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시대가 남긴 사회개혁 교훈(3)
<청와대 출입기자의 비망록>
새마을 운동은 국민의식 개혁,국민교육헌장은 국적있는 교육 지향
김 길 홍(언론인.한국미디어 서비스 회장)
박 대통령의 교육정책 기조 전통유교의 윤리와 도덕
박정희 대통령은 일제 때 교사양성 교육기관인 대구사범학교 출신이다. 당시 경북과 경남지방에서 가난하고 머리 좋은 시골 출신의 수재들이 나라 빼앗긴 2세의 교육에 헌신하고 어려운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대구사범에 많이 진학했다.
한국인 교사들도 한두명 있었지만 대부분 일본인교사였다. 5년제 대구사범 심상과를 졸업한 스무살의 청년 박정희는 37년 4월 문경보통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았다. 당시 벼슬하지 않은 영남지역 혁신유림(革新儒林)의 후손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거나 시대에 앞선 신학문과 신문명을 배워 개화(開化)와 자생(自生)의 길을 앞장서 개척했다.
청년교사 박정희는 이같은 시대조류에 고민하면서 지냈으나 출생의 근본이 선비가문이었던 까닭에 인의예지신(仁義괋智信)의 덕목을 가르쳤으며, 학과교육과 더불어 가르치는 질서와 절제와 배려의 인성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실제로 나라 잃은 설움과 배고픈 고통을 체험하면서 성장한 육군소장 박정희는 국가개조를 꿈꾸었으며 대통령이 되어서도 젊을 때부터 품어온 자주독립과 번영 조국의 숙원을 풀어보려고 노심초사 했을 것이다.
일제의 고등교육을 받은 박 대통령의 이념과 사상은 자주독립과 민족중흥의 실현으로 집약된다.
국민의 의식과 정신을 바로 세우고 개혁하지 않는 한 국가의 번영과 민족자주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그의 신념과 소신이었다. 민족과 국가의 미래와 직결되는 국민의 의식과 정신을 시대에 맞게 계발(啓發)하고 개조하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학교교육과 가정교육이 효과적이라는 경험을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통해 터득했다.
박 대통령은 60년대 초반 5.16 거사후의 혁명내각과 제3공화국 대통령 때부터 국민의식의 개혁과 국적있는 교육을 강조했다.
기아선상의 민생고와 남침위협의 안보위기를 해결하는 경제개발의 최우선 정책을 밀고가면서도 용공 배격, 근검절약, 근면정신 등의 실천을 촉구하는 재건국민운동을 벌였으며 68년 우리 교육의 이념과 목표를 제시한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했다.
박 대통령의 집권초기 구상했던 재건국민운동은 시간이 흐른 다음 69년 농어촌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주도했던 새마을운동으로 발전했다. 국민정신혁명의 시발과 계기를 조성한 것이다. 또한 경제발전의 성과와 국민소득의 배가로 인해 물질만능 풍조와 퇴폐사상이 사회전반에 영향을 주던 68년에는 국민교육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는 교육헌장을 발표했다. 헌장내용을 전국의 각급학교와 학생들에게 반복 교육시키고 교육과정의 이행과 실천에 포함시키는 특단의 행정조치를 지시했다.
또 한편으로 박 대통령시대에 불을 붙인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운동은 범국민 정신혁명운동 차원으로 옮겨갔다. 가난과 체념에 지친 농민들에게 “잘 살수 있다”“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불어넣으면서 잘살기운동으로 번져 갔고 물질적 풍요와 의식개혁의 양면을 겨냥한 사회운동을 지향했다.
새마을운동은 잘살기운동 정신혁명운동 동시 추구
새마을운동은 69년 8월 경북 청도읍 신도 마을의 잘 살기운동에서 비롯됐다. 주민들이 총동원돼서 태풍으로 폐허가 된 신도마을의 하천, 제방, 초가집, 마을안길 등을 복구하는 현장을 시찰한 박 대통령이 아이디어를 얻었다.
농민들의 자조, 협동 정신을 일깨워야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새마을운동을 창안했다.
70년 4월 한해대책회의에서 조국근대화의 초석이 되는 새마을운동을 정식으로 제창하고 전국의 새마을 지도자 1000여명에게 신도마을 견학시켜 전국적인 확산에 박차를 가했다.
