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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6 : 1~16)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ㅇ생산치 못하였고 - 하나님의 거듭된 약속(12:7;13:15,16;15:4)에도
불구하고 사래가 늙도록 아이를 갖지 못한 것은 신앙생활의 한 갈등
요인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 결함으로 여기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으니(20:17,18) 그 갈등은 더욱 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사래는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인간적 방도를
모색하였는데(2절)이 역시 후사문제에 대해 아브람이 범하였던 것과
동일한 실수가 아닐 수 없다(15:3).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한치도
어김이 없이 반드시 다 이루어지며, 그러한 성취의 때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 하나님 편의 적절한 때를 좇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전3:1,2;사
55:8,9).
ㅇ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 아브람이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사래 사건으로 인하여 바로에게서 선물로 받았던 노비들
중의 한 사람인 것으로 추측된다.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ㅇ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 하나님께서 자신의 태(胎)를 닫으셨
다는 뜻으로 이제부터 하려고 하는 일의 책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단언한 말이다. 물론 인간의 잉태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
이시다(29:31;시 127:3;사 66:9). 따라서 사래는 더욱 더 하나님만을
믿고 그 약속을 의지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그분의 잉태케 하시는 역사를 그기까지 기다리지 못한
채 스스로 성급한 판단과 섣부른 일을 감행한 데 사래의 잘못이 있는
것이다. 결국이 사래의 실수는 장차 큰 비극의 전조가 되었다.
ㅇ여종과 동침하라 - 족장이나 부호(富豪)와 같은 상류 계층에선 부부
간에 자식이 없을 경우, 아내가 자신의 여종을 남면에게 주어 후사를
보도록 하는 것이 고대 근동의 관습이었다(Nuzi Tablets)그리고 이 경우
태어난 아기는 여종에게가 아니라 아내에게 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래의 행동은 당시의 생활 습속을 따른 어쩌면 자연스런 행위
였다고도 볼 수 있으나 (1)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인내하는 신앙심을
결여한 점과 (2) 이로써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일부 일처제를 파괴하였
다는 잘못은 면할 수 없다.
ㅇ얻을까 하노라 - 직역하면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하갈을 통하여
자신을 중심한 새 가정을 일으키려는 사래의 인간적 의도를 잘 드러내
준다 이런 점에서도 사래는 하갈을 인격체로서 보다는 생산 수단으로만
대하였다는 비난을 받을 수있다. 왜냐하면 비록 종이 주인의 재산이긴
하지만 그의 생명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고귀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엡 6:9).
ㅇ들으니라 (솨마) - '동의하다', '만족하다'는 듯으로 사래가 제시하는
요구와 방법이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인지 분명히 알고서도 아브람이
이에 응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즉 그는 사래의 요구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상반되는 철저히 인간적인 방법임을 알면서도 이에 한마디의
반론도 제기하지 않은 채 수락한 것이다. 실로 그들은 칼빈(Calvin)의
지적대로 약속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그 성취 방법에만 몰두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인 방법과 잔꾀로 성취해 보려고
하는 것은 인간 교만의 발로이자 잘못이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이루어가야 한다. 목적만 좋으면 수단과 방법은
정당화되기 마련이라는 사고는 일반 사회에서조차 질타당하는 잘못된
생각이다(롬 6:1).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 년
후이었더라
ㅇ십년 후 -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할 때의 나이는
75세였다(12:4)따라서 이때는 아브람이 85세가 되던 해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은 그로부터도 15년이 더 지난 10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주어졌으니(21:5)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
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
께서는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명하셨다.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ㅇ잉태하매...멸시한지라 - 직역하면 '잉태하자...눈에 하찮게 보였다'.
