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통신 9보>- 중간고사
벌써 두 달이 흘러 버렸다.
중국어 수업 진도에서 이루어 놓은 것도 없는데 벌써 중간고사를 마쳤다.
말하는 것도 안 되고, 듣는 것도 안 되고, 어법도 잘 모르고, 단지 아는 것은 한자밖에 없는데 중간평가를 한다며 지난주에 시험을 쳤다.
여기에서 중국어 어학연수 중인 우리나라 학생 중에 얼마 전 교환학생으로 프랑스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온 한 여학생이 있다.
그 여학생은 세상에서 제일로 하기 싫은 게 시험 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난번 프랑스 어학연수 기간에는 시험을 치기 싫어서 일부러 시험시간에 출석하지 않고 놀러 가 버렸다고 했다.
그 얘기를 하면서 이번에도 놀러나 가 버릴까 하고 내게 농담을 건네 왔던 것이다.
하기야 며칠 전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에겐 1년에 네 번 있는, 반드시 겪어야 할 지옥의 시험기간이다’ 라고 냉소적인 멘트를 날리기도 했더라마는.
나도 지금껏 살면서 인생에서 제일 싫은 것 중의 하나가 시험 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고등학교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얼마나 많은 시험을 쳤던지 질렸기 때문이다.
옛날에 대학원 석사과정 들어갈 때 대학원 들어가면 다시는 시험을 치지 않겠지 싶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대학원 선배들은 학생 수가 얼마 안 되는 관계로 수업도 잘 안 하고, 따라서 시험도 안 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내가 대학원에 들어가니까 학생 수가 많아지면서 수업은 수업대로 다 하고 시험은 시험대로 다 치고 있었다.
그것도 학부생처럼 말이다.
더 심한 것은 대학원 박사과정 들어갔을 때였다.
박사과정은 정말 수업도 안 하고 시험도 없는 줄 알았다.
물론 선배들이 또 그랬으니까.
그런데 이게 또 웬걸.
내가 박사과정에 들어가니까 수업과 시험을 석사과정과 마찬가지로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힘든 과정이었다.
그래서 인생에서 시험 없이 살아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 출신 우리 반 신임 반장 린메이란과 대화 연습한 것을 앞에서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뭐람?
나이 50을 얼마 안 남긴 이 나이에 또 시험이라니······.
그것도 딸, 아들과 같은 어린 학생들과 경쟁하는 그런 시험을 말이다.
지난주에 대구은행 대은연구소 부소장으로 근무하는 황병우 박사가 잠시 다녀갔다.
그때 일부러 우리 부부한테 저녁을 사 주면서, 본인의 중국 상하이 어학연수 경험을 얘기하다가, 시험 얘기가 나오니까 나한테 신신당부를 한 적이 있다.
“선배님, 혹시 중간고사 준비하고 있는 것 아니죠? 제발 그런 것 하지 마세요. 젊은 사람들 기죽이지 말고 대충 넘어 가세요. 선배님 성격에 또 1등 하려고 너무 열심히 하면 젊은 학생들이 싫어합니다. 아시겠죠?”
내가 생각해도 그렇기는 하다.
이 시험 결과는 어디 써 먹을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수료증 발급에 참고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어디 입학원서 내는 데 필요한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나에겐 정말 아무 쓸모도 없는 시험이니 말이다.
단지 시험이니까 그저 시험공부 하는 것뿐이니까.
그런데 참 묘한 것이 일단 시험 친다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자꾸 책을 보게 되었다.
선생님과 나와의 관계가 생각났다.
우리 반 학생들과 나와의 관계가 생각났다.
그리고 나의 자존심이 자꾸 생각났다.
우리 반 학생들과 선생님은 우리 부부가 중국어 공부를 제일 잘 하는 줄 알고 있다.
그간 수업 시간에 참여하는 열성이나, 평소 발표 실력이나, 또 한자 실력 등 모든 면에서 항상 모범을 보여 왔으니까.
그런데 이제 슬슬 겁이 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다 막상 시험 결과가 나왔을 때 1등이 아니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나한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듣기 문제였다.
나는 아무리 들어도 'ㅊ'과 관련되는 발음인 'q, c, ch', 'ㅅ'과 관련된 발음인 'x, s, sh', 그리고 'ㅈ'과 관련된 발음인 'j, z, zh'을 구분할 수가 없었고, 'r'과 'l'도 구분 못했다.
이것뿐만 아니었다.
모음에서도 'ang, eng, ong'은 물론이거니와, 성조로 넘어가면 2성과 3성도 거의 분별을 못 했다.
그러니 듣기 시험이 제일 두렵고 그 결과가 겁이 났던 것이다.
(내 명함을 들고 앞에 나가서 자기소개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 어려워, 어려워. 말이 안 돼...)
아니나 다를까.
이번 첫째 시간인 듣기 시험에서 'leng'과 'long'을 구분 못 해서 틀렸고, 'zao'와 'zhao'도 분별 못 해서 오답을 적어 버렸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테이프 녹음 소리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젊은 학생들은 우리 부부가 제일 잘 하는 줄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이틀간에 걸친 시험 기간이 끝나고 그 다음날 수업시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은 시험결과를 불러 주었다.
