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89
3월7일[사순 제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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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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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_WnabVxHbRk
[의정부교구 김동규 바오로(대신학교 영성부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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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역시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지 고민합시다!>
웬만해서는 병원 신세를 지지 않는 성격이라 가끔 가물에 콩 나듯 병원에 가면 과거와는 완전 딴판인 첨단 의료 시스템에 화들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진단과 치료를 위한 별의별 의료 기계들에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최첨단 의료 기술에 입을 다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안 계신 제 어머니를 진료해주시던 주치의 의사 선생님이 기억납니다. 명의로 소문이 자자해 몰려드는 환자로 늘 바쁘셨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환자의 고통에 깊이 공감해주시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한번 해 보자며 희망과 용기를 주시던 분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의사 선생님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병마를 쫓아내던 또 다른 예수님이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예수님께서 가장 역점을 두셨던 사목활동이라면 단연코 치유와 구마 활동이었습니다. 의료 체계나 수준이 열악하던 당시 수많은 사람이 별것 아닌 병 앞에서도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방에 득실대던 마귀의 횡포에 죽을 고생하고 있던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당신 두 눈으로 확인한 예수님께서는 발길 닿는 곳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환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하느님 아버지의 손가락이 되어 썩어 문드러진 환부를 재생시키고, 길길이 날뛰며 횡포를 부리던 마귀들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당신의 손가락 역할을 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소중한 손가락으로 어떻게 하느님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과 한없는 자비를 드러낼 것인가, 고민해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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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XVahVkQl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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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교우’란 용어가 주는 해악>
영화 ‘사랑도 번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은 도쿄의 한 호텔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두 명의 미국인 밥 해리스(Bob Harris)와 샬럿(Charlotte)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밥은 유명 영화배우지만 인기가 조금씩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20억 원의 돈을 받고 도쿄로 위스키 광고를 찍으러 온 것입니다. 처음 접해보는 동양 문화에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고 집에 전화해도 아내는 시큰둥합니다. 결혼 24년 차이기 때문입니다.
밥처럼 같은 호텔에 있으면서 잠 못 드는 샬롯은 결혼 2년 차입니다. 남편에게 사랑 받고 있지만, 출장이 잦은 남편에 비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샬롯도 여전히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외롭습니다.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 술을 한잔하고 대화를 나눕니다. 서로 비슷한 점이 많고 둘이 함께 있으니 잠이 옵니다. 둘은 미묘한 감정을 느끼지만, 선을 크게 넘지는 않습니다. 밥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 둘은 헤어지기 아쉬워합니다. 밥은 아쉬워하는 샬롯에게 가벼운 키스를 하며 귀에 대고 뭐라 말합니다. 샬롯은 얼굴이 밝아지며 영화는 끝납니다. 과연 저 둘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와 행복할까요? 어쩌면 더 큰 일탈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잠 못 드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계속 일탈을 꿈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힘을 빌려 그렇게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다른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물론 다른 표징을 보여주어도 그들은 믿지 않고 다른 핑계를 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당신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나라도 나라고 천국의 나라도 나라라고 하십니다. 나라가 갈라지면 나라는 망합니다. 마귀의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도 악으로 단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를 악한 자가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를 하늘이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편 아니면 사탄의 편, 두 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중도는 없습니다. 빛 안에 어둠이 속할 수 없고, 어둠 속에 빛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사탄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이미 사탄 편에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입니다. 어떤 이들은 새벽과 저녁은 빛과 어두움이 섞여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새벽은 빛을 선택한 사람의 상태이고 저녁은 어둠을 선택한 사람의 상태입니다. 내가 어느 편에 서기로 했느냐에 따라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 지가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쉬는 교우’는 어떨까요? 예수님의 편일까요, 어둠의 편일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편임을 멈춘 상태입니다. 빛의 편이었다면 조금씩 더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멈춘다는 말은 어둠으로 가고 있기에 어둠의 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냉담자들을 ‘쉬는 교우’라고 칭합니다. 쉰다는 말은 좋은 말입니다. 걷다가 쉬면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가 축적됩니다. 그러나 신앙을 쉰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뜻입니다. 밥 먹기를 쉬면 어떻게 될까요, 물 마시기를 쉬면 어떻게 될까요? 오히려 힘이 빠져서 죽어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냉담 교우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려고 쉬는 교우라고 칭합니다. 오히려 그런 칭호가 냉담을 회두시킬 필요가 없게 만들고 그들도 자신들의 상태가 빛으로 나아가는 줄 착각하게 합니다.
