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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7. 묵상글 (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 안다는 모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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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7.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7.17 03:29
- 안다는 모름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 드립니다.”
제 생각에 대표적인 교만이 바로
내가 옳다는 교만과 안다는 교만입니다.
진정 올바른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올바르지 않으면서 옳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고 하며 자기만 옳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에 대해서 비유를 가지고 비판하셨지요.
바리사이와 세리가 모두 기도하러 성전에 갔는데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지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에 비해 세리는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이렇게 기도하지요.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오, 하느님!’ 하며 둘 다 하느님을 불렀지만
누가 실제로 기도했고, 하느님을 뵈었습니까?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리 앞에 있었고,
하느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리를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런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이지
않으신다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또 다른 교만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안다는 교만,
곧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교만인데 마찬가지로
진정 하느님을 잘 알고 진정 지혜롭고 슬기롭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서 잘 안다고 더 나아가서 다 안다고 하니 그것이 문제지요.
그러나 아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곧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지혜로운 것이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지혜로운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지혜는 겸손과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자기를 잘 아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인데,
자기를 잘 안다는 것은 자기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할 때 모르는 것을 물을 겁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반대로 자기는 잘 알고 있으며 다 안다고 자신하고,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잘 알고 다 안 결과가 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행히 이렇게 교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교만이 하늘을 찌를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고 다만 땅에서 교만하고
그래서 땅만 보고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고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할 바에는 얼치기로 겸손하지 말고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이 제대로 겸손해야 합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는 모든 것을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귀찮을 정도로 모든 것을 물어댑니다.
지금은 군대에 가 있는 손주와 그 할머니와 함께 어디를 간 적이 있는데
가는 내내 눈에 보이는 족족 할머니에게 그것이 뭔지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런데 그때 저는
모든 것을 모르고,
그래서 모든 것을 묻는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모든 것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주님 말씀을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조금 알고 일부 아는 것으로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지,
안다는 모름이 나의 교만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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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7.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대화의 한자어를 보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Dialogue인데, 어원상 고대 그리스어 dia(통과하다, 사이로)와 logos(말, 말씀)에서 왔습니다. 직역하면 ‘말을 통과하다’, ‘사이로 말하다’로, 말이란 서로를 통과해서 나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한쪽에서 일방적이 되어서는 대화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잘 하십니까? 예전에 휴대전화가 없었을 때는 공중전화 줄이 길게 서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휴대전화가 나오고서는 길을 걸어가면서 길게 통화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화로 길게 통화하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메신저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또 메신저로 소통할 때도 유행어와 이모티콘 표현이 가득해서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대화하지 않는 시대에 사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 대화가 없어진 것은 아닐까요? 꼭 필요한 대화이지만, 대화가 없다 보니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해도 많습니다.
이런 대화 부족이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잠식 기도하는 것도 어려워하며, 메신저를 통한 간단한 대화처럼 짧은 기도에만 익숙해져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미사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성체만 마치고서는 밖으로 나가시는 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주님 곁을 떠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짧은 기도, 짧은 만남을 통해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있을까요? 계속된 오해와 불통으로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식사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전교 활동 가운데에서도 홀로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당신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고, 어렵고 힘든 시간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범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바쁘다고, 힘들다고 대화를 멈춰버리면 당연히 주님과의 관계도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 대화도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가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다면 과연 대화가 가능할까요? 대화가 되지 않고 가까운 관계도 되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기도를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이렇게 계속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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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라. 그들이 걸어온 길은 고난과 자기희생의 길이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위대해질 수 있는 법이다(G.E. 레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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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7.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 찬양의 기도요, <뒤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를 부르시면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곧 아버지께서 우주의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동시에, 모든 피조물의 소유권을 가지신 분임을 고백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드리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이 고백은 하느님의 뜻은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주신다고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나는 모른다.”라는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묻습니다. 그리고 ‘모른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는 안다.”라는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이기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감추시고”와 “드러내시고” 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찬양을 나타내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곧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시는’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 대한, 완전히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일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일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드리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 입니다.’(1코린 5,18)라고 말씀하신 사도 바오로처럼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장막에 머무는 길은 우리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수도규칙 머리말 30)고 제시하신 성 베네딕도의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의 선하신 뜻”(마태 11,26)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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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7.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일을 하라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는 것을 제대로 쓰지 않으면 아는 것이 병입니다. 오히려 모르는 게 약입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은 사라지고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는 종종 ‘내가 무엇을 했다.’고 으스댑니다. 그러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철부지처럼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셨다,’고 합니다. 진정 우리가 하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필요에 쓰십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내가 커지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필 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배척받았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사람, 별 볼 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기에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부 고위직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살아온 면모가 드러납니다. 잘난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로라하는 사람이 감추어진 부정이 더 많게 보입니다. 자녀를 위한다고 좋은 학군으로 위장전입을 하고, 절세를 노린 쪼개기 증여, 부모 찬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평범한 이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입니다. 불법으로 물질을 챙기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존경받아야 할 무리에서 뻔뻔한 사람이 생각 외로 많아 평범한 사람들을 허탈하게 합니다.