선생님은 맨 처음 내 이름을 불렀고 나와 학생들의 귀와 눈은 선생님의 입만 쳐다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진쯔쉬(김지욱의 중국식 발음), 50점 만점에 43점! 헝하오!(아주 잘 했어요)"
"와아,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처음으로 내 점수를 발표하는 순간 여기저기에서 역시 진쯔쉬는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박수와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다음 학생부터 점수를 불러 주면서 이런 분위기는 민망한 상태로 변하고 말았다.
대부분이 42점에서 44점 - 벗씨는 42점 - 을 받았고, 그 중에서 일본에서 온 예쁘장한 여학생은 49점까지 받아 1등을 하고 말았다.
심지어 듣기, 발음, 읽기, 쓰기 등 모든 면에서 제일 못하는 것으로 소문나 있는 영국 남학생마저 42점을 받아 우쭐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실전에 강해야 하는데 이건 뭐 소문만 무성했지 점수를 까발리고 보니 난 부끄럽기 한이 없었다.
나머지 점수도 불러 줬는데 난 쓰기 점수가 100점 만점에 94점 - 벗씨도 94점 - 으로 4명이 공동 1등, 말하기 시험이 50점 만점에 48점 - 벗씨는 49점으로 공동 1등 - 으로 중상 정도였다.
이 세 과목 결과를 종합해 보면 나의 전체 실력은 중상 정도로 판명되었다.
그런데도 우리 반 학생들은 모두가 나한테로 몰려와서 내 점수가 어떻게 되었냐고 자기 점수와 비교들을 하고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을 소냐?
(시험 문제는 초등학교 1학년 수준보다 못 한데... 이 나이에, 이거 원, 부끄러워서리...)
이제 중간고사는 끝났다.
책 세 권 중에서 두 권의 진도가 다 나갔다.
지금까지 알게 된 단어는 고작 300개 정도.
나머지 책 한 권에 또 300개의 새 단어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난 이미 나머지 책의 진도를 다 나갔다.
그래서 알고 있는 단어는 600개 정도가 된다.
하지만 이번 중간고사 결과도 그렇고, 실제 이곳 생활에서도 그렇지만 600여 개의 단어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나는 생활하면서 필요한 것에 대해 간단한 질문은 할 수 있지만 아직 듣지를 못 한다.
그러니 600여 개의 단어를 알아봐야 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황 박사의 얘기가 생각난다.
황 박사는 대구은행에서 시행한 중국어 시험을 제일 잘 본 덕에, 선발되어서 여기 상하이로 어학연수를 오게 되었는데, 막상 현장에 와 보니 말이 안 통해서 몇 달간 헤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보탠 말 중에서, 중간고사에서 본인은 반에서 필기시험은 1등을 했지만 듣기시험은 꼴찌를 하는 바람에, 담임선생님이 신기하게 생각하더란 말이 생각난다.
나도 여기에서 쓰기와 말하기는 좀 되는 것 같지만, 듣기가 꼴찌 수준이니 사람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황 박사가 시험에 대해 강조한 말을 되새기면서 이번에 내 중간고사 성적이 안 좋은 것에 대해 위로로 삼으려 한다.
"선배님, 어린 학생들과 경쟁하면서 1등 하려고 하지 말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밥과 술이나 자주 사 주도록 하세요."
2010년 5월 3일
상하이에서 멋진욱 서
첫댓글 하하하, 김지욱. 장윤자 단우님, 축하드립니다. 점수 엄청 잘나왔는데요. 단우님 글보면 우리 아그들 소식과 너무 흡사해서 항상 많이 놀라워요. 어학연수는 어디든 다 비슷한가봐요. 화이팅 하세요.
중국어를 빨리 배워야 영어도 배워 볼 텐데요. 진도가 안 나갑니다. 히히.
시험이라고 하면 무슨시험이든 신경이 쓰이지요, 김지욱학생 잠 잘했어요.
하하하, 언제나 채점만 하시니까 부담이 없으시죠? 시험 치는 학생은 죽을 맛입니다. 히히.
ㅅ.ㅅ ㅎㅎㅎ 단우님~ 그래도 단시간에 어려운중국어를 ^^ 전 대단하게 보이는데요~ㅎㅎㅎ 늘 열심히 배우시는 자세 보기 좋아 보여요~ *.* 홧팅하세용~
무슨 일이든 권 단장만큼만 하면 문제 없을 텐데요. 따라하고 싶어요. 히히.
얼굴 본지 너무 오래되어 섭섭 했는데,사진의 웃는모습 예전 그대로네요!상하이 통신이 없었다면 잊어버릴 뻔 했슴다요.두분모두 건강 하시고요, 대단하십니다.
그 예쁘신 얼굴 잘 간직하세요. 3년 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히히.
듣기 점수가 낮은 이유는 아마도 나이 탓이 아닐까요. 이제는 한국말도 빠른 말은 잘 안듣긴답니다. 3년 후에 볼 수 있다니 섭섭하군요. 건강하세요.
아, 그렇습니까? 나이 먹는 것이 이제 슬슬 겁이 납니다. 1년 있으면 우리 나이로 50인디요. 제겐 듣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히히.
두 학생 잘 했에요.
이제는 시험 치기 싫어용. 히히.
에공... 그것도 시험이라고 신경쓰이더구만요. 기말시험은 안치고 도망갈까 싶어요.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