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흥장군 에 관한 요약글
정묘독전 살신위국 민족자존 애국충절, 숭고한 충의 청렴정신이 살아 숨쉬는 조선시대 역사의 성지 충장사
당진군 대호지면 도이리 소재 남이흥장군 유적지 경내의 모충관의 유물들. 누대 여러정승,여러 국왕, 명국의 황제 까지도 그나라 국민들에게 남이흥장군의 충절을 귀감토록 하는 특전을 했다는 충장공 남이흥 장군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슴을 바친 역사적 행적을 살펴봄으로서 그 분의 민족자존 숭고한 애국 충절의 정신 공직의 청렴한 정신을 높이 선양하고 교육적 가치로 귀감 하고 전국적으로 선양하고자 하는 간절한 생각에 글을 쓰다.
정묘독전. 살신위국 애국정신. 청렴한 공직자 정신
역사적으로 조선시대에 는 많은 외침과 내란이 있었으나 국권이 흔들려 왕(王)이 도성(都城:대궐)을 비운 것이 네 번 있었으니 임진왜란, 정묘호란(胡亂), 이괄의 란(亂) 병자호란. 이 있었습니다. 의천부원군 남유장군 과 아드님 충장공 남이흥장군 부자 분께서 이중 삼난을 모두 감당 하였다.
의천부원군 남유(1552-1598)장군은 임진왜란시 나주목사와 좌영장을 겸직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다 전사 하였다.
사후(死後) 조정에서는 병조참의 증직, 선무원종공신 병조판서 가증, 좌의정에 추증하고 의천부원군에 봉(封)했다.
-남이흥(1576-1627)장군은 조선시대 무장(武將)으로 본관은 의령, 자는 사호, 호는 성은, 시호는 충장이다.
각 현감, 군수, 부사, 목사를 두루 거처서 1614년 종이품 포도대장, 1622년 자헌대부 정이품, 1624년 중군 대장으로 이괄의 난을 평정했다. 그 당시 사천명의 적은 관군:(정부군)으로 일만 이천명의 반란군을 진압 평정하여 갈성분위 출기효력 진무일등공신*(특출하게 용맹을 떨쳤다는 뜻) 숭록대부 종일품 의춘군에 봉하였다.
1627년 삼도부원수 겸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계실 때 삼만육천 대군의 호군(胡軍=청군, 여진족)이 침공하는 정묘호란의 마지막 전장이었던 안주성 싸움에서 삼천 여의 군사를 이끌고 혼신을 다하여 독전분투 하였지만 애당초 중과부적인 것으로 성안 화약고 있는 쪽으로 적을 유인 화약고에 점화 수많은 적과 함께 자분 자폭으로 최후를 마치셨다. 그날이 정묘 1627년 1월 21일이다. 우리나라 전란사 에 야전총지휘관인 원수로서 살신보국(殺身輔國)함은 보기 드문 충절이라 하겠다.
∎. 인조임금은 국장으로 장례토록 명하고 장례시 눈물을 흘리며 어의를 친히 벗어 관(棺)에 덮어주고 그의 충절을 애도하였다. *곤룡포=임금의 어의(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유물관에 소장됨)
∎. 당시 우호국인 명나라 황제도 남이흥장군의 애국충절을 그 나라(중국) 국민들에게 귀감 하도록 하는 특전을 열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좌의정 정일품에 증직하고 의춘 부원군에 봉했다.
∎.충장 의 시호와 충신정여 가 내려졌다. (충장사 경내 소재)
∎.불천위 사당 (충장사)로 봉안하여 대대손손장군의 충절을 기리며 후손들이 무궁하게 제사로 지내도록 왕 명으로 하였다.
∎.평안도 안주에 사당을 짓고 충민사(忠愍祠)라 사액(賜額)하였고 .삼천여 충혼넋을 대신하여 충민사 상 건물 주벽에 평안병사 남이흥을 뫼시고 좌측건물 우측건물 (동무.서무)에 평안우후 박명룡, 안주목사 김준, 강계부사 이상안, 구성부사 전상의, 군수 현감 등 16인을 배향 하였다.