영화 ‘삼사라’에서 타쉬는 절에서 나와 결혼합니다. 신앙을 잠시 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내와 자녀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잠시 쉬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쾌락의 기쁨을 알아버렸고 아내와 자녀가 다시 돌아오는 길을 막습니다. 그런데도 쉬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를 쉬면 조금씩 죽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영성의 길을 아는 사람의 말입니다. 쉼은 생명을 회복함이지만, 냉담은 죽음을 선택함입니다. 이 절실함이 자녀들이 공부를 위해, 직장과 혼인을 위해 신앙을 잠시 쉰다고 했을 때 우리의 반응을 바로잡아 줄 것입니다. 사랑은 쉴 수 없습니다. 사랑을 쉰다는 말은 사랑이 식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불에 올리면 뜨거워지고 불이 없으면 식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진, 아니면 후퇴입니다. 신앙, 아니면 불신앙입니다. 쉬면 죽는 게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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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어르신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들어오는 자리는 표가 나지 않지만, 사람이 나간 자리는 표가 나기 마련이다.” 3명이 여행을 하다가 1명이 본당 미사 때문에 먼저 돌아갔습니다. 3명이 함께 했을 때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1명이 없으니 그 빈자리가 허전했습니다. 저는 운전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1명이 없으니, 운전도 해야 했습니다. 아침이면 가방도 챙겨야 했습니다. 신부님은 1인 3역을 했습니다. 모든 일정을 계획하였고, 숙소를 예약했습니다. 물이며, 먹을 간식을 챙겼습니다. 신부님은 떠나면서 목요일에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본당 주일 미사를 마치고 비행기를 타고 온다고 했습니다. 저를 댈러스에 내려주고 혼자 뉴욕으로 가야 하는 동창 신부님을 위해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둘이 함께 다시 뉴욕으로 간다고 합니다. 동창을 위해서 기꺼이 다시 내려온다는 신부님의 진한 우정이 고마웠습니다. 저를 데려다주고 혼자서 뉴욕으로 가야 했던 신부님이 안쓰러웠는데, 친한 동창과 함께 돌아가게 되어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렇게 10일간의 여행은 마무리되었고, 저는 댈러스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좋은 뜻으로 떠난 여행이 뜻하지 않은 갈등과 다툼으로 엉망이 되는 때도 있습니다. 심할 때는 같이 떠났지만, 따로 돌아오는 일도 있습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헤아림이 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이기적으로 내세울 때 그렇습니다. 자신의 큰 허물은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작은 허물을 들추어낼 때 그렇습니다. 지나친 음주로 몸과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신앙을 키우기 위해서 가는 성지순례에서도 간혹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입니다. 복도를 지나는데 누군가를 험담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모임 시간에 늦게 나온다거나, 침묵해야 할 장소에서 떠든다거나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제들끼리 떠나는 순례에서도 간혹 갈등과 마찰이 생기기도 합니다. 순례를 여행처럼 생각할 때가 그렇습니다. 저는 순례를 떠날 때면 늘 들려 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당 문 앞에 있는 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가시길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순례자로 이곳에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왜곡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베엘제불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선동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만일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믿고 따랐다면 그들 또한 하느님 나라로 가는 여행에 함께 했을 것입니다. 왜곡과 날조는 하느님한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곡과 날조는 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권력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했던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사순시기는 거짓과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왜곡과 날조를 밝혀내고 진실과 자유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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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14-23: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구들을 쫓아낸다.”(15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하신 일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벗겨내고, 그리스도의 힘의 원천이 베엘제불이라고 우긴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이라고 그분께 요구하였다. 나라가 서로 갈라지면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베엘제불도 자기와 반대되는 것을 모두 끊으면 제 나라를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가? 사탄이 저 자신과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기 시종들을 해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짓부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20절).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의 두 손이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손가락은 바로 아들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이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영 안에서 마귀를 쫓아내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인간 본성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 본성이 더러운 영들을 꾸짖음으로써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있다는 의미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21-22절) 그분은 세상의 지배자를 이기셨다. 