운동 개시 2년 후인 71년 6월 박 대통령은 경제기획원에서 매월 개최되는 월례경제동향 보고회의에서 새마을 성공사례를 당사자들로부터 직접 브리핑 받고 우수 새마을 남녀지도자를 표창했다.
그 후 매년 전국 도청소재지를 순회하면서 수천명의 도농 지도자가 참석하는 새마을지도자 대회와 새마을 경진대회를 열어 우수 사례와 성공 체험담을 발표하게 했다. 동시에 박 대통령은 대통령비서실에 새마을 정책과 사업을 전담하는 비서관을 임명해 새마을 운동의 점검과 지도를 직접 독려했다.
유명한 농촌운동가이며 사회학자인 건국대 농대 교수 류태영 박사를 초대 새마을 비서관으로 위촉해 초기 새마을운동의 실천이론과 연구체제를 정리했다. 그 다음 내무부출신의 정종택, 김종호, 김태호씨 등 정통 엘리트관료들을 연이어 기용했다. 그들은 박 대통령 사후에도 역대정권에서 농수산장관, 내무장관을 역임하면서 새마을운동을 계속 추진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라는 새마을노래를 스스로 작사 작곡할 정도로 새마을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그 후 10년 사이에 새마을운동은 농촌과 도시의 소득증대, 주택정비, 의식개혁, 질서확립 등의 사회운동으로 본격적으로 정착됐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어서 성과를 거두었다. 새마을운동은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을 지키는 학교와 국민의 예절 및 도덕교육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소득증대와 경제발전에 따른 국민의식의 변화와 시대조류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갖고 있는 특유의 정신과 전통을 오랫동안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가려는 나름대로의 계획과 구상을 다듬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72년 5월 근면, 자조, 협동을 새마을운동의 행동강령으로 제시했다. 5천년 가난을 극복하고 잘살아 보려면 우선 부지런하게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일깨웠다.
반상(班常)이 엄격하게 구분된 옛날에는 양반은 놀고 먹고, 가난한 상놈은 일해도 굶는 과거의 고정관념을 없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의 정신은 농민들이 잘살아 보겠다는 의지와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는 자조·자립의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서로 돕고 도움 받는 협동의 새마을 사업은 여럿이 힘을 합쳐 함께 하는 것이 힘 덜들이고 성과를 높이는 지름길이라고 계도했다. 70년 초부터 본격화된 이같은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목표는 박 대통령이 내건 조국근대화과 민족중흥의 달성을 앞당기는 통치철학을 대신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은 당시 사회일각에서 발생했던 퇴폐풍조와 사회불안을 조장하는 무질서를 추방하는 행정조치와 사회개혁운동에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후 76년 서정쇄신(庶政刷新)을 단행하면서 공직기강의 확립과 부정부패의 척결로 이어져 공무원과 민간의 부조리를 추방하고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는데도 기여했다. 또 박 대통령은 77년 새마을운동과 함께 범국민 자연보호운동을 시작하여 산림녹화, 환경보호, 국토청결의 부수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천성이 깨끗하고 단아하며 정리정돈과 규격적인 것을 좋아했다.
제일 먼저 새마을 사업으로 농촌의 초가지붕을 개량하고 마을안길을 정비한 것이라든지 도시의 교통 등 기초질서 지키기, 청년들의 장발단속, 통행금지 등 치안저해사범의 위반단속을 재임기간 중 상시 추진했다. 이와함께 일반적인 사회규범과 통상적사회질서를 국민들이 준수하는 행정조치와 캠페인 등을 지시하고 유도했다.
박 대통령은 당시 국정의 최우선 과제를 새마을 운동으로 정했다. 고위공직자를 비롯한 사회지도층 인사와 전 행정부처 공무원, 기업인 심지어는 고위직 관료부인과 영부인 육영수여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청와대 비서관 및 대통령가족에게 까지 새마을교육을 실시했다. 새마을운동에 대해 박 대통령은 광신도와 같은 열정과 신념으로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고 기억된다. 이때부터 새마을운동은 전국민운동으로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박 대통령은 새마을 운동의 역사가 5년째를 맞는 75년 전국새마을 지도자대회에서“살기 좋은 내 고장을 만들고 부강한 조국을 건설하여 후손들에게 떳떳한 유산으로 물려주자”고 강조했다.