∎.제례시 초헌(初獻)관은 임금의 명을 받은 대신이, 아헌(亞獻)관은 평안감사. 또는 평안병사가. 종헌(終獻)관은 평안우후가. 참여인 평안도 안주 시민, 문중후손 이 참여 했으며, 제기. 제례비품 등 모두 관에서 비축했고 매년 순국일 1월 21일 거행 했다.
∎,대원군 집권시 600백여개 국내 서원 철패 령 이 있었으나 충민사는 보전토록 명 했다.
∎. 삼팔선이 갈라져 문헌에서만 볼 수 있었던 평안남도 안주에 있는 충민사를 조사한 결과 충민사 전체가 원형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충민사 경내에 있는 충민사 비문도 원형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영중추부사 남구만 근찬하고, 영의정 최석정 전서를 하고, 이조판서 조상우 근서, 한 충민사비와 충민사가 북한 국가지정문화재 740호 로 지정되어져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통일부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황해도 연안에 사패지도 많이 하사되었으며 연안 시민들은 남이흥장군의 영정 이름을 해놓고 그곳에서 국태민안, 시화연풍을 기원했다 한다. 그곳을 북신사라 하였으며「북신사」에 대한 사록은 좌의정 허 묵(許黙)이 쓴 남이흥장군 신도비에 기록되어있다.
∎.장군은 30년 동안 칠패군부(七佩郡府) 三指閫철)=(주,현(州,縣)을 7번 거쳤고, 곤철(곤철:대장)을 세 번)하였으나 집한칸 영위한 일이 없고 손바닥 만한 땅 한평 산 일이 없었다. 파직되면 교거(僑居:세내 에 사는 것)을 하였다.
∎..사패절목=임금이 양대충신에게 하사한 당진군 정미면 일원과 대호지면 전체, 황해도 연안 등을 왕명으로 분급된 토지문서 약 4천여만평, 사패절목은 모충관 에 소장되어 있음.
∎.장군은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가 고을마다 섰으며 그중 구성(龜城)에는 미만일삭은중백년(未滿一朔恩重百年:한 달이 안 되었어도 그 은혜는 백년 신세짐보다 중하다)는 비(碑).가 섰다
∎. 공은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 공과 교분이 두터웠었다. (북천록 에서)
∎.장군의 어머니 유(柳)씨 부인은 그의 죽음을 듣고 「30년 사이에 부자가 모두 나라를 위해 죽었도다, 두사람의 죽음은 나라를 위한 죽음이라 영광된 것이라 무슨 한이 있으랴만 전몰병사와 미망인과 그 자식들이 잿더미 속에 울게 됨이 한스럽다」고 충신의 아내와 충신의 어머니 다운 훌륭한 말씀을 하셨다.
∎.진주목사 재직시 진주에 있는 촉석루를 현재상태로 남이흥 장군이 중건 하였다.
∎.국방부 교재용으로 쓰고 있는 동국전란사(외란.외란편),,정묘 병자 호란사. 남이흥장군 유사록은 우리나라 조선시대 한 페이지의 실록인 동시에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많은 교육을 주는 교과서이기도 하다.
금전만능 이기주의가 만연되어 가는 현실생활 속에서 잠시 더듬어본 장군의 충절과 청렴한 공직 생활상에 대한 장군의 행장(行狀)내역은 살펴보면 볼수록 깊이 있는 교육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우리국민 우리군민 모두는 우리의 고장에 이러한 훌륭한 인물이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한 씨족과 문중의 개념을 넘어 그의 살신 호국 충절과 청렴을 귀감 삼고 선양하여야 되겠다. 또한 교과서에 등재토록 모든 힘을 쓰고 최선의 노력을 해야겠다.
홈페이지 안내:www,chungjanggo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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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흥장군 문화제 학술연구 자문위원회
첫댓글 겨레의 정신으로 떨쳤던 불멸의 빛으로 환하게 느껴집니다.
호국의 얼을 널리 선양 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