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10번 출구 근처에서의 하룻밤
박소원
옛날 아주 옛날 어릴 적 보았던
할아버지 지팡이에 새겨진 용무늬에 열중하며 기억 하나를 따라
"하룻밤 자고 갈까"
대답을 내뱉기도 전, 숙소 예약을 하고 편의점과 꽃집을 돌며 소주와 꽃을 사들고 죽은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나이에도 그 기억에 완강하게 사로잡힌 언니
객실 문을 쓰윽 밀치고 들어선 곳
흰색 둥근 탁자 위에 꽃을 놓고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고 흐린 조명 아래 향초 하나 켜고 침대 옆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자마자
“여기에 없는 사람 말하기 없기”
일방적으로 툭 툭 내뱉고는 지팡이에 새겨진 용머리에 다시 몰두하며
“여기에 없는 사람”들을 죄다 호출하는 언니
저승에서 불쑥 끌려나온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 둘 언니 둘 증인으로 세워두고
꾸벅꾸벅 할아버지 지팡이에 새겨진 용꼬리 위치를 찾아가다
금방 곯아떨어지는 언니
동생과 내가 기억에도 없는 용무늬 지팡이를 짚고 어둠속에 서서 배웅을 해도
저승사람도 이승사람이 그리운가?
개똥밭에 굴러도 정말 이승이 더 좋은가?
엄지 검지 중지 무명지 소지
손가락들 접었다 폈다 기다려도
곁에 붙어 선 채 돌아갈 기미가 없네
어둠 속에 잠겨 눈에 띄지 않는 몸들
처음 본 도시 구경에 신이 난 듯
낯선 길을 매일 걸었던 길처럼
살아생전 한번 와 본 적도 없는 번화한 길을 뚜벅뚜벅 논둑길처럼 잘도 따라 걷네
가게마다 문이 닫히고 인기척이 없는 시간
여기는 우리의 비밀 왕국; 발을 내딛으면 닿는 곳마다 문 닫힌 가게들 close down, shut down 카페도 많고 옷 가게도 많고 꽃집도 많고 어학원도 많고 맛 집도 많고 영화관도 있고 노래방도 있고 화장품 가게도 많고 술집도 많고 대형서점도 있고 호텔도 모텔도 많고, 지하역이 있고 길 끝에선 반드시 또 다른 길이 열리고 이쪽저쪽 정거장도 많고 추억을 쇼핑하기 좋은 곳
사람들 모두 퇴근한 이곳은, 어둠 가득 찬 골목은 우리 가문의 묘지, 어둔 도시는 棺 뚜껑을 열어둔 채 오래도록 걷고 싶은 거대한 공동묘지......, 삼월이 오고 삼월 뒤에 수북하던 안개가 걷히고 잠이 깬 사람들의 발자국사이로 저승의 발자국 소리 점점점 멀어진다......,지하역 출구 건너편을 향해 서서 나는 먼 곳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세어보네
하루를 묵은 밤을 꼬박 걸은 다음 날
주문진 사는 맏언니 발안 사는 여동생 동탄 사는 내가 강남역 10번 출구 쪽 '노랑저고리‘ 한정식 집에서 우아하게 밥을 먹고 파고다 어학원 옆옆 건물 2층 cafe에 앉아 목을 빼고 말없이 맑은 하늘을 보네
“쉬는 날, 가벼운 차림으로 꼭 갈게요”
중천에 뜬 태양, 환하게 드러난 보도 위에 갈 길이 바쁜 사람들, 휙 휙 사라진 사람들, 휙 휙 다시 밀려드는 사람들, 빈자리 하나 없는 cafe를 텅 빈 것처럼; 이리저리 둘러보며 미안해 고마워 툭 툭 굴러 떨어지는 눈물 훔치는 언니
----애지 여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