그를 무릎 꿇리고 그의 힘을 빼앗은 다음,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내주셨다. 주님께서는 그 주인보다 더 힘센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막강한 힘을 누리며 본래 하느님의 것인 양들을 멋대로 다루고 자기 외양간에 가두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말씀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어 맞서시자, 그는 전 재산을 빼앗기고 그의 재산은 전리품으로 분배되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23절)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마귀의 손에서 구해 내고 그에게 속아 넘어간 이들을 그의 거짓에서 건져 내러 오셨기 때문이다. 사탄은 주님께서 구원하고 모으신 이들을 흩어버리려는 자이다. 그분께 대항하고 사악한 뜻으로 그분의 목적을 훼방하려는 그자가 어떻게 주님을 도와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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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서로 대조되는 두 존재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듣지 않아서 말이 끊기게 된 이스라엘’(독서)과 ‘말을 못하였지만 이제는 말을 하게 된 벙어리’(복음)가 그들인데, 이들을 연결시키는 주제는 ‘소통’입니다. 복음의 본문은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말을 못하게’ 된 것, 곧 듣지 못해서 말까지 못하게 된 것이 ‘악의 일’이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렇게 악의 일이 듣지 못하게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소통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일’은 듣게 하고 말하게 하여 소통을 되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일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악(베엘제불. ‘즈불룬의 바알’이라는 뜻)의 힘을 빌려 하는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논지로 답을 주십니다. 어떤 나라나 가정도 분열되면 망하는데, 만일 악의 최고 존재인 베엘제불이 또 다른 악을 쫓아낸다면, 그것은 악의 분열을 자처한 것이니 너무도 분명한 모순이 됩니다. 그러니 악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일은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소통이 되지 않는 상태,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소통을 무력화하는 것이 악의 일입니다. 만일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내 삶을 무너뜨리고 피폐하게 만드는 느낌이 든다면, 분열과 교란으로 우리를 붕괴시키는 악의 속성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선명하게 호소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소통하며 알려 주시는 길을 의연히 걸어갈 때, 우리는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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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탄>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루카 11,14-18ㄱ)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3)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신다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모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매일미사 책에서는 사람들이 ‘궁금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궁금해서 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한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였다.”라는 말은, “어떤 놀라운 기적 같은 것을 일으켜서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싫어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표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믿기 싫어서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심으로써, 마귀 때문에 말을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제대로’ 말을 하게 되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 싫어하는 자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그들은 여전히 말 못하는 자들로 남아 있습니다. 즉 그자들은 입으로 소리는 낼 수 있지만 제대로 된 말을 못하는 자들입니다. <입으로 소리를 낸다고 다 ‘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부정하는 말,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은, ‘말’이 아니라 ‘헛된 소리’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여전히 마귀의 지배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지 않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이라고 비방하고 중상하는 것은 ‘사탄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를 ‘사탄의 종교’라고 비방하고 중상하고 모독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자들이 사탄의 부하들이고 추종자들입니다. 사탄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하는 일을 모독하고 비방함으로써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것, 사탄은 바로 그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마귀들의 속성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 마귀들은 서로 갈라져서 싸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 즉 한 덩어리인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수가 모여 있어도 그것들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하나를 쫓아내는 것은 그것들을 모두 쫓아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2) 마귀들은 자살이나 자멸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들은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 멸망을 당할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서 하느님께 반항할 것입니다.