그러나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많아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는 것이 남을 등쳐먹는 데 사용되지 않고, 남을 풍요롭게 하는데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알기 때문에 순수함을 회복하고 더 많이 사랑할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단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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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7.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연령회에서 11월 위령성월을 ‘죽음에 대한 교육’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죽음이란?’이라는 주제는 본당신부님이 하는 거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까지 죽음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지 않았습니다. 강의 부탁을 받으면서 ‘신앙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말에 ‘죽음’과 관련된 단어가 있습니다. 자주 듣는 말이 ‘돌아가셨습니다.’입니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여행을 가듯이, 죽음은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운명하셨습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관계가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말에 죽음은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과도 같고, 이 세상과의 관계가 끝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딘가로 떠났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갔다 오라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제사를 교회는 ‘우상숭배’라고 여겼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 복자는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제사’를 조상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인정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낼 수 있도록 예식을 마련하였습니다. ‘연도’는 죽은 이를 위한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연도는 고인의 유족들에게는 깊은 위로가 됩니다. 연도는 이제 하느님의 품으로 가는 이를 위해 성인들의 통공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구약성서 마카베오서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아자르의 이야기입니다. 마카베오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럽혀진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자진해서 형틀로 나아가며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다.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엘아자르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일곱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마카베오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 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이 사악한 인간, 당신은 우리를 이승에서 몰아내지만,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우리 형제들은 잠시 고통을 겪고 나서 하느님의 계약 덕분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소. 그러나 당신은 주님의 심판을 받아 그 교만에 마땅한 벌을 짊어질 것이오.” 일곱 형제와 어머니는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위령기도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신앙인들에게 죽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사람들은 깊은 위로를 받습니다.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서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섰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입니다. 부활은 죽음이후의 삶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나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포기한다면 부활은 허황된 꿈일 뿐입니다.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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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7.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너는 왜 이렇게 철이 없냐?’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아이들은 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지요. 그러므로 철부지들이라는 말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들에게 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철이 있을 나이인데 없는 것처럼 행동할 때 우리는 철이 없다, 혹은 철부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금 신선하게 다가온 말이 ‘철부지’라는 말입니다. 철부지라는 말을 ‘어린이와 같은’이란 말로 대치하기도 합니다.
이미 나이가 들 대로 들었지만, 철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과 이루고자 하는 것만 이루어지면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의 ‘철부지’는 이런 이기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철부지’는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어린양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즉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무조건 따르는 모습이 바로 철부지와 같은 모습입니다.
아이들에게 엄마와 아빠는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를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고 합니다. 철부지들에게 자기 뜻을 내비친다고 합니다.
철부지가 좋아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라면, 철부지는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철부지에게는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의미로 우리가 철부지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좋은 것 많아도 하느님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봅시다. 세상에 아름다운 미술품이 많지만, 우리 눈에는 십자가 위에 달린 주님만큼 아름다운 미술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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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도 향기롭습니다.
저는 거의 매일 걷습니다.
이곳의 모든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면
저 또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마무리 기도를 하고
저녁을 먹습니다.
