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즘이 필요한 때
종교와 도덕에서 독립된 정치세계 발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君主論)>(1532)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의 원전’처럼 여겨진다. 때로 어울리는 말이다. 때문에 도덕적 입장에서 보면 마키아벨리를 ‘악마의 대변자’로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나폴레옹과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 책을 악마의 책으로 비판하면서도 최고지도자로서 마키아벨리 정책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던 것처럼, 마키아벨리즘엔 정치의 현실을 정확히 꿰뚫는 내용이 담겨 있다.
종교와 도덕의 세계에서 독립된, 정치의 세계를 발견한 점이야말로 마키아벨리가 근대 정치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되는 이유다. 그러나 양식 면에선 오히려 전통적인 정치론의 양식을 답습하고 있다. 즉 낡은 부대에 새로운 술을 담았다는 사실이 <군주론>을 흥미롭게 만드는 점이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군주국 종류, 군주권 획득 및 유지방법, 군사론, 군대 필요성, 통치기술 등을 논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현실에 충실해야’ 할 필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란 명제로 인해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을 오인하면, 이는 자신을 보존하는 게 아니라 파멸에 이른다.” 당시 이탈리아 휴머니즘의 이상은 ‘공공의 선 실현’을 목표로 한 자유로운 공민(公民)의 공동체였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이는 헛된 이상에 불과하다. 공동체의 해체과정에서 공적에서 사적으로 후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이란 원래 은혜를 잊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위선적이고 제 한 몸의 위험만을 피하려 하며, 물욕에 눈먼 존재다.”라고 말한다. 즉 그는 인간의 본성을 끊임없이 지상의 욕망 충족을 추구하는 르네상스적 인간상 속에서 찾았다. 다른 말로, 인간의 행동 원리는 그것이 명예욕이든 물욕이든 욕망이란 동질적인 것으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도 인간을 움직이게 한다.
가혹행위는 한 번에, 은혜는 조금씩 자주
이는 ‘인간의 행동을 계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것이며, 인간의 행동을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즉 ‘정치가 군주의 통치기술’이라 일컫는 이유다. 가령 “사랑받기보다 겁먹게 하라.” 혹은 “가혹행위[개혁행위]는 한 번에, 그리고 은혜는 조금씩 자주 베풀어라.”와 같은 통치술은 고전(古典)이 될 만큼 명언이 됐다. 특히 사랑보다 겁먹게 하는 게 효과적이란 주장은 설득력을 배가시킨다.
마키아벨리는 ‘탐욕과 야심이 판을 치는 현실’을 극복하려 했다. 따라서 수미일관(首尾一貫)하기 위해선 냉정한 합리성이 요구된다. 그는 “군주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여우’와 ‘사자’의 기질을 모방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자는 함정에 빠지기 쉽고, 여우는 늑대를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함정을 알아채기 위해선 여우가 되어야 하고, 늑대를 혼내 주려면 사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선 종교의 권위나 도덕에 의한 정당성 따위는 필요 없다. 힘과 합리성을 겸비한 군주의 인위면 족하다. 즉 목적과 수단이 하나의 통일된 계열을 이루고 있다고 냉정히 파악하는 일과 목적에 가장 적합한 수단을 개의치 않고 선택하는 역량이야말로 국가를 일관성 있게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라 마키아벨리는 주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는 부르크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인위에 의한 예술품인 것이다.
이처럼 국가관은 르네상스적 인간상의 어두운 측면으로부터 밝은 측면으로의 역전, 곧 인간의 근원적 힘의 논리에 의해 지탱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키아벨리의 국가관은 절대주의적인 권력국가를 거쳐 이룩되는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을 훨씬 앞서서 예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는 근본적 힘을 군주가 아닌 관료나 시민사회로 승인되면, 이것이 바로 근대 사회계약설(社會契約說)로 이어진다.
비르투는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에너지
인위(人爲)의 근원적 힘을 비르투(virtu)라 한다. 라틴어의 비르투스(virtus)에서 유래한 이탈리아어로, 본래는 윤리적인 덕(德)을 뜻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비르투는 전통적 의미의 덕이 아니다. 여기서 ‘덕의 의미가 전환’된다. 전통적 의미의 윤리적인 덕은 이성에 의한 정념과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달성되는 데 비해, 그의 비르투는 정념과 욕망이 방해받지 않고 나타나는, 그 자체를 의미한다. 즉 ‘운명과 대비’된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위기적 상황을 가져온 원인을 추적하면서, 한편 그것을 운명에서 찾는 일종의 체념에 대해 강하게 반박했다. 그는 “운명이 우리 행위의 절반을 좌우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도 나머지 절반의 동향은 우리 인간에게 맡겨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아무리 좋은 기회’라도 팔짱을 끼고 있는 동안엔 운명의 여신(女神)이 베풀어 주는 은혜가 일어나지 않는다.
‘좋은 기회’란 그것을 적절한 때에 맞추어 포착해 낸 다음, 손으로 거머쥘 때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마키아벨리는 운명에 대처하는 데 신중함보다는 오히려 과격할 것을 권한다. 즉 ‘운명의 신은 여신’이어서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때론 때려눕히기도 하고 밀어 쓰러뜨리기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운명은 냉정하게 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이처럼 과격한 사람들에게 승리를 안겨 주기 때문이다.
가령 운명은 여자를 닮아 젊은이의 편이다. 왜냐하면 젊은이는 신중하게 일을 진행하지 않고, 민첩하고 신속하며 극히 대담하게 여자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능동적 비르투를 강조하는 데는 자유의지론이 바탕에 깔려있다. 비르투는 이른바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에너지인 셈이다. 마키아벨리는 ‘현실 속에서 자유의지의 실현을 국가통일’로 보고, 이 현실적 국가통일을 <군주론>이란 책을 통해 주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