3) 마귀들은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것들은 선과 악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할 능력이나 자유가 없고, 그냥 ‘악 자체’인 존재입니다. 마귀들이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성령으로 위장하거나 천사로 위장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거짓 사도들’을 규탄할 때 이런 말도 했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13-15)
영화나 드라마 때문에 사탄의 모습을 흉악한 괴물 같은 모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탄의 겉모습은 사실은 천사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원래 천사였다가 타락해서 사탄이 된 것이고, 겉모습은 그냥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니 우리가 겉모습만으로 천사와 마귀를 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또 마귀가 하는 말만으로는 그 말이 선한 말인지 악한 말인지 식별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성령의 일과 악령의 일이 겉으로는 거의 비슷하게 보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식별해야 하나? 첫 번째 식별 기준은 ‘겸손과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가? 거스르는가?” 진리처럼 들리는 말을 해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말을 한다면, 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사탄의 소리입니다. 또 “교회의 교도권에 순종하는가? 거역하는가?”도 기준입니다. 순종한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남겠지만, 거역한다면 교회를 떠날 것이고, ‘구원의 길’에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이 바라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일치’이고, 악령이 하는 일은 ‘분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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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루카 11,1-13 참조) 이제 군중을 만나십니다. 앞서 제자들과 만남에서 기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아버지의 본질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다면, 이제는 반대자와 빚는 갈등과 깊어지는 적대감이 핵심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을 보여주시는데, 이에 군중은 세 가지로 반응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지만, 이어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기적을 일으켰다고 비난하거나 표징을 요구합니다.(11,14-16 참조)
이처럼 구마 기적은 한편으로는 신적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자와 논쟁을 벌이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기적을 지켜보고도 그가 누구이며 무엇을 행하였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는 예수님을 사탄의 하수인으로 설정하여 그분의 활동과 영향력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보여주신 기적 행위를 변호하십니다. 예수님 당신께서는 사탄의 하수인도 아니시고 마귀들을 제압하는 마술사나 마법사도 아니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는 기적 행위로 베엘제불의 힘을 뛰어넘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을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기적 행위를 통하여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역동적 현존을 체험하도록 초대합니다. 만약 누군가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베엘제불의 종으로 왜곡하지 않으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또 다른 표징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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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치유로 말 못 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됩니다. 병 들어 잃어버렸던 것, 훼손되었던 것을 치유하고 되돌려 주는 일은 새 창조, 곧 하느님의 일인데, 어떤 이들은 마귀짓으로 간주하고 어떤 이들은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들의 태도는 믿기 위함이 아니라 어떻게든 믿지 않으려는 안간힘에 가깝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말 못해 고생하던 사랑하는 형제가 놀랍게도 말을 하게 되었을 때, 함께 축하하고 기뻐한다면 이미 하느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고, 마귀짓으로 치부해 모두를 불안과 죄의식으로 몰아넣는다면 여전히 깊은 구렁 어두움 속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일을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지금 여기"는 하느님 나라도 될 수도 있고 지옥도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혹자는 예수님의 선한 기적을 차라리 마귀 짓으로 덮어버리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투명하게 바로잡히는 공평한 세상, 모두가 사랑으로 나누는 풍요로운 세상은 오히려 기득권이 제한될 뿐이라서, 세상의 부와 쾌락과 부정을 적당히 즐기면서 겉으로는 아직 하느님의 나라가 오지 않았다고 한숨을 쉬고 앉아 있는 편이 더 이롭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두려울 겁니다.
이미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아니 우리 인간의 심보를 너무도 잘 아십니다.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들어보면 불순종과 오만, 고집, 사악, 고약함 등 어찌나 적나라한지 민망하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예레 7,24)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수님께 마귀짓이라는 유다인이나,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번번이 곡해하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알맞은 표현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부르더라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예레 7,27) 이렇게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이 왜 박해받을 줄 뻔히 알면서 예언자들을 보내고, 사랑하는 외아드님까지 또 보내셨을까요. 과연 하느님께서는 무얼 보시고 그렇게 무모한 사랑을 계속하셨을까요.
친히 만드신 당신의 피조물, 당신의 백성을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베푸실 때 우리 됨됨이를 재거나 달거나 계량하지 않으시고, 하느님 당신 안에 있는 사랑만 보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안 들을 줄 알면서 계속 말씀하시고, 대답하지 않을 줄 알면서 계속 부르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그러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처럼 허공으로 흩어진 외롭고 공허한 하느님의 메아리는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매우 포용적이고 허용적인 모습을 보여주셨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루카 11,23) 이 단호함 안에 깃든 사랑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람, 사물, 사건, 역사의 방향성과 굴곡들을 하느님의 손길로 받아들일지 아닐지, "앞을 보고 달려갈지"(필리 3,13 참조) "뒤를 향할지"(예레 7,24 참조), 예수님 편에 설지 반대할지, 예수님과 함께 모아들일지 흩어버릴지 이제는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모호한 중간지대는 이제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을 쫓아내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이 기적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냐 아니면 마귀로부터 온 것이냐 논쟁을 시작하지요. 사실 식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도 능력의 측면에서는 하느님 못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 하신 일이라면 사랑 때문에 한 일이 분명할 것이고, 치유자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한 일이라면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가 들어가 있을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 할 겁니다.