이것저것 준비와 정리를 합니다.
그리고 걸을 준비를 합니다.
저는 밤길을 따라 걷습니다.
그런데 꽃향기가 납니다. 분명 밤인데 꽃향기가 납니다.
빛이 떠나고 어둠이 왔음에도 꽃은 향기를 내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밤이 왔다고 해서 꽃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낮에도 꽃이고 밤에도 꽃입니다.
꼭 우리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 삶의 밤을 지나고 있다. 하더라도 향기 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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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7.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종, 주님의 도구’인 우리들
“거룩한 철부지의 삶”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보이셨나이다.”(마태11,25)
행복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그 어디든 가까이 내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선택해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종으로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겸손과 온유의 마음으로, 찬미와 감사의 마음으로 살면 참행복한 삶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가르침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고, 자신에게 떳떳하게 행동하면, 누군가를 가르치는 어른이 되고, 일상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다산>
다산의 말씀도 멋집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일 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을 때 참기쁨, 참행복의 주님의 종으로 살 수 있겠습니다.
“군자는 세가지 즐거움이 있다. 부모형제에게 탈이 없는 것, 하늘과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 영재를 가르치는 것이다.”<맹자>
역시 맹자다운 말씀으로 주님의 종으로서 손색이 없는 삶입니다. 무엇보다 닮고 싶은 것은 하늘과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입니다. 부끄러움없이 하늘을 바라볼수 있다면 참행복한 주님의 종들입니다. 자주 자신을 성찰하라고 눈들면 어디나 하늘입니다. 18년전 “언제나”라는 고백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언제나
높이보다는 깊이를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을
드러나기보다는 드러나지 않음을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을
특별함보다는 평범함을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을
시끄러움보다는 고요함을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을
부수적인 것보다는 본질적인 것을
보이는 것보다는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라!”-2006.
이에 앞선 “수묵화水墨畵처럼” 이란 글도 마음이 끌립니다.
“천연색 사진보다
빛과 어둠이 신비로이 조화된
흑백 사진이 좋듯이
천연색 마음 들떠 가볍게 하는 봄, 여름, 가을 풍경보다는
수묵화처럼
깊고 고요한 넉넉하고 편안한 겨울 풍경이 좋네.”
이래서 고독과 침묵을 사랑하는 수도승들은 겨울을 유난히 좋아하는가 봅니다. 문득 나이 50이 넘으니 겨울산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어느 수녀의 말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도구로서 묵묵히, 겸손히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이런 주님의 종으로서 제분수를 모르고 기고만장한 모습은 정말 꼴불견입니다. 바로 제1독서, 하느님 징벌의 도구인 아씨리아가 제 분수를 많이 벗어났고 주님의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에 이어지는 분수에 넘친 아시리아에 대한 주님의 질책이요 이와 아랑곳없는 무지한 아시리아의 자기확신입니다. 의인화된 아시리아 제국의 교만한 행태가 오늘의 제국을 보는 듯 합니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하느님을 망각한 제 분수를 잊은 교만한 제국의 행태요, 정말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지도자를 보고 싶습니다. 지도자의 외로움과 고독은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요, 희망이자 빛’이신 주님을 찾으라는 신호입니다. 각계각층 지도자 위치에 있는 분들은 정말 기도해야 할 난세중의 난세입니다. 다시 제분수를 잊은 아시리아의 건방진 행태에 대한 주님의 신랄한 질책입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아시리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오늘 복음의 주님의 겸손한 종, 주님의 참 좋은 도구인 예수님이 우리가 본받을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앞서 무도無道하고 사악한 불신의 세 도시를 꾸짖던 자세와는 판이합니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유일한 감사기도이자 찬양기도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께 감사하는 당대의 철부지 제자들은 바로 오늘 우리가 소망하는 모습입니다.