당시에는 여자가 잉태치 못하는 것을 대단한 치욕으로 생각했고 다산
(多産)을 신의 은총으로 간주했었으니(29:32,35;30:6,20)이러한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을것이다(삼상 1:6).결국 사래는 자신의 계책에
자신이 얽매이는 비참한 꼴을 당한 셈인데 이는 일부 다처주의(一夫多妻
主義)에서 오는 폐단과 비극의 한 예라 할 수 있다(삼하 16:21,22).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ㅇ나의 받는 욕 - '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마스'는 '손해',
'강포'를 뜻하는데 이는 곧 주인인 사래가 일개 여종에 지나지 않는
하갈로부터 받은 멸시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포스러운 것이었음을
나타내 준다.
ㅇ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 직역하면 '그것은 당신 탓이다'. Livivg
Bible은 이를 '그것은 모두 당신 잘못이다'(It's all your fault)로
번역하였는데 하갈 사건으로 파생된 모든 책임을 회피하려는 간사한
인간 속성이 잘 드러나 있다. 즉 사래는 아브람이 수태한 하갈을 편애
한 결과 하갈이 더욱더 자신을 멸시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아뭏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있는 이러한 책임 회피 성향은
범죄한 인류의조상 아담과 하와로부터 비롯된 인간 치부(恥部)이다
(3:12,13).
ㅇ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 자칫 이 말은 자신과 아브람의 행위를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정당하게 심판받겠다는 결연한 의지 표명인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참된 성찰도
하지 않은 채 감정에 치우쳐 모든 책임을 아브람에게 미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Calvin).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래가 이 일로 하갈을 학대하였을리 만무하다(6절)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계획이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과 같은 죄악을 범치 말아야 할 것이다.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ㅇ눈에 좋은 대로...행하라 - '원하는 대로 하라'는 히브리식 관용 표현
이다.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여주인인 사래는 하갈를 종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이 말은 사래가 그렇게 하여도 좋다는
뜻이다. 이는 칼빈(Calvin)의 지적대로 (1) 가정의 평화를 회복하기
원하는 아브람의 합당한 조처이자 (2)하갈을 통하여 약속의 자녀를
얻으려 했던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간접적인 시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면, 후사 문제에 대한 족장의 나약성과(Bush), 장차 태어날
아이의 어머니에 대한 부당한 대우(Candlisch) 등도 엿보인다.
ㅇ학대하였더니(아나) - 원뜻은 '응답하다'로 하갈이 사래를 멸시한
것만큼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가했음을 시사해 준다.
ㅇ하갈이...도망하였더라 - 빈곤의 악순환을 연상시켜 주는 죄악의
사슬고리 현상이다. 즉 사래의 인간적 계획->아브람의 동조->하갈의
교만->사래와 아브람 간의 불화->종의 신분으로 환원된 하갈->사래의
학대->하갈의 도망 순으로 계속 증대되는 죄악은 우리들에게 한 순간의
잘못이 엄청난 비극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경각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하다(약 1:14).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ㅇ여호와의 사자(말라크 예호와) - '말라크'(사자)는 '보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 대개는 '천사'를 의미한다(19:1;민 20:16;왕상 13:18;호
12:4;슥 2:3). 그러나 여기서는 성육신 이전 이 땅에 현현(顯現)하신
성자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의미하는데 이는 (1) 하갈이 그를 가리켜
'하나님'이라 부른점(13절) (2) 죄인으로서 제 1위 되시는 성부하나님의
본체를 본 자는 살 수 없다는 점(출 19:21-24;삿 13:22) 제 3위 되시는
성령은 단일성(單一性)을 지닌 불가변(不可變)적 존재이므로 인신(人身)
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ㅇ광야의 샘 - 일종의 오아시스로 주위에 사람이 상시(常時) 거주치는
않으나 이동 중에 있는 유목민들이 가축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도록
개발한 샘인 듯하다.
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ㅇ사래의 여종 하갈아 - 비록 하갈이 사래의 학대를 피해 달아날지라도
여전히 그녀는 '사래의 여종'임을 상기시켜 주는 말이다. 종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주인으로부터의 사면에 있지 결코 도망치는 것에
있지는 않다. 따라서 이 말은 불확실한 도피 행각을 벌이고 있는 하갈
에게 그녀가 취할 마땅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을 것이다.