말 못 하는 벙어리를 치유한 예수님은 사랑과 연민 때문이었고 '하느님의 손가락'(루카 11,20)이 하신 일임을 천명하고 있기에 이는 분명 하느님이 하신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많은 일도 하느님의 일이 될 수도 있고 마귀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식별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편가르기를 좋아합니다. 정치적으로도 보수냐 진보냐를 따지고, 경상도냐 전라도냐, 남자냐 여자냐, 부자냐 가난한 자냐, 사용자냐 노동자냐, 어느 학교 출신이냐, 종교가 뭐냐.……. 이렇게 네 편 내 편으로 갈라 어디에 속해야만 마음이 안정되나 봅니다.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는 사람을 회개자냐 아니냐로만 구분하였었지요. 우리는 하느님 편이냐 마귀 편이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네요. 사도 바오로도 제발 아폴로파니 바오로파니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지요.
벗님 여러분은 누구 편입니까? 더불어당 편입니까, 자한당 편입니까?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 편이고 복음 편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편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그를 도우려고 힘쓰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적은 노력과 정성이 좋은 결실을 보았다면 그 영광을 우리 것으로 삼으며 자랑하지 말고 크신 일을 이루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함께 모아들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루카 11,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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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 고약하게 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전해주며,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오히려 적대하며 악담을 퍼붓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두 개의 중심이 되는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말을 들어라”라고 할 때 '들어라'라는 동사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을 온전히 걸어라”라고 할 때 '걸어라'라는 동사입니다.
이 두 동사의 표본, 곧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걷는 것의 표본은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양 떼'입니다. 곧 양은 목자의 말을 알아듣고 그의 말을 따라 걷는 이의 표상입니다.
한편 그 반대의 표상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가 있습니다. 벙어리 마귀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따라 걷지 못하게 하고 말씀의 실현을 훼방하는 방해꾼입니다.
이 방해꾼은 제1독서에서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 그리고 화답송에서의 '무딘 마음'의 표상입니다. 곧 이들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말, 곧 자기 생각이라는 우상을 따라 걷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악담으로 대적하면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반박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이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이 단지 하나의 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가락, 곧 하느님 권능의 임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의 실현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아직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말씀을 듣고도 따라 걷지 못하게 하는 완고한 무딘 마음이 있지 않은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이 있어 주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따라 걷고 있지 않은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양 떼'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이로세”(시편 95,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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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 안에는 당신 형상의 빈자리가 있습니다.