아버지란 젊잖은 호칭이지만 원래 아람어는 “아빠”입니다. 얼마나 아빠 하느님과 친밀한 부자관계의 예수님인지 잘 드러납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우리 또한 주님의 참 좋은 종으로, 도구로 살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가리키는바 하늘나라의 신비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는 일상화된 감사찬양기도의 아름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같이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삶을 택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늘나라의 신비를 사는 철부지 ‘거룩한 바보’의 삶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
참 마음 설레게 하는 말마디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사는 철부지야 말로 참행복, 참부자, 참자유인입니다. 역설적으로 대우大愚의 사람이자 동시에 대지大智의 사람들입니다. 정말 살 줄 하는 진짜 지혜로운 자들은 철부지 제자의 삶을, 주님의 충실한 종의 삶을 원할 것입니다. 이어 우리가 평생 추종하는 예수님의 신원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은혜로이 계시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이처럼 아버지와 독보적인 관계에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 삶의 참보물이자 참행복이신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최고의 종이자 도구인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날로 깊이함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이 깊어 갈수록 날로 거룩한 철부지의 삶, 겸손과 온유, 감사와 찬양의 삶, 주님의 충실한 종이자 도구로서의 삶일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 은총이 날로 예수님과의 우정을 깊이해 줍니다. 늘 바쳐도 늘 좋고 새로운 제 좋아하는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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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7.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으로 감사를>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큰 것이
아닌
작은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많은 것이
아닌
적은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잘난 것이
아닌
못난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강한 것이
아닌
약한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넘치는 것이
아닌
모자란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무언가임이
아닌
아무 것도 아님에
감사를
그리하여
참으로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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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7.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다른 민족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로 갔다가 다른 민족들에게로 옮겨 가는 것을 예견하신 아버지를 찬미하고 찬양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종의 모습으로 육화하신 당신의 사명에 대해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께 감시를 드리고 계십니다. 당신에 관한 이 신비를 지혜롭다는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시고, 아직 철부지인 다른 민족들에게는 드러내신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키시어, 정해진 때가 되자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입증하십니다. 이 모든 일이 참으로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하느님께서는 그에 앞서 은총의 회개를 그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는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담긴 의로움에 대해 별말씀 없이 지나가시지만, 다른 곳에서는 분명하게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얻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 잘못입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엑카르트는 하느님만이 죽음에서 일으킬 수 있고, 하느님만이 생명을 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다. 이 일은 너무나 고귀하고 고상하여, 하느님만이 이를 수 있다.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의 역할은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여정, 곧 깨어남의 여정의 단계들을 알고, 우리 자신을 깨우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그 여정을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의 모든 완전과 지복(至福)은, 우리가 모든 피조물과 시간과 존재를 통과하고 넘어서서, 마침내 궁극적인 터전에 도달할 때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204)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6절: 청빈운동, 이단과 이단 신문
성서주의와 예수를 따름:
네델란드의 열렬한 개혁가 탄겔름은 성직자의 재산 소유를 반대하고, 성직자의 세속적인 생활을 매우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이러한 비난은 결국 교계제도와 성사적인 교회와의 유심론적(唯心論的)인 투쟁이 되고 말았다. 그는 성체성사도 거부하였다. 그는 1115년에 민중에 의하여 타살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단은 계속 영향을 미쳤다. 1124년에 노르베르토는 안트웨르펜 근처에서 이 이단을 반대하는 셜교를 하였다. 급진적인 이탈리아의 속죄 설교가인 브레시아의 아르놀드도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한 교회를 요구하고, 교황직에 대하여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로마 시의 정치적인 책동에 연루되었을 때, 그는 더 높은 정략 정치에 걸려들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적발제는 1115년에 그를 처형하였다. 그의 추종자들인 “아르놀드파”들은 그후 발두스파와 카타리파로 넘어갔다.