새마을운동을 자연보호, 사회기강, 서정쇄신과 연계
1977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새마을운동은 농촌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정신혁명”이라면서 “이 운동을 통해 흙을 사랑하고 자연과 내고장과 내조국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특징이며 정신”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박 대통령의 이같은 평가는 새마을운동을 자주와 자존의 민족정신을 체질화하는 국민들의 정신혁명운동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한편 경제발전과 국력신장을 조기에 이룩하는 국민소득증대의 국정철학으로 모두들 이해하고 있었다.
10.26 박 대통령이 서거한 후 새마을운동이 정신혁명과 소득증대의 목표를 동시에 달성한 놀라운 성과와 실적이 개발도상국가의 발전모델로 전파됐다. 2012년 현재 아시아, 아프리카 103개 국가에서 5만여명이 한국까지 와서 새마을 연수를 받았다고 집계되고 있다.
또한 유네스코는 한국의 새마을운동은 빈곤퇴치와 농촌개발을 위해 노력하는 국제개발기구와 개발도상국가들에게 매우 귀중한 자산이라고 규정하고 새마을운동 기록물(1970~79년) 2만2천건을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했다. 박 대통령이 창시한 새마을운동은 우리나라 역사에 가히불멸의 사회운동으로 길이 기록될 것으로 확신한다.
우리가 지금에 와서 박 대통령의 탁월한 국정운영의 리더십에 놀라고 있는 것은 교육을 국가의 백년대계로 인식하고 사전준비에 착수한 사실이다. 국가지도자로서 그분은 국민소득 증대와 경제생활의 풍요가 야기시키는 사회기강의 해이와 그 부작용으로 인한 물질문명의 폐해를 예견한 정확한 통찰력과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안목을 갖고 있었다.
국가가 처한 현실과 민족의 정서에 걸맞는 국민교육의 실시가 경제발전과 의식개혁을 동시에 실현하는 지름길이라는 소신을 자주 밝혔다. 국가유지의 원동력이 경제력과 국민성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박 대통령은 가정과 학교의 교육이 국민성을 좌우하고 국민의 인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확신했다.
박 대통령은 68년 12월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면서 “길이 후손에게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고 역설했다. 1937년 문경 보통학교 교사를 지냈던 박 대통령은 교육의 중요함을 청년시절부터 절감했을 것으로 보인다.
71년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기공식에서 “성장하는 국력의 여유를 교육에 재투자함으로써 과학과 문화와 혁신의 새바람을 일으키고 통일과 중흥의 힘을 길러나가자”고 강조했다. 국적있는 산 교육과 근대화에 필요한 교육을 학교교육의 중점 지표로 삼을 것을 지시했다.
오늘날 오직 취업과 성적외에는 전부를 외면하는 교육현실이 대접을 받는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인성교육이 사라졌고 학생과 교사의 사제지간 도리가 무너졌으며, 남을 배려하는 동방의 윤리도덕이 타락한 세상으로 둔갑했다. 당시 제정된 국민교육헌장의 정신과 내용이 오늘까지 변하지 않고 전수됐다면 공교육의 혼란과 사교육의 범람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지금 학생들이 듣지도 배우지도 못했을
국민교육헌장 전문을 여기에 참고로 소개한다.
국민교육헌장 존속했다면 교육정책 혼선 예방 가능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게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헌장을 다시 읽어보면 당시 교육환경과 시대상황은 4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엄청나게 변하고 현실에 맞지 않는 내용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산업화를 이룩한 기성세대의 경험과 안목으로 본다면 국민교육헌장의 기조와 목표는 현대에 와서도 지켜지고 시류에 맞게끔 고치고 다듬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오늘과 같이 교육부재 현상과 윤리도덕의 타락은 초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우리 고유의 민족정신과 미풍양속, 백년대계의 교육을 소홀히 한 단견의 역대 정권의 대통령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국민교육헌장은 선포된지 25년만인 1993년 교육에 대한 식견과 안목이 없었던 김영삼 대통령시절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삭제되고 정부 공식행사에서 전문 낭독이 금지됐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효도와 경노의 기본 예의도 지키지 않고 물질만능 풍조에 물든 혼돈과 무례의 광풍은 모두 인성교육의 실패, 학교 및 가정교육의 부실, 정권마다 바뀌는 교육정책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심사숙고한 교육정책을 재임중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추진한 까닭에 그 시대에 교육받은 기성세대들은 나름대로 산업화와 근대화의 시대적 소명에 충실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운동과 국적있는 교육의 교훈은 역사의 기록만으로 남고 더 이상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발전되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