오로지 임자이신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 계시오니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성전이오니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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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11,23)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많은 당나귀를 키우는 어느 농부가 당나귀 한 마리를 더 사기 위해 시장에 갔습니다. 그는 여러 마리의 당나귀 중에서 한 마리를 고른 후에 상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내가 이 당나귀를 집에 데려가서 부지런한지 게으른지 알아본 후에 게으른 녀석이면 바꿔 가도 되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상인의 허락을 받은 농부는 자기 집으로 당나귀를 끌고 와서 외양간에 넣었습니다. 그러자 새로 온 당나귀는 이리저리 당나귀들 사이를 거닐다가 그중 제일 게으른 당나귀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잠시 후 두 당나귀는 친해져서 사이좋게 먹이를 먹게 되었지요. 이 모습을 본 농부는 그 당나귀를 다시 상인에게 끌고 갔습니다. "이 당나귀는 게을러서 내게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니 다른 당나귀를 보여주시오" 그러자 당나귀 주인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지요. "아니 끌고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 당나귀가 게으른지 부지런한지를 안단 말이오?" 농부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아, 그 당나귀를 보고 안 것이 아니라 그 당나귀의 친구를 보고 알았지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가장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삶의 태도나 행동은 유유상종의 뜻처럼 비슷한 사람만 관계하고 교류하면서,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편을 가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모든 이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는데, 이런 예수님의 의도와 반대되는 생각과 행동이 바로 유유상종이며 끼리끼리만 살아가는 행위라고 저 역시도 동의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갈라진 세상인데,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마저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고, 파당을 짓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현실이며 사랑에 어긋난다고 느낍니다. 보편적 사랑이란 자기중심적인 기준이나 척도에 따라서 ‘좋아함과 싫어함’ 그리고 ‘잘함과 못함’을 구분 짓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11,23)라고 편 가르기를 하신 듯 말씀하신 배경은 바로 베엘제불 곧 악령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불편부당하게 사랑해야겠지만 ‘하느님과 마귀’,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문제에서는 분명하게 선택하고 확실하게 한 편을 미워하고 한 편을 사랑해야 하며, 한 편을 거부하고 한 편을 수용해야 하는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결코 양립하고 함께 수용할 수 없습니다. 중립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처럼 어쩔 수 없이 세상에 함께 공존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탄의 세력과 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분의 본질적 실존이 메시아라는 데 기인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나아갈 길을 보여주며 충만한 사랑을 누리도록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파괴하려는 힘들과 대적하기 위해 파견되셨습니다. 성서에서, 사탄은 하느님한테 나오는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활동하며, 이들은 인간을 유혹으로 이끄는 자들이며, 처음부터 ‘살인자’(요8,44 참조)였으며 한 ‘나라’ 곧 어둠의 세상의 지배자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어둔 상태, 죄의 상태에 있을 때입니다. 진리와 겸손 그리고 기도하는 영혼에게 사탄은 아무 힘도 쓰지 못합니다. 그의 힘은 인간이 죄를 짓는 만큼밖에 미치지 못하지만, 인간의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힘을 발휘하려고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육적-심리적-영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순간이 참으로 무섭고 힘들며 긴 시간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 앞에서 그 시간은 요한묵시록이 보여주듯이 금방 지나갈 것이기에 영원한 시간의 축복을 위해서라도 이겨내야 합니다. (묵3,11; 22,7 참조) 예수님은 사탄으로 생겨난 어둠의 세계를 하느님의 진리로 두루 비추셨고, 자기 탐닉과 고집과 미움으로 굳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녹여주셨으며, 베엘제불의 영향으로 황폐해진 마음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회복시키셨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탄 역시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더욱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와 증오 그리고 적개심을 일으켜 세우고,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며 자기기만에 빠지게 하여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적대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을 부추겨 그분을 거부하고 배척하며 짓밟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동요하지 않으시고 실패가 예상하더라도, 다만 하느님 아버지의 대자대비하심을 믿고 묵묵히 세상에 하늘나라 복음의 씨앗을 뿌리시는 어리석은 농부이십니다. 그분은 세상 사람들의 빛(요1,4)이었지만, 당신 사랑과 은총이 인간들의 완고함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예수님은 자기 자유로 “자기 목숨을 내놓습니다.” (요10,18) 예수님은 사람들의 속량, 구원을 위하여 당신 목숨을 사랑으로 십자가에 봉헌하심으로써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을 구원하시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세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11,21~22)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일한 메시지를 요한복음에서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 그리고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 것이다."(요12,31~32)라고 다른 음색으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마지막 기회를 엿보고 있던 적대자들과 맞서 가장 깊은 내면의 영의 힘으로 싸우십니다. 그분의 싸움을 감지한 모든 군중이 깜짝 놀라워하며, 그들 가운데 몇 사람(=마태오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11,15)라고 아우성 거립니다. 그런데 그들의 속내를 궤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사탄과 대적하고 있는지 너희는 보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어떻게 사탄이 내 안에서 활동하고 있고, 나의 활동이 그들의 나라에서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이냐?, 고 응답하십니다. 그렇게 가르치신 연후에 예수님은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11,2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과 싸우셨지만, 그 싸움은 영적 싸움인데, 그분의 싸움 무기는 바로 싸우지 않음으로써 싸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낮추시고 비우심으로, 자기를 내려놓고 스스로 나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육신으로 모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사랑으로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사탄과 마지막 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로써 사탄도 어찌할 수 없는 처절하고 전적인 자기 비움 곧 Kenosis로 더 이상 어둠이 아닌 빛이, 미움이 아닌 사랑이, 거짓이 아닌 참이, 죽음이 아닌 생명이 텅 빔 안에 충만한 새 생명으로 꽉 차게 되었으며 이를 죽음에 대한 승리 곧 부활을 이루셨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훌륭한 무사는 무용을 보이지 않습니다. 