ㅇ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 축복받은 장막인 아브람의 가정을
떠나 죄악과 우상 숭배의 도시인 애굽으로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문
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초기부터 타락한 아담에게(3:9), 그리고 가인
에게(4:9) 이 '어디'(where)란 물음을 던져오셨는데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현 위치를 파악하고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간구하는 그분의
눈물어린 호소이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하갈에게 던져진 이 어김없는
질문은, 오늘날 세상 향락에 탐닉되기 좋아하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들려
오고 있는 피묻은 주님의 음성이다.
ㅇ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 '사래를 피하여'라는 말은 하갈이 자신의
고향 애굽으로 도망치는 원인이 그녀로 부터 받은 견딜 수 없는 학대
(6절)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로써 도피 행위를 변호하고 선처(善處)
를 호소하였을 것이다(Lange). 한편 하갈이 사래를 자신의 '여주인'으로
호칭한 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양심이 움직이고, 자신이 여전히 사래의
종이란 사실을 분명히 바각케 되었음을 뜻한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ㅇ돌아가서 - 문제 해결을 위해 우선적으로 취하여야 할 방도이다. 하나
님의 품을 떠나 곁길로 간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은 돌이켜 하나님
께로 돌아가는 것이듯(신 30:9,10). 주인에게서 달아난 종이 사죄받을
수 있는 첩경은 다시금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훗날 빌레몬의 달아난
종 모네시모에게 취한 바울의 행동도 이와 같았다(몬 1:12). 오늘날 사회
기강이 해이해지고 각종 부정 부패가 만연하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학자
가 학자의 신분을 떠나고, 위정자가 국민의 공복(公僕)이란 위치를
떠나고, 군인이 활동 반경을 이탈하여 경거 망동하는 데 있으니 성도들은
세상을 밝히는 불로서 등경을 떠나 발 아래 처하지 아니함으로 본인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마 5:14,15).
ㅇ수하에 복종하라 - '수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드'는 '힘', '지배',
'명령', '보호'등의 뜻으로 주인의 권위와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이다.
이는 사래의 학대에 대하여서도 참고 온순하게 순종하라는 의미인데,
그렇다고 해서 주인은 종들을 소나 말처럼 취급할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성경은 종들에게도 안식일에 휴식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으며
(출 20:10) 종을 때려 죽인 주인은 형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출11:20).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ㅇ크게 번성하여 - 직역하면 '번성케하고 번성케 하여'. 하갈은 사래가
자신을 통하여 실현시키길 원하였던 하나님의 언약(12:2;13:16;15:4)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러한 언약의 자손이 태어나기 전에
(21:1-5) 하갈 자신도 많은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은 절망
중의 큰 위로였을 것이다. 특히 고대에는 오늘날보다 더욱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니 후손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는 이 약속은 그 속에 내포된 바
한 인간이 일국(一國)의 조상이 된다는것과 더불어 큰 축복이 아닐수없다.
ㅇ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
한바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13:16)란 말을 연상시켜 준다.
결국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은 이러한 약속대로 오늘날 터어키인들과 아랍
인들을 구성하는 12족속의 조상이 되었다(25:12-16).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ㅇ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 성경상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이름이
지어진 첫번째 경우이다(17:19; 왕상 13:2; 대상 22:9;마 1:21;눅 1:13).
히브리 사회에서 어떤 자가 다른 자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피명명
자에 대한 명령자의 종주권이나 특별한 은총을 나타내는 행위인데 여기서
이스마엘이 하나님과의 언약 밖에서나마 이러한 은총을 받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신실한 종 아브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12:3).
