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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6일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마태오 13,31-35
인간은 비유로 소통해야 하는 삼위일체 구조로 되어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겨자씨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그 사람 안에서 나무처럼 자라나 휴식 같은 친구가 되게 합니다.
또 성령은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어진 누룩과 같아서 그 사람을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어 누구나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빵이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며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라고 하신 시편 구절을 인용합니다.
직역하면 “나는 비유로 내 입을 열리라.”입니다.
정말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본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느님은 왜 비유로만 말씀하실까요? 우리는 먼저 하느님 삼위일체의 신비스러운 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성자’, 그 계시를 완성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하느님 모습을 따라, 영-혼-육으로 되어있는데, 보이지 않는 ‘생각’(혼),
그 생각을 표현하는 ‘말’(육), 그리고 그 말이 생각과 일치하게 만드는 ‘마음’(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인간이 동물이나 나무와 소통한다면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언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온전한 소통을 위해서는 같은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게 ‘생각’과 같은 ‘아버지’, ‘말’과 같은 ‘성자’, ‘마음’과 같은 ‘성령’의 같은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담긴 말은 생각과 일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은 생각과 다릅니다.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담긴 표현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할머니가 신부님 쓰시라고 돈 만 원을 비닐봉지에 싸서 몸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었다고 몰래 손에 쥐여 준다면 그것은 단순히 돈 만 원을 주시는 행위일까요? 돈 만 원 안에는 할머니가 사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에게 주는 선물이나, 행위, 혹은 말에 마음이 담겨야 비로소 완전한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담긴 선물은 분명 보이지 않는 생각을 계시하는 비유가 됩니다. 하지만 개에게 그렇게 준다면 그 비유는 무너져 아무 쓸모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 안에 마음이 담겨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있어서 당신 생각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당신을 닮은 구조를 지녔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한 자매님이 “요즘 성인들이 저와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느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 자매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들어서는 좀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친구와 새벽 5시까지 통화하다 잠든 날이 있었거든요.
그날은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축일이었습니다.
그 전날 딸에게 ‘내일은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 축일이니 천둥이 칠 수 있으니까 잘 들어봐!’라고 했었어요.
그냥 그분들이 이야기할 때 스콜라스티카 성녀가 오빠를 보내기 싫어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며 비가 내려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없었잖아요.
그런데 정말 아침에 딸이 저를 흔들어 깨우면서 ‘엄마 정말 천둥이 치고 비가 왔어!’라고 하는 거예요.
저도 참 신기하다 여겼죠.
그런데 손목을 보니 제가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그림이 있는 묵주 팔지를 차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 팔지를 차지는 않거든요.
전 세례명이 마리아인데요.
그래서 친구에게 신기해서 전화했죠.
신기하게도 내가 성녀의 팔지를 차고 있는데 정말 그분들이 표징을 보여주셨다고요.
근데 그 친구가 더 놀라는 거예요. 그 친구는 베데딕도 팔찌를 차고 있었던 거예요. 정말 신기하죠, 그쵸?
요즘 성인들 축일을 미리 기억하고 기도하였는데, 정말 그분들이 함께 계심을 느꼈다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정말 성인들이 그 자매님과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처음에 말만 들었을 때는 머리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담기니 그것이 비유가 되는 것이고
그 비유 말씀을 들으면 머리만 건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건들기 때문에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 인격적인 소통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지 않으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인격적 소통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인과 소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힘내, 파이팅!”한다고 해서 힘이 날까요?
머리로만 전달하는 정보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건들려면 내 마음을 그 생각과 합하여 비유로 전달해야 합니다.
“게도 탈피하는데 그때는 죽은 것처럼 보여. 하지만 더 강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잖아.
우리도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거 같아. 조금만 더 힘내자!”
이렇게 말해준다면 그 사람은 힘든 상황에서 ‘아,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구나. 그래 힘내자!’ 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제가 굳이 복음 묵상을 할 때 억지로라도 비유를 끼워 넣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비유를 찾으면서 저의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따지자면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온전한 계시가 되지 못하십니다.
만약 우리도 하느님 삼위일체 모습대로 살아간다면 모든 행동과 말에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하나의 비유가 됨을 잊지 맙시다.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보이지 않는 계시 대상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자라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혼과 육이 하나가 된 사람은 반드시 하느님 나라의 계시가 됩니다.
그리고 그 비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 그 사람은 완전한 소통과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6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성모님이란 교회의 둘도 없는 보배이자 빛나는 별을 낳아주신 요아킴과 안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최근 반복되어 강조된 복음 말씀의 주제가 좋은 땅, 좋은 열매였습니다.
땅 주인이 신경 하나도 쓰지 않은 불모지에서는 절대로 좋은 나무가 자라고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퇴비를 넉넉히 뿌리고, 갈아엎고 또 갈아엎은 비옥한 땅에서 좋은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탁월한 신앙인,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이셨던 성모님 역시 영적으로 가장 잘 준비된 가정을 배경으로 탄생하셨고 성장하셨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초 세기부터 성모님의 부모님이신 요아킴과 안나, 이 두 성인을 각별히 공경해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에는 요아킴과 안나에 대한 언급이 일체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전승을 통해서 두 분의 생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성모님의 부모님은 성모님 못지않게 겸손한 분들이셨고, 언제나 기도와 침묵 속에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갔던 모범적인 신앙인이셨다는 반증이 두 성인에 대한 부족한 자료라고 확신합니다.
