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사람이 돈 300쥐어주며 선교지가 있으면 죤일에 쓰란다.
한참 고민을 했는데 숙제치곤 참 어려웠다. 그동안 가난하게 사는 이웃을 보면 안타까웠는이 기회에 캄보디아에 집 하나 지어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엉터리 건축과 집수리라면 좀 해봤던 것을 경험삼아 빙기를 탔다.
그동안 누적된 마일리지로 공짜 비행기를 탔는데 텍스 20만원 정도만 냈더니 해결되었다.
어디로 가서 누구집을 지을것인가?
지난번 시엡립 식당 앞에서 불구의 몸으로 구걸하던 그 여인 집이 좋을까?
그렇다면 통역없이 어떻게 전달 할 수 있으며 혹시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분명 자기 땅이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고민끝에 한 집을 선택했다.
담날 현장에 도착했는데 집을 짓기란 문제가 많았다.
허름한 양철집에 10명의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집을 지을만한 장소는 진흙땅이었고 얼마 전에 메꾸었는지 발목까지 빠질정도의 뻘구덩이다. 그마져 도로에서 7-80미터 떨어져 있었는데 도로에서 개울까지 건너야 했었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진다.
날씨는 한국의 6월처럼 햇살이 따가웠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자갈과 모래를 주문했고 건축자재상으로 갔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시멘트 타일등을 외치며 구석구석 돌아댕기며 때론 영어와 한국말을 동원하며 그림까지 그려가며 자재를 구입해야했다. 근데 계산서를 받아들고서는 깜짝놀랬다. 자재가 넘 비쌌기 때문이다.
문공장으로 갔더니 그들만의 규격문이 있었는데 제품이 영~ 아니다.
300만원으로 예상을 했는데 첫날 자재비와 문값이 거의 그 수준이다.
스레트를 올릴 소위 삼각형 갓슈는 나무로 직접짜야했는데 마침 헌집을 뜯은 목재가 있었고
오래된 나무여서 못질과 톱질이 쉽잖았다.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일은 어려웠다. 특히 건축자재가 약 2-30톤정도인데 중간에 개울이 있었으니 경운기로 나르기도 장난이 아니었고 그 만큼 인건비도 많이 들고 시간도 걸렸다.
끝나지 않은 우기로 인하여 약 70미터되는 길은 질퍽거렸는데 참다 못하여 자갈을 두 차를 더 주문하여 깔아야 했다.
한국에서 출발 전에도 넘 바쁜 일이 있어 밑반찬을 하나도 챙기질 못했기에 밥으로 채워야 하는 배의 절반은 과일로 채워야했고 더 고통스러운 것은 새벽 2-3시정도면 잠을 깨는데 밤마다 닭울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생각보다 공사가 힘들게 진행되었고 닷새 일했더니 몸에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워낙 건축일의 기본조차 모르는 그들과 집을 세운다는 자체가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눈길을 주지 않으면 블록이 비툴어지고 구불해졌다.
일꾼의 품삯은 하루 5$이었는데 비싼 시멘트는 엄청 낭비를 하고 있었고 기술수준도 낮고 일은 드뎠다. 한국공사는 재료비 절반, 인건비 절반인데 비하여 이곳은 재료비 80% 인건비 20%로 생각된다.
공사 8일이 되자 이제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바땀방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의사선교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분은 좋은 직업을 마다하시고 선교에 몸을 던지셨는데 작년 이맘 때 알게 된 분이시다. 자기가 내일이면 먼곳으로 떠나야하는데 만나려면 오늘 오란다.
공사는 80%했는데 그곳엘 갔다가 다시 이곳에 오기는 힘들 것 같았기에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없는 오후를 보내게 되었다. 그들이 할 수 없는 한쪽 방의 천정공사를 했고 또 다른 방은 타일로 바닥을 만들고 있었는데 일을 마무리하면서 지갑을 털어보니 넘 빠듯했다.
최소한의 여비만 남겨놓고 다 털어주고 마무리 일을 부탁했다.
말이 안통하니 난 벙어리로 8일을 지내왔다
그 집에 할머니는 60대 후반정도였는데 떠나려는데 날 붙잡고 눈물을 흘린다.
말이 안 통하고 통역이 없으니 난 완죤 벙어리로 감독하기가 쉽잖았다.
힘든 일, 먹는 것이 부실했고 잠자리가 익숙하지 못했고 전기 공급이 안되는 집이라 선풍기 바람조차 쐴수 없었고 종종 세균들로 인함인지 밤에 가려움으로 인하여 몸과 맘이 만신창이되어 버리고 말았다.
해질무렵 서둘러 약속된 도시로 나왔다.
이 나라에 이런 집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죤 집에 세들어 살고 계셨다.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담날
'계실동안 사용하십시요'"고 하시며 먼 곳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시장으로 가서 고기와 양념과 과일을 사다가 고기를 볶았다. 아내가 만들어 주는 것과는 맛이 달랐지만 남의 냉장고를 뒤져가며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거실에 있는 선교사 수첩을 뒤쳤였더니 이곳에도 동기가 있었다.
담날 어느 교회로 갔는데 주로 젊은이들로 구성되었는데 활기차 보였고 무려 2시간 반이나 예배 시간을 끌었다.
저녁 무렵에 동기가 찾아왔다.
13년 만에 만남이었다.
그도 고생꽤나 했는 모양이다.
담날 예상보다 사흘을 앞당겨 공항으로 왔다.
외국공항치곤 한국인이 90%이상을 차지하는 공항은 이곳밖에 없을 것이다.
그 밤에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세 대였다.
거의 자정이 되어 출발하는 빙기는 더 피로를 가중시키고 있었다.
이틀이 지났지만 아직 뼈마디가 아프다.
학교 다닐 때 진저리나게 숙제가 많았는데 인생길 가운데도 숙제가 있는 게로구나/
힘들었지만 그 가정에 큰 행복을 선물로 드린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
앞으로도 시간과 물질이 허락된다면 가난한 이웃들의 집들과 어린이집들을 세워나가고 싶다.
첫댓글 주께 영광입니다! 귀한 숙제를 하고 오셨군요. 목사님뿐 아니라 함께 섬겨주시는 사모님의 모습에 머리 숙여집니다. 주님과 늘 동행하시는 아름다운 사역 되시길 소원합니다. 가족 모두의 건강도 아울러 기도합니다. 샬롬~!! ^*^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외국에서 힘든 건축을 세 차례 해봤습니다. 날씨는 덥고, 말은 안 통하고 넘 넘 힘들었습니다. 별이야님 감사합니다.
Thank you for your Joteungeul.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일맥님이 답글을 쓰셨을까? 궁금합니다.
감동이 오는 글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