훌륭한 전사는 성내지 않습니다. 훌륭한 승리자는 대적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고용인은 스스로를 낮춥니다. 이를 일러 ‘겨루지 않음의 덕不爭之德’이라합니다. 이를 일러 ‘사람 씀의 힘用人之力’이라 합니다. 이를 일러 ‘하늘과 짝함配天’이라 하는데 예부터 내려오는 지극한 원리입니다.』(68장) 예수님은 이렇게 싸우지 않으시고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셨으며, 이렇게 우리 또한 당신이 보여주신 삶의 방법으로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길 바라십니다. 예레미야의 말처럼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예7,24)라면, 이제는 어둠이 아닌 빛을, 거짓이 아닌 참을, 죽음이 아닌 생명을 향해 길을 걷도록 초대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등불 삼아 꿋꿋이 나아가야 할 것이며, 제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분명히 어둠의 자식이 아닌 빛의 자녀이지만 사탄이 좋아하는 편 가르기에 편승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통회합니다. 이젠 다만 구원의 바위이신 당신 앞에 서서 회피하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 어둠의 세력에 당당히 맞설 수 있도록 당신의 성령을 보내 주십시오. 제 마음을 비워 그 빈 자리에 당신의 성령께서 자리 잡고 머물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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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을 해 보십시오. 아인슈타인이 지금 이 자리에 강의하러 온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 강의를 듣겠습니까? 또 이 강의를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까요? 지금이야 워낙 유명한 분이라서 많은 사람이 강의를 듣기 위해 올 것이라고 예상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을 때는 교수로서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너무 아는 것이 없어서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물리학계의 주목받는 샛별이었지만, 수강 신청자는 겨우 세 명이었고 다음 학기에는 신청자가 아예 없어서 그 강좌가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통해 프린스턴 대학 총장은 아인슈타인의 교수 기량이 부족하다면서 정교수 직위를 주지 않으려고도 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 잘 가르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자기 역량을 드러내는 분야가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실력 없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처럼 실력은 뛰어나지만, 단지 가르치는 것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이런 식입니다. 하나의 모습으로 전체를 평가하는, 그래서 더 중요하고 큰 것을 보지 못합니다. 하느님 일 역시도 전체를 보지 못하기에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에 바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마귀가 나가고 이제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군중 중의 몇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이 말을 듣고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런 표징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으로 알겠다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도 하느님의 커다란 표징입니다. 당시에 벙어리 마귀는 하느님만이 쫓아낼 수 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못 하게 하는 벙어리 마귀이기에 하느님만이 쫓아내서 당신 말씀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편을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마귀를 쫓아내는 어리석은 행동들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단순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에 관한 부정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주님의 반대편에 서서 반대하고 흩어 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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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느새>
루카 11,14-23 (예수님과 베엘제불)
그때에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어느새>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3)
당신을
바라보다
어느새
당신과 함께
바라봅니다
당신과 함께
바라보다
어느새
당신이 되어
바라봅니다
당신께
걸어가다
어느새
당신과 함께
걸어갑니다
당신과 함께
걸어가다
어느새
당신이 되어
걸어갑니다
당신을
믿다가
어느새
당신과 함께
믿습니다
당신과 함께
믿다가
어느새
당신이 되어
믿습니다
당신을
바라다가
어느새
당신과 함께
바랍니다
당신과 함께
바라다가
어느새
당신이 되어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하다
어느새
당신과 함께
사랑합니다
당신과 함께
사랑하다
어느새
당신이 되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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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의 어중간은 없다>
‘두 개의 깃발’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깃발이고, 하나는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깃발입니다. 둘 중에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선택하면 부귀영화나 명예, 매혹적이고 달콤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가난, 업신여김과 모욕, 때로는 박해와 순교까지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선택의 삶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묵시록을 보면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 11,17)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고집 때문에 사실을 바꾸고, 때로는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고, 진실에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마귀의 패거리로 몰아붙이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고함이 쌓이면 마음속에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거짓 속에 묻힌 마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가끔 세상의 정치적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말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여당이십니까? 야당이십니까?” 그러면 말합니다. 저는 ‘천주당’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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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님>
“늘 예수님 편에 서자”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 95,7ㄹ과 8ㄴ)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이자 사순시기 내내 계속되는 새벽 성무일도 시 초대송 후렴입니다. 사순시기 낮기도 독서 시 계응송 역시 늘 동일합니다.
