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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가 매일 바치는 기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잡신을 섬기던 이스라엘 주변 이민족들의 기도 습관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처럼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기도는 길고 장황하고 요란스러웠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과거 우리나라 무속인들처럼 기도했습니다. 징이며 북 등 타악기를 통원해서 분위기를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잡신들을 불러냈습니다. 길길이 뛰고 작두를 타면서 몸을 워밍업시키고 마침내 탈혼, 접신 과정을 통해 잡신이나 영혼들을 불러내 대화를 시작합니다.
가급적 더 힘센 신을 불러내 원하는 바를 집요하게 청하고 또 청합니다. 여의치않으면 더 강도를 높여 압박하고 밀어붙여 잡신이 어쩔수 없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그런 식의 웃기는 기도를 바쳤던 것입니다.
이방 민족들의 그런 저급한 형태의 기도는 자연스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스며들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길고 장황하게, 이 말 저 말 붙이고 또 붙였습니다.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압박하고 강요하는 불경스런 행위였습니다.
가만히 진단해보니 오늘 우리 기도 안에도 그런 이방인들의 기도 요소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 죽었다 깨어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지나친 요구나 무리한 청원을 세상 집요하게 반복합니다. 어떤 청원 기도는 듣고 있노라면 너무나 황당해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로 기복적이고 미성숙한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 아닌 기도를 끝도 없이 되풀이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하신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비록 짧지만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기도의 모델, 구체적인 기도의 방식을 명확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특징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께 최우선권을 두는 것입니다.
기도 때,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크게 불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가 미성숙한 기도에서 보다 성숙한 기도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나 중심의 기도에서 공동체 중심의 기도, 하느님 중심의 기도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만사형통과 가화만사성도 청해야하겠지만, 궁극적으로 또 다른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더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이유>
복음: 마태오 6,7-15
어떤 분이 성당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데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절실해요.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당신은 꼭 들어주시는 분이시잖아요. 저는 꼭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어요.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당신은 하느님이 아니세요. 전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을래요….”
저는 청개구리 같은 성격이 있어서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 주려 하다가도 그 사람이 그것을 ‘당연히’ 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하거나 맡긴 것을 달라는 듯이 청하면, 왠지 기분이 상해서 해 주려던 것을 다시 해주기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마태 6,7-15)에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이교인들처럼 말을 많이 하거나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느님도 당신의 자비가 크게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시지, 우리가 말을 많이 하거나 노력을 많이 해서 은총을 얻어냈다고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은총의 주도권자는 하느님이시지 우리가 이래저래 한다고 해서 그분의 결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신 다음 ‘용서’에 대해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기도를 하고 나서 반드시 더 사랑이 증가하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개연성이나 현실성은 개나 줘버린 영화 ‘7번 방의 선물’이 예전에 있었습니다. 지능이 유치원 수준인 용구라는 아버지가 예승이라는 예쁜 딸을 키우며 일어나는 일입니다. 용구는 큰 범죄의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 받아 교도소 7번 방에 갇히게 됩니다. 그곳에는 그 교도소의 짱으로 통하는 조폭 밀수범 오달수와 다른 흉악범들이 있었습니다.
용구는 어린이 유괴, 강간, 살인이라는 죄목이 있었기 때문에 오달수에게 사람도 아니라며 심하게 구타 당합니다. 그러나 본성이 착한 용구는 다른 조직이 오달수를 해하려 할 때 달려들어 용구를 구하고 자신이 대신 상해를 입게 됩니다. 이에 오달수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보답하려고 하는데, 용구의 청은 딸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큰소리 뻥뻥 쳐 놓은 오달수는 어쩔 수 없이, 용구 딸 예승이를 빵 박스에 넣어서 7번 방으로 밀반입합니다. 만약 이것이 들통나면 7번 방에 있는 모두가 커다란 질책을 받을 것도 분명하고 광복절 특사와 같은 것도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방에 있던 한 명, 다혈질 모범수 신봉식이 간수가 지나갈 때 이 소리를 질러 간수를 부릅니다. 같은 방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설득하고, 말하면 죽는다고 아무리 으름장을 놓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봉식은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있고 그래서 특사로 나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수가 문 앞에 서서 창살을 사이에 두고 둘은 마주섭니다. 그때 문 밑에는 예승이가 신봉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신봉식이 이 방에 아이가 있다고 말을 하려는 순간, 그 아이는 신봉식의 손을 잡으며 어른들은 가질 수 없는 맑고 애절한 눈빛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봅니다. 이때 간수는 자기를 왜 불렀느냐고 신봉식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신봉식은 주저하다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맙니다.
“저…. 저…. 빵 하나만 더 주세요…. 흑 흑”
교도관은 “니가 장발장이냐?”하며 자기 모자 속에 있던 빵을 구겨서 신봉식 입에 처넣습니다.
신봉식의 마음을 돌린 것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치에 맞는 합리적인 설득이 아니었습니다. 안 들어주면 안 믿겠다는 으름장도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다만 ‘다 아시잖아요. 아빠가 절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잠시만 아빠와 함께 있게 해 주세요.’라는 내용이 담긴 순결한 어린이의 눈망울이 모범수 신봉식의 마음을 순식간에 녹인 것입니다.
