 지가 수십 년이 되었다.”
“낸가 다니는 절은 〇〇큰스님이 계신 〇〇사이다.”
“나는 〇〇큰스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들었으며, 글씨까지 받았다.”
“나는 금강경 · 원각경을 비롯하여 화엄경까지 모두 공부하였다.”
“나는 7일 동안 매일 3천 배를 하였다.”
“나는 기도를 하여 어떤 차원을 경험했다.”
이와같이 자기 신행의 경력이나 체험을 주위 사람듣에게 우쭐대며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자랑이 ‘나’의 향상과 공부를 방해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말하고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되새겨 보십시오. 자랑을 하며 내뱉는 ‘나는’ 이라는 말은 아집이요,
그 뒤를 있는 ‘~되었다’, ‘~하였다’, ‘~이다’ 는 말은 법집입니다.
특히 이와 같은 자랑 속에는 강한 계급의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절대 평등의 법계에서 법에 대해 차별을 두는 것입니다. ‘
나’ 와 ‘너’ 와는 다르다는 것이며, ‘나’ 의 법이 너희와는 한 차원 다른 경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공부를 망칩니다. ‘나’ 와 ‘너’를 넘어선 절대평등,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대우주 진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가장 완벽한 깨달음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는데, 자신의 경력이나 경험에 빠져버리고 자랑까지 하니,
어찌 도가 중장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계급의식은 재가불자들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님들에게서도 종종 보입니다,
“나는 스님이요, 너희는 재가불자다.‘
”나는 몇 년을 선방에서 정진했고, 어떠한 경지를 체험했으며,
현재의 직위는 무엇이다.“
어떠한 스님이 이러한 말씀을 즐겨하신다면, 그 분이 법집에 빠져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분과 경력과 체험을 자랑하며 우쭐되는 것 자체가 덜 익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불자들 중에는 주지임을 자랑하고 법사임을 자랑하고 신도회 간부임을 자랑하고
큰 불사를 하였음을 자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직책과 경력을 내생의 행복에 대한 자리매김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종교라하여 다를 바는 아닙니다. 오히려 더 심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집사 · 권사 · 장로 · 목사’ 라는 계급에 따라 저승길이 확정되고,
죽은 다음의 갈 자리가 다 해결된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계급의식을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가톨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신부님과 수녀님 중에는 참선을 열심히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스님들조차 놀랄 정도로 무섭게 정진을 합니다.
나는 그러한 신부와 수녀들에게 물었습니다.
“참선이 좋은 공부라 생각합니까?”
“예.”
“신부님과 수녀님들은 스스로가 좋다고 느끼고 닦는 참선을 신자들에게 권하고 있습니까?
신자들에게 참선을 시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어느 한 분도 “예” 라고 답하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좋다고 체험하였으면 두배로 권하여 함께 하는 것이 최상일텐데,
글들은 성직자인 자신들끼리만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신자들이 같은 공부를 하여 저희가 신자들 위에 서지 못하게 될까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면····.
평등·평등·평등! 불교나 기독교나 가톨릭이나 모두 평등을 주장합니다.
그런데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계급의식에 빠져있습니다. 법집에 빠져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된 종교인이요 참다운 불자라면 이러한 계급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계급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최소한 자신의 종교경력이나 신분을 자랑하고 우쭐거리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야만 법집에서 벗어나 향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간절히 당부하건대, 부디 순수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익히고 실천하십시오.
법집에 빠져있으면 부처님의 말씀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법집을 놓아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면 부처님의 말씀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으며,
나날이 깨달음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지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닌 나!
그러한 ‘나’ 가, 듣고 배우고 체험하여 얻게 된 조그마한 ‘나’의 법에 집착하여
가장 높고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을 가로막아서야 되겠습니까?
묵묵히 법집을 버리고 법공(法空)을 이루어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라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잘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대우주에 가득한 행복과 용심법
넷째는 금강경의 용심법(用心法)입니다.
우리 부처님의 뜻은 일체중생 모두가 부처되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집과 법집을 놓아 아공과 법공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면,
‘내가 어떻게’ 라고 하는 불자들이 많습니다.
나아가 ‘나를 비우고, 욕심을 비우고 어떻게 살까’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법계의 원리에서 보면 조금도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우주에 무한한 행복과 영광이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이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대우주에 무한한 행복과 영관이 가득한데 왜 우리는 잘 살지를 못하는 것인가?”
바로 욕심 때문입니다.
탐욕이 가득하고 번뇌망상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또 질문을 할 것입니다.
“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는가?
보이면 확신을 하여 번뇌망상도 부리지 않고 욕심도 없이 살 것인데····.”
역시 대답2은 같습니다. 탐욕과 탐욕에서 파생된 번뇌망상 때문에 보지를 못합니다.
‘나’ 의 욕심이 대우주에 가득한 영광과 행복을 차단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하루하루를
‘돈. 돈. 돈.’ ‘출세. 출세. 출세’.‘행복. 행복. 행복’을 갈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생을 허비합니다.
그런데 수십 년을 살아보고 난 지금, 어떻습니까?
