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추 칼럼]김택근의 <정情>
200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1940년 프랑스 태생의 소설가. 한국에도 두꺼운 독자층이 있다)는 세계 곳곳을 떠돌며 글을 쓰고 있다. 노벨상을 받기 직전 1년 동안은 한국에 머물렀다. 그는 한국어 중 ‘정’과 ‘보람’은 영어나 프랑스로 옮길 수 없다고 했다. 그가 정情의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으니 아마 한국에 정이 많이 들었나 보다. 정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만 면면히 내려오는 우리만의 것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살펴보면, 우리는 온통 정이라는 끈으로 묶여 있다. 굶어도 정만 있으면 살고, 정이 들면 곰보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 그놈의 정이 원수지만 막상 정을 끊는 칼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지만, 식은 정은 하루에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매 끝에도 소금밥에도 정이 붙지만, 정이 떨어지면 살을 비벼도 산해진미를 차려놓아도 그저 시들하다. 우리에게 정은 품앗이이기에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온갖 정에 둘렀여 그 정을먹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에게는 정에 관한 수많은 격언과 속담 그리고 이야기와 노래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아마 우리 민족이 정에 유독 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에게 정은 마음이 굳어 새긴, 소중한 유전자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다.
그럼에도 정이 자꾸 메말라 가고 있다. 차가운 사이버 공간에 익숙한 젊은이들, 이웃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이 마땅히 정 줄 곳과 사람을 찾지 못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기고 전쟁이 터졌어도 우리는 정 주고 정 받으며 살았다. 우리는 정 많은 민족이기에 다시 인정이 꽃을 피울 것이다. 부디 가진 자에게서 없는 자에게로, 높은 사람에게서 낮은 사람에게로, 강한 사람에게서 약한 사람에게로 정이 흘러넘치기를 바란다.
연말 송년모임이 잦다. 만나면 반가운 얼굴들, 볼수록 정든 사람들, 그들이 있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사람들. 정이란 나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이다. 내가 아닌 우리가 되어야 비로서 정이 흐른다. 오늘이 어렵고 내일이 암울해도 동시대, 같은 공간에 살아 있기에 우리는 만난다.
정은 돌도 녹인다. 한 해의 앙금과 찌꺼기는 송년의 정담으로 녹일 것을 권한다. 정든 우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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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탁월한’ 언론인의 칼럼이다. 어느 해 어느 일간지에 실린 것같은데, 이제야 신간 『김택근의 묵언』 (김택근 지음, 2024년 11월 21일 동아시아 펴냄, 328쪽, 19800원)을 통해서 접했다. 다 읽고 난 후 나에게 ‘정情’이라는 글감으로 ‘한 편의 글’을 써보라는 숙제를 내주거나, 자발적으로 쓴다고 할 때 어떻게 썼을까를 생각해 봤다. 물론 글이라는 게 ‘100인 100색’으로 개성이 뚜렷한 것인 만큼, 어느 정도 엮을 수는 있겠으나, 이 양반처럼 깔끔하게 쓴다는 게 얼마나 언감생심言敢生心인 줄을 내 자신이 잘 알고 있기에, 읽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 신새벽 자판을 토닥거린다.
창문을 열어보니 대기가 심상치 않다. 밤새도록 첫눈이 허벌나게 내리고 있다. 첫눈? 맨먼저 그리운 사람들이 생각나지 않은가. 어느새 달력이 덜렁 한 장 남았다. 어느새. 이런저런 모임도 잦을 것이다. 이러한 첫눈 내리는 아침에 이런 칼럼 한 편 읽어보시라는 의미로, 나의 마음을 대신하여 남의 글을 올리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