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개그맨에서 대박집 사장님으로>
기독타임즈 윤선주 기자 sun@kmctimes.com
김학래·임미숙 집사 : 회장님의 영원한 ‘딸랑이’로, 네로황제의 철없는 왕비 ‘날라리아’로, 1980-90년대 전국 안방에 큰 웃음을 선물했던 개그맨 김학래·임미숙 부부(동서울성현교회). 한동안 브라운관에서 뜸한가 싶더니 요식업 창업에 성공, 하루 매출 5백만원의 대박집 사장님이 됐단다. 인기 개그맨에서 대박집 사장님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이들 부부의 숨겨진 스토리가 궁금했다. 사업의 성공보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 기도한다는 남편 김학래 집사를 지난 5일 만나봤다. 결혼하기 위해 교회 찾아, 1990년 한 쌍의 개그맨 커플이 탄생했다. 당시 개그 프로, 영화, CF까지 섭렵하고 인기 스타의 반열에 올랐던 김학래, 임미숙 씨가 세간의 화제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김학래, 임미숙 집사
방송국의 선후배로 처음 만난 이들 부부. 처음에는 그저 무서운 선배, 예쁘장한 후배일 뿐이었다. 그러다 혼기가 꽉 찬 총각이 애인 하나 없는 게 안쓰러웠던 선배들이 자꾸 등을 떠밀었다. “미숙이 어때? 예쁘고 착하잖아” “한 번 만나봐”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아” 지인들의 ‘입김’에 마음이 흔들린 걸까. 한 번도 여자로 보지 않았던 그녀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렇게 호감을 갖게 됐고 연애 감정이 솟구칠 즈음. 그녀는 남자에게 선언을 했다.
“난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은 안 만날꺼에요. 정식으로 만나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해요!” 그 길로 서점에 달려가 성경책을 샀다. 자랑스럽게 그녀 앞에 성경책을 내민 남자. 그렇게 만남이 시작됐고 1년여 만에 결혼을 약속했다. 순탄하게 식장에 들어가나 했더니 어느 날 청천벽력 날벼락이 떨어졌다.
“아무래도 결혼은 자신이 없어요. 우리 다시 생각해봐요….” 인생 경험도, 사회 생활도 ‘초짜’였던 여자는 결혼이 두렵기만 했다. 9살이나 많은 남자의 나이도 부담스러웠다. 절망에 빠진 남자는 매일 교회를 찾았다. 성경책만 든 나일론 신자였지만 무턱대고 하나님을 찾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떠난다는 위기 앞에서 고통과 외로움을 덜어낼 방법이 없었던 남자. 새벽이고, 한밤이고 교회에 들려 눈물, 콧물을 흘렸다.
기도하는 방법도 또 대상도 모른 채 그냥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 저 미숙이를 사랑합니다. 그녀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성경책도 사고 예배도 드리지 않았습니까…” ‘막무가내식’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아니 여자의 마음에 닿은 것일까. 기적같이 그녀가 돌아왔고 올해로 19년째 부부로 살며 서로를 채워가고 있다.
밖으로만 돈 남편…공황장애 앓은 아내. ‘초보 남편’ 김학래는 돈만 많이 벌어주면 아내가 좋아할 거라는 착각 속에 빠져있었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 경제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업 구상, 인맥 관리, 인생 상담…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부인과의 대화도 줄어만 갔다. 무려 10년 동안이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에서 출연했던 김학래 집사.
아내에게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마음의 병이다. X-레이, 정밀검사를 받아도 아무런 이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주변에는 꾀병으로 오해하기 싶다. 오로지 환자만 아는, 겪는, 당하는 고통이다. 남편은 뒤 늦게서야 자신의 가정생활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됐다. 후회하고 잘못을 빌었지만 아내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이혼 얘기가 흘러 나왔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네로 25시'에서 열연한 임미숙 집사의 당시 모습.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은 치유 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같은 교회 목사님과 교인들이 수시로 심방을 와 아내를 위로했고, 가까운 친구들이 릴레이기도를 하며 우리 가정을 위해 눈물을 쏟아주었습니다.”