기도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감정’입니다. 감정이 없는 바람은 진짜 바람처럼 흩어집니다. 고양이들이 무언가를 바라며 주인을 바라보는 눈빛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진정한 눈빛을 볼 때 주인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가면서 야옹 한 번 하면 주인의 마음은 동요되지 않습니다. 매번 그렇게 한다면 주인은 자기를 무시하느냐며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로 사랑이 증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바라봐야 합니다. 성모송을 할 때는 성모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변화되고 그러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부모에게 10원 주며 감사하다고 하는 것보다는, 돈을 안 주더라도 손을 잡아주고 눈을 마주치며 길러줘서 감사하다는 말이 부모의 마음을 감동을 주는 데 더 좋습니다.
예전에 ‘시크릿’이란 책이 유행하였습니다.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라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구체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집을 갖고 싶다면 구체적으로 그 집을 상상하고 바라봅니다. 그러면 기쁨의 감정이 생깁니다. 이 감정이 결국 바라는 것을 이뤄준다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약속을 주실 때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라”라고 시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별을 바라보며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요? 그 감정이 결국 이스라엘의 성조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기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감정인데, 그 감정은 바라봄에서 옴을 잊지 맙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6,7-15: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9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아들을 믿는 이들의 특권이며, 믿음의 어머니인 교회에서 우리가 받고 그분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우리에게 아버지라 불리기를 원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 이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로 더욱 거룩해지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우리 안에서 나날이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10절)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먼저 우리 안에 서고 하느님께서 다스리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시민들은 이미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안에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의 모습에 따라 나와 함께 있을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10절) 이는 우리의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하며, 당신의 뜻이라는 힘과 그 뜻을 실행하는 능력을 주십사 청하는 것이다. 그분의 뜻은 그분께서 자녀로 삼으신 이들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11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청한다. 이것은 구원의 양식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죄로써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양식으로 주님의 신성에 참여한다. 이 양식은 딱 하루에 충분한 만큼 주어진다. 이 양식은 내일을 위한, 영원을 위한 양식을 뜻하며 물질로 바뀌지 않는 양식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12절) 우리는 죄의 용서를 청한다. 그러나 용서받기 위한 조건은 다른 사람을 먼저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이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전제한다.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으므로, 용서에는 하느님과의 확고한 계약이 담겨있다. 용서는 잘못한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13절) 우리는 이미 저지른 죄의 용서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탄에게 이끌려 가도록 두지 마십사고 청하는 것이다.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13절). 이 기도는 앞의 모든 청원과 기도를 간결하게 요약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를 하면 더 청할 것이 없다. 악에 대해 하느님께 보호를 청하고 그것을 받게 되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호자로 둔 셈이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주님의 기도를 잘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많은 사람이 현재의 한국 교회를 걱정합니다. 점점 늘어나는 냉담자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교회의 미래라고 하는 아이들을 성당에서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직자나 수도자를 지원하는 성소자의 숫자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나라도 유럽 교회처럼 텅텅 비는 것이 아니냐며 걱정합니다. 지금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만큼 짙은 안개로 뒤덮인 내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이자 감독 요기 베라는 아주 유명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맞습니다. 우리의 삶이 계속되는 한 절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즉, 끝까지 교회의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제가 있는 성당의 구성원들은 모두 열심히 합니다. 단체장님, 구역장, 반장님들, 교리 선생님, 그밖에 함께하는 교우들 덕분에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지금 제가 있는 성당입니다. 자기 자리에서 충실하면서 동시에 열심히 기도하시며 신앙생활을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큰 우려가 있음에도 성장하는 것입니다.
일치하는 곳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서로 반목하고 부정적 말과 행동으로 서로 아프게 한다면 일치는 어려울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의 미래 역시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틀렸다면서 포기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또 사랑으로 일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강조하신 것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줄 모르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하여라.”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기도는 먼저 하느님께서 당신 구원 계획을 드러내 보이시고 실현해 주시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인간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용서로써 이웃과 맺는 친밀한 관계와 악에서 구원되기를 청합니다.
이 기도를 열심히 바치고, 또 이 기도의 내용을 우리의 삶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서로 일치할 수 있으며, 이 일치 안에서 우리 교회는 주님의 뜻에 맞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며, 하느님 나라에서 모두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남의 책을 많이 읽어라. 남이 고생하여 얻은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소크라테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기도할 때,
우리는
굳이 하느님께
이것저것
낱낱이 아뢸 필요가 없다네.
고요히
그분 앞에 머무르며
우리의 마음을 드리면
하느님께서는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신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기도는 마치도
하느님의 숨결로 내가 창조되고
추운 날 입김을 불어가며 손을 녹이듯이
성령의 입김으로 삶의 활력을 얻는 시간입니다.
미사 중 경문을 읽을 때
교우들을 기도로 초대할 때
나는 얼마나 상투적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게 됩니다.
내가 삶의 의욕이 없고
미사를 중심으로 한
모든 사제 직무에 의욕이 없다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슬퍼하는 유가족들을 위해 빈소를 방문하고
하느님의 위로를 전하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병마와 싸우고 육체적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환우들을 위해
방문하고 기도해 주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아픔과 상처로 얼룩진 이들의 고해성사나 면담을
바쁘다는 핑계로 경청하기를 회피하고 있다면
돈과 재물에 집착하고 사목을
재물 축적의 사심으로 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인간적이고 육적인 것이 먼저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나의 말은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5,10-11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