발두스파는 리옹의 부유한 상인 베드로 발두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1173/1176년경 마태오 복음 10장 5절 이하를 읽으면서 청빈 이상을 발견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청빈과 속죄 설교의 엄격한 사도직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신의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신봉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난한 자들” 또는 “리옹의 가난한 자들” 이라고 자칭하였다. 그들의 선의에서의 설교는 기존의 현상에 대한 과장과 격렬한 비판을 담고 있었고, 신앙에 대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리옹의 주교는 그들이 평신도이기에 신앙문제에 대해 언급할 자격이 없다며 그들의 설교를 금지하였다. 발두스는 교황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문의하였다. 그는 1179년의 제 3차 라테란 공의회에 나타났고, 교황 레오 3세는 그의 청빈 이상을 치하하면서 선교만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에게 순수한 속죄 설교를 허락하였다. 이 조건은 막연하고 불확실한 것이었다. 리옹의 주교는 발두스가 그 조건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난을 하며 다시 그의 설교를 금지하였다. 발두스는 다시 로마에 의뢰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황 루치오 3세가 엄하게 반응하였다. 교황은 1184년 그에게 모든 설교활동을 금지하고, 그동안 과격한 형태를 취한 그의 운동 전체를 비난하였다.(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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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7.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에게 드러난다.” (11,25~27)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아빠 하느님 앞에서 철부지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전 어느 수녀원에 미사 갔을 때 그 수녀원 복도에 걸려 있던 “나이가 들면 세상의 눈은 멀어지지만, 영적 눈은 점차적으로 밝아진다.”라는 표현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아픈 다리는 낫지 않고, 눈도 귀도 멀어지기만 한 게 아니라 마음도 굳어져 가는 듯해서 이런 저를 보면서 저도 마음이 여간 불편합니다. 작은 것인데도 예전처럼 잘 참지 못하고, 급한 성격이 더 급해지는 것 같아서(=나이 들면 다 그런다고 하던데 저만 그런가요?) 요즘 거의 말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살아갑니다. 혹여 대화하다 보면, 서로 불편해지지 않도록, 보고도 보지 않은 척, 들어도 듣지 않은 척하면서 말문을 닫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지나치게 고루한 관점을 마치 지금에도 맞는 것처럼, 우길 땐, 참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철부지처럼, 다만 믿음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신뢰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싶은데 아직은 그렇지 않네요. 하느님 앞에 작은 자의 삶과 숨은 가난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은 데 그렇지 못한 저 자신이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사실 하느님 안에 제대로 살아가는 삶이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전적인 신뢰와 의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느님의 지혜이며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들이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 (11,27) 그래서 아버지를 알고 아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는 지적인 앎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앎, 사랑의 앎에서 오는 지혜만이 하느님의 신비를 꿰뚫을 수 있고, 사랑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신비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에게 드러난다.”(11,25~2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제 복음에서 불행하다, 는 예수님 말씀과 대비되고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을에선 랍비들의 종교 교육이 가장 성행했었으며,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 그 고을 사람들은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지적인 앎으로 말미암아, 아는 것이 병이다, 는 표현처럼 자기도취와 오만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눈을 감고 생명의 빛을 보지 않았고, 귀를 틀어막고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대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그 의로움이 예수님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11,27)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보여줄 사람이 없으며,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아버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지혜로움과 슬기로움이 죄는 아닙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지식과 지혜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주 필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듣고 배운 것이 흘러넘쳐 오히려 부족함만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습니다. 과유불급의 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로써 지나친 하느님에 관한 지식 과잉이 오히려 하느님을 살지 못해 영혼이 말라비틀어지기도 합니다. 지식 과잉이 하느님보다 우선하다 보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리게 됩니다. 하느님보다 다른 것을 더 우위에 둘 때,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 능력, 명예 등이 우선 할 때, 하느님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에 비해 철부지들은 받아들일 수 있는 여백이, 공간이 충분합니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고,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반대로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한 것들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든지 자신의 지금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하느님 앞에 서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내가 살아온 삶의 자세나 가진 것이나 경험한 것이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떨쳐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힘써 노력해서 배운 지혜이고, 터득한 슬기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간청하면서 다만 예수님 삶의 자세와 태도를 본받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온전히 신뢰하며 의탁하는 삶을 살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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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7.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 부족함 깨달아 도움 청할 겸손만이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9&id=2099492&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07-16 ㅣNo.174260
요즘 성당에 봉사하는 이들이 준단다. 대부분 맞벌이로 가정을 꾸리기에 봉사할 시간이 없다나. 문제는 누가 보아도 경제적 뒷받침이 있는 이들도 여러 여가 생활로 봉사시간이 정말 부족하단다. 암튼 봉사할만한 이들이 이러저러한 갖가지 이유로 꽁무니를 뺀다. 우리의 실상은 어떤지? 권력에 기대거나 재물에 의지하는 건 아닌지? 주님 앞에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를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찬사를 보내시는 저 철부지들이란 과연 어떤 이들일까? 어쩌면 예수님 자신과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며 맹목적으로 따르는 그 제자들 아닐까? 그렇다. 오로지 외길 인생인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철부지일 게다.