아버지 요아킴은 나자렛 출신으로 존경받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의 신심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두 분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연세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요아킴은 자녀를 청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고, 40일간 단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안나 역시 집에 남아서 탄식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분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들어주셨습니다.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안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안나와 비슷한 환시를 받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요아킴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나는 성문 앞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두 분은 서로 부둥켜 않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출산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보니, 결과는?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실망했지만,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가 세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데려가서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신심이 깊고 출중했던 요아킴과 안나는 지극정성으로 마리아를 양육했고 교육시켰을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큰 선물을 잘 받아들이고, 끝까지 그 선물을 잘 안고 갈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를 시켰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고향인 나자렛은 낙후된 지역 갈릴래아에서도 아주 후미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전체 인구를 다 합해봐야 4백명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일제 강점기를 체험해봤기에, 당시 유다인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았는지, 나자렛의 마리아 역시 얼마나 팍팍한 삶을 살았었는지에 대해서는 즉시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산골 소녀 마리아를 총애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실 당신의 통로이자 사다리로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작은이들을 극진히 사랑하시고 당신 구원 사업의 도구로 선택하시는 하느님께, 그리고 성모님이란 교회의 둘도 없는 보배이자 빛나는 별을 낳아주신 요아킴과 안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7월 26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늘 나라가 어떻게 시작해 완성되는지 보여 주십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2)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그 시작이 너무 작고 미약해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일에 골몰하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들의 눈에는 감추인 듯 드러나지 않지요.
그런 씨앗이 흙과 물과 양분을 만나면 어떤 풀보다 크게 자랄 싹을 틔웁니다. 새들도 깃들일 수 있을 정도의 나무로 자라서 그 잎은 채소가 되고 열매는 향신료가 되지요. 눈에 띄지도 않을 크기의 씨앗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미래입니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
또한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누룩은 음식에 섞는 첨가물로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곡식과 섞여 물과 온도의 조건이 갖춰지면 빵도 부풀리고 술도 만들지요. 누룩은 그 자체로 남지 않고 녹아 버리지만 타자와 섞여 그 가치를 배가시켜 줍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 나라를 선사하신 대목입니다.
"그 무렵 모세는 두 증언판을 손에 들고 돌아서서 산을 내려왔다. 그 판들은 양면에, 곧 앞뒤로 글이 쓰여 있었다. 그 판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시 것이며, 그 글씨는 하느님께서 손수 그 판에 새기신 것이었다."(탈출 32,15-16)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사십 일을 지낸 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계약의 증언판을 들고 내려옵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판을 마련하셔서 그 위에 "손수" 새기셨다고 하지요.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애정이 얼마나 지극한지, 그리고 이 계약을 그분이 얼마나 설레이며 열망하셨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존재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일련의 관계성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계명은 하느님과 관계 맺는 방식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 일상의 삶과 신앙 생활에서 지키라고 손수 백성에게 내리신 선물이라 할 수 있지요.
모세가 받아 온 십계명 안에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이어가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것, 그리고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금지들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계명은 백성을 옭죄고 규제하는 올가미가 아니라 '하늘 나라'라는 완성태를 품고 있는 선물입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탈출 32,31)
그런데 모세가 백성을 떠나 하느님 앞에서 지낸 사십 일의 부재 기간이 이스라엘에게 너무 길었던 걸까요? 그들은 이 선물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마음이 조급해져 다른 신을 만들고 그 앞에서 날뛰고 맙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이것이 우상의 특징입니다. 불변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맞추어 그분을 닮아가다가 종래에 그분과 일치하는 길이 신앙의 영적 여정이라면, 우상은 자기의 욕구와 욕망에 따라 재단한 맞춤형 신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신의 자리에 놓기는 해도 실은 자신들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요.
우상은 하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상 자리를 꿰어찬 재물과 권력, 정보와 지식, 외모와 장수는 신앙의 눈에 그저 허망한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는 모르지 않지요.
반면 십계명이라는 선물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권을 보장합니다. 하느님 자녀로서,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다 보면, 겨자씨처럼 또 누룩처럼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하늘 나라의 실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이 세상 한가운데서 완성되어 가는 겁니다.
하늘 나라와 우상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하늘 나라는 잇속만 따지는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미약한데다 느리기까지 해서 특히 현세적 삶에 능한 이들에게는 매력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제 맘대로 살고 싶은 이들에게 따분하고 성가시기까지 하니 세상을 아우를 비전과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 없으면 딱 찬밥 신세일 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십계명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비록 나약한 죄인이어도 하늘 나라를 품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오늘은 여기 걸려 넘어지고 또 내일은 저기 걸려 주저앉으면서, 번갈아 삐걱대고 절룩거리면서도 미숙하나마 마음 속에 간직한 사랑 덕분에 하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지요.
현재의 미소하고 불완전한 모습에 실망하거나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이룰 하늘 나라의 모습이 지금 우리 눈에는 희미해보여도 하느님은 그걸 선명히 보시면서 우리를 이끌고 계시답니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기대가 곧 완성이고 또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니, 함께 힘 내어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