지금의 돈과 출세와 행복에 만족하십니까?
대부분은 아닐 것입니다.
아직도 부족하고, 아직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부유하고 떳떳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욕심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눈앞을 가리고 있는 욕심을 벗겨버려야 합니다.
놓아버리고 벗겨보십시오. 우주에 가득차 있는 영광과 행복이 저절로 찾아듭니다.
☆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가운데 한 분인
미수(眉戍) 허목(許穆, 1595~1682)선생은 조선시대 역사상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삼공(三公: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까지 오른 매우 뛰어난 분입니다.
이 미수선생에게는 매우 가난하게 사는 누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욕심이 많았던 누님은 높은 벼슬을 하고 있는 미수선생에게 자주 찾아와 셍떼를 썼습니다.
“너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잘하면서, 불쌍한 생질에게는 어찌 그리도 무심하냐?
높은 벼슬을 하고 있을 때 말단 관직이라도 하나 주든지, 장사라도 할 수 있도록 한밑천 잡아주면 오죽 좋으냐?”
누님의 거듭되는 불평과 원망에 못 이겨 미수선생은 나이 마흔이 갓 넘은 생질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생직을 자갈이 수북하게 깔려 있는 한강 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자갈들 중에서 하나를 네 마음대로 집어라.”
어진 미수선생의 눈에는 한강 변에 깔려있는 자갈들이 모두 금덩어리로 보였지만
중생심, 욕심이 눈앞을 가리고 있는 생질의 눈에는 한낱 자갈돌에 불과했습니다
‘지체높은 외삼촌이 모처럼 부르기에 벼슬을 줄까 돈을 줋까 크게 기대하였더니 흔해
빠진 자갈돌이야?’
속으로는 울화통이 터졌지만, 외삼촌의 명이라 감히 거역할 수도 없고 하여
손에 넣으면 꼭 잡힐 만한 크기의 돌을 하나 주웠습니다.
“그만한 거면 되겠느냐?”
“흔해 빠진 자갈돌! 이것으로 무엇을 할라고요?”
생질은 잔뜩 부어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모레가 남대문 시장 장날이지. 시장에 가지고 나가 앉아 있으면 사러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흥, 어느 미친놈이 돌을 사러와.’
생질은 내키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대로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갔습니다.
자갈돌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지만 한낮이 되도록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생질의 불만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그런데 오후 2시쯤 되지, 점잖은 노인 한 분이 지나가다가
그 돌을 보고 흠칫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우 공손하게 물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팔거요.”
“얼마를 받으려 하십니까?”
“알아서 주시오.”
대화를 해보고 노인은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값어치도 모르고 물건을 파는 놈! 하지만 이것을 팔도록
한 분에 대한 대접은 해야 하리라.’
“수고스럽겠지만 이것을 들고 나를 따라오십시오.”
노인은 잠시 걸어 이조참관의 집으로 들어가더니,
하인을 시켜 돈 3백냥을 가지고 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인에게 지시했습니다.
“무거울테니 이 어른댁까지 갖다 드려라.”
‘하, 조그만한 돌 하나가 3백 냥이라니! 이제 나도 떼부자가 될 수 있다.
외삼촌과 같이 갔던 한강 변의 자갈돌을 몽땅 팔아야지.“
미수선생의 생질은 다시 한강 변으로 달려가 큼지막한 돌 하나를 주워 다시 시장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몇 달이 지나도 묻기는커녕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약간은 허황한 듯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미수선생처럼 눈을 뜨면 대우주의 무한한 영광과 행복이 나에게로 다가옵니다.
반대로 우리 중생들은 크게 열려 있는 대우주의 무한한 영광과 행복을
’나‘ 의 욕심과 감정으로 거절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돈. 돈. 돈, 출세. 출세. 출세, 행복. 행복. 행복‘을 노래하며
욕심을 더욱 부채질합니다.빚을 갚는 자세로 살기보다는 ’나‘ 라고 하는 고약한 욕심을
더욱 키우며 살기 때문에, 우주의 무한한 영광과 행복이 멀리멀리 달아나버리는 것입니다.
부디 욕심의 눈을 씻고 눈을 똑바로 뜨십시오.
내 가슴에 얽힌 ’나‘ 와 ’남‘ 의 벽을 무너뜨리고 주위의 분들을 돌아보십시오.
그분들이 ’나‘ 에게 얼마나 고맙게 해주는가를 분명히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들을 향해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하면서 보답하는 자세로 살아가십시오.
이렇게 살면 우리의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나‘ 의 마음이 편안해지면 집안도 편안해지고,
무한한 행복과 영광이 저절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가르치는 마음쓰는 법(用心法)입니다.
온 세상 중생을 모두 포섭하고도 남을 만큼 넓게 마음을 쓰면,
지나간 시간의 뱆덩어리가 풀어지고, 지나간 시간의 고약한 인연줄이 모두 끊어지면서,
지금부터의 앞날이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하게 펼쳐집니다.
이제까지 이야기한 네 가지 사항을 잘 명심하여
다함께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불자가 되기를 축원드리면서,
경의 제목 풀이로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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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