아내도 마음을 되잡았다. 신앙으로 병을 극복하고 가정을 지키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남편은 그동안 못했던 몫까지 아내를 사랑했다. 그렇게 6년을 노력했다. 이제는 추억담으로 웃어 넘길 수 있는 ‘영광의 상처’가 됐다.
김학래 집사는 “공황장애에는 나만한 전문가가 없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 정도다. 고통과 아픔을 통해 신앙도 사랑도 한층 성숙해진 이들 부부. 지금은 아들 동영 군과 세 식구가 함께 가족 나들이를 자주 한다. 가까운 공원으로, 멋있는 유원지로 가능한 좋은 것을 함께 보고 누리려 애 쓴다. “아들에게도 무섭기만 한 아빠였어요. 항상 혼만 내는 나쁜 아빠였지요. 부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대화하려고 노력하니 이제는 아들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됐습니다. 하나님이 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게 하셨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4억 사기에 휘청…대박집 사장님 되기까지..전성기를 누리던 김학래·임미숙 집사는 1990년 중반 개그 코너에서 한발 물러선다. 이후 방송 3사를 누리며 예능 프로에서 MC로 활약을 펼쳤다. 부부가 공동 사회를 맡아 안정된 진행솜씨는 물론 친숙한 분위기를 이끌어 방송계 뿐 아니라 기업체, 행사 등에서 러브콜이 줄을 이었다.
‘홈런’을 노렸던 김학래 집사는 1994년 서울 강남에 지인들과 대형 고깃집을 차렸다. 야심차게 문을 열었지만 동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1년 만에 폐업을 하고 피자집을 냈지만 옆에 유명피자집이 들어서면서 4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이어서 창업한 미사리 라이브 카페는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IMF를 당했다.
이미 골조가 올라간 상태라 공사를 밀어 붙었지만 4억 원의 사기를 당하자 방도가 없었다.
연이은 사업실패, 아내는 하나님께 매달렸다. 금식기도를 하고 새벽제단을 쌓았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부부는 함께 창업을 위해 기도하며 발품을 팔았다. 일단 목이 좋은 장소를 고르기 위해 유명 식당이 밀집해 있는 지역을 직접 찾아 다녔다. 시장조사를 통해 ‘대기업에서 하는 업종이 몰린 곳’이 외식업에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게 된다.
올림픽공원 인근 지역에 욕심이 생겼다. 식당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매일 부동산을 찾아다녔지만 적어도 2-3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김 집사는 답답한 마음에 휴일에도 임대 건물 물색에 나섰고, 마침 식당을 개업하려다 포기한 건물주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중식당 ‘린찐’을 개업하기에 이른다. 임미숙의 ‘임’과 김학래의 ‘김’을 합친 중국식 발음이 바로 상호명인 ‘린찐’이다.
사업성공은 아내의 기도 덕.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해서인지 부부는 경영에 ‘목숨’을 걸었다. 남편은 요리에 들어갈 식자재를 직접 구매하러 다녔다.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서 야채를 고르는 눈과 손놀림은 상인들조차 감탄할 정도. 아내는 손님들에게 차를 따르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부부가 친절을 몸소 보이자 종업원들도 최상의 서비스로 맞장구를 쳤다. ‘린찐’은 식사 시간마다 줄을 서는 건 기본이고, 몇 번을 기다리고 되돌아간 손님이 기어코 찾아와 식사를 하는 광경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여기서 개발한 음식은 홈쇼핑을 통해 전국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각지에서 창업을 의뢰하는 문의도 줄을 잇는다.
“아내의 기도가 컸습니다.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아내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처음 하나님을 알려준 사람이 아내였던 것처럼 지금도 그분에 대한 사랑과 은혜를 배우며 살고 있습니다. 저 처럼 와이프를 잘 만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김학래 집사는 아내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인색함이 없었다. 이와 함께 이들 부부의 삶과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제는 그 사랑을 되갚는 일에 나설 계획”이라며 앞으로의 행보를 지켜봐달라고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