예수님은 이처럼 철부지들에게만 나타나신단다. 미루어 보건대 그 옛날 멋모르고 그분께 불려간 그들은 정말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으로 따랐다. 그것도 삼 년이나 줄곧 따랐다. 그런 철부지 같은 성품이 아니었다면 도중에 수도 없이 그만두었을 게다. 그런 과정을 통해 스승의 참모습을 깨닫는다. 그분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본다. 우리도 그 철부지 제자들처럼 단순함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하리라. 그 단순함만이 그분의 뜻을 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니까.
그러기에 우리 역시 철부지의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누구나 다 주님 앞에서는 그저 소박하고 단순한 철부지이기에. 우리 신앙인에게 성찰과 숙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근본인 것은 마음을 비운 수도자들처럼 단순하고 무조건적인 믿음과 신뢰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를 말자. 그분께 늘 순박하고 끊임없는 감사로 나아가야만 사심 없이 마냥 철부지처럼 살게다.
사실 전적으로 어리석고 우둔하기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철부지 아이처럼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이렇게 우리 앞에 다가오는 매일의 삶을 뚜벅뚜벅 잘 걸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지혜이지만, 신앙은 우리에게 대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들,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는 능력 있는 이들이 공동체의 커다란 기둥이고 힘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신비는 세상의 지혜가 아닌, 그분 말씀의 진리 안에 스미고 그 행동은 사심 없는 순박한 행동에서 나타나리라. 우리 모두는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속에서 임마누엘 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같은 존재들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 안에 의당 머무르신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늘 곳곳에서 당신을 알게 해 주신다. 이 시각도 그분도 함께 하심이리라.
하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공동체에서 일하는 데 자꾸 걸리적거리는 이가 앞자리를 차지할지도. 어쩜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구원 소식이 전해지고 수고하고 짐 진 이들이 먼저 초대될 수도. 이렇게 그분 나라에 먼저 도달하는 이들은 스스로 더 작아질 줄 알고, 더 겸손할 줄 아는 이들이리라. 사회가 발전할수록 우리 욕심도 더 커지고 요구하는 것들도 더 무거우리라.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주님의 도우심을 청할 줄 아는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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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7.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같은 하느님 말씀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뀌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같은 고해성사인데 어떤 이들은 하느님과 진실한 화해를 이루고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은총을 얻습니다.
같은 기도인데 어떤 이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신비를 체험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살이로 얻은 지혜와 슬기는 하느님에 관하여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가치와 이득을 쫓게 만들고, 합리와 효용을 찾게 만들기에 하느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께 믿음을 두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보다 오히려 인문학과 심리학 강의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 시간도, 필요하거나 바라는 것이 생기기 전까지는 의미 없는 시간으로 느껴집니다.
오히려 기도보다는 전문가와 상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의 지혜와 슬기는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이 말만 되풀이하게 만듭니다. “다음에요, 주님.”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싶나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봅시다. 어린아이가 무조건적인 신뢰로 부모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말씀을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지혜와 슬기로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이나 ‘부담스러운 말씀’으로 여기지 말고, ‘하느님 말씀이니까 오늘 꼭 실천하여 보겠다.’는 단순함에서 나오는 믿음으로 대하여 봅시다.
그리고 성체 앞에 자주 머무르는 시간을 가집시다.
철부지가 부모 곁에 늘 머물러 있으려는 것처럼, 무엇인가 필요할 때만이 아니라 아무 이유가 없어도 성체 앞에 자주 머무릅시다. 하느님의 신비는 이러한 단순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오늘 하루는 우리 모두 철부지가 되어, 살아 계신 하느님을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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