ㅇ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이 하갈의 고통과
괴로움을 헤아려 주셨다는 의미 외에도(LXX) 그녀가 드린 기도를 들어주
셨다는 의미를 지닌다(Chaldee). 왜냐하면 엘리에셀 (24:12-14)과 마찬
가지로 하갈 또한 아브람의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여호와 신앙을
체득하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13절).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ㅇ들나귀같이 - '들나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레'는 발이 빠르고 길들
여지지않으며 들에서 자유로이 뛰노는 '야생 나귀'를 의미한다(욥 39:5-8).
이 나귀는 당시 메소포타미아를 중심한 아라비아 지역에서 많이 서식하였
는데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스마엘과 그 후손이 들나귀
같으리라는 하나님의 이 예언은 30세기가 흐르는 역사 속에서 정착 생활을
단념하고 문명 생활을 멸시하면서 약대나 말을 타고 창을 든 채 광활한
자연을 마음껏 누비면서 난폭하고 거칠게 살아가는 베두인(Bedouin)계
아랍족들 및 사라센(Saracens) 족들에 의해 성취되었다.
ㅇ그 손이...치겠고...칠지며 - 이스마엘 자손의 호전적인 성격으로 인해
그 이웃 족속들과 반목할 것을 뜻한다. 이 예언은 아라비아,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사막등을 방랑하면서 이민족을 침공, 약탈하기 일수인 베두인
족과 A.D.7-15C 말까지 시리아, 이라크, 북아프리카, 대서양연안까지 진출,
무력으로 사라센(Saracen) 제국을 건설했던 호전적(好戰的)인 아랍 여러
족속들에 의해 열사상 성취되었다.
동방에서 - 직역하면 '면전에서'(in the presence of). 그런데 R.S.V는
이를 그의 모든 친족들과 '대항해서'(over against)로, 공동 번역은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로 번역하였다. 문자적인 뜻은 이스마엘 자손이
가나안 땅의 면전이라 할 수 있는 유프라데스와 수에즈 운하, 홍해 사이의
광대한 사막 지역에 거주하게 될 것임을 가리키는 듯하다.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ㅇ감찰하시는 하나님(엘로이) - '나의 눈으로 확인한 하나님' 또는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절망 중에 처한 하갈이 광야에서 하나님
의 위로와 도우심 및 약속을 받고, 그분을 뵈온 감격에서 참회의 마음으로
부른 하나님의 이름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고통과 절망중에 방황하는 인간들을 친히 만나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데
그에 대하여 감읍(感泣)하고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이후 참된 평강이
그의 전인격을 지배할 것이다(계 3:20).
ㅇ내가 어떻게...뵈었는고 - '어떻게 내가 하나님을 본 후에도 살아
있는가'로 번역될 수 있는 구절이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목도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출 20:19;33:20) 자신이
살아 남은 것에 대한 경이와 놀라움을 나타낸 구절일 수 있다(Keil,
Murohy).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를 '내가 광야 도피생활 중에서도 돌아
보시고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다니!'라는 의미의 감탄문
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ㅇ브엘라해로이 - 하갈이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기념하여 붙인 샘의
이름으로 '살아 계셔서 나를 지켜 보신 자의 우물'이란 뜻이다. 브엘세바
남방, 아인가데스 서북방 18Km지점에는 오늘날 아랍인들이 '마 레하이
라이'(살아 있는 자의 우물)로 부르는 샘이 있는데 이 샘이 '브엘라해
로이'일 가능성이 있다.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ㅇ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 본문은 하갈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다시
여주인 사래에게로 돌아갔고 또한 그녀가 아브람에게 광야체험을 들려
주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아브람은 하갈이 자신에게 낳아준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대로 이스마엘이라 칭하였것이다. 그러나
구속사적으로 그는 어디까지나 약속을 따라 난 자인 이삭(21:1-3)과는
구별된자로 '육체를 따라 난 자'이다(갈 4:23). 여기서 '육체를 따라
난 자'란 율법 곧 저주 아래에서 난 자들로 하나님의 약속의 유업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오늘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
하지 않는 자들이 곧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륙 세이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