“주여,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주소서.”(시편 51,12)
어제 삼종기도 후 교황님의 짧은 강론도 멋졌습니다. “겸손으로 교만과 싸우자(Combat pride with humilty)”는 일곱 번째 강론으로 이제 다음번 허영 하나만 남았습니다. 겸손한 마음 역시 어진 마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 중 ‘배우다’, ‘섬기다’에 이어 ‘어질다’입니다. 공자의 인(仁)이 바로 어질 인(仁)자입니다. 마음이 어질다는 마음이 “좋다, 착하다, 순하다, 슬기롭다, 너그럽다, 관대하다, 유연하다, 현명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모든 좋은 덕목을 다 담고 있는 “어질다”라는 우리 말이 참 좋습니다. 오늘의 다산 어록도, 논어에 나오는 말씀도 어진 사람에 대한 언급 같습니다.
“타인의 결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감수성이라고 한다. 감수성은 지식이 아니기에 남에게 귀 기울이는 태도로 나타난다.”-다산
새삼 남에게 귀 기울이는 경청의 자세가 얼마나 본질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들음의 수용적 사람들이 어진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예를 지켜서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음악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논어
공자가 강조한 것 역시 호학(好學)과 더불어 인(仁)입니다. 결국 공부의 목적도 어진 사람이 되는데 있음을 봅니다.
얼마 전 주고받은 결코 잊지 못할 고마운 마음 가득 들었던 어느 분과의 아름다운 대화 내용과 제 자작시를 소개합니다. 지금 남도(南道) 섬진강 부근에는 매화꽃이 한창이랍니다.
-“섬진강 매화마을입니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이 생각납니다. 봄철이 유난히 아름다운 섬진강의 그 자체가 시이지요!”
사실 금수강산(錦繡江山)이란 말도 있듯이 봄철의 한반도는 어디나 아름다운 시적(詩的) 풍경입니다.
“내년 봄에는 신부님 모시고 매화 가득한 아름다운 섬진강에 봄 여행하고 싶습니다. 봄의 섬진강은 항상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주고받은 대화에 즉시 떠오른 “산(山)과 강(江)”이라는 자작시에 만족했고 위로받았습니다. 이 또한 어진 마음의 표현이겠고 참으로 정주 영성의 절정이 아니겠나하는 자긍심(自矜心)도 들었습니다.
“아니
산이 산에 갈 수가 있나?
강이 강에 갈 수가 있나?
나 머물 때는 산(山)이요 움직일 때는 강(江)인데
나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한결같이 임기다리는 산인데
나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끊임없이 임향해 흐르는 강인데
늘 임을 만나 임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인데
어찌 산이 산에 강이 강에 갈 수가 있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님이 자주 사용했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부러워했던 말마디 “Enough!(충분하다!)”를 저 또한 좋아합니다. 매사 지족(知足)의 삶을 사는 넉넉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Enough(이너프)의 사람들’을 감히 누가 유혹할 수 있을는지요!
밖으로는 “정주의 산”처럼,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생명의 강”처럼, 산과 강의 정주영성을 살아가는 참으로 깊고 어진 사람들이 이상적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와 루카복음 말씀을 읽으며 묵상하다 보니 떠오른 예화와 시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흡사 무지의 악에,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삶의 중심인, 참으로 어지신 예수님에게서 멀어질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무지의 악마입니다. 베드로의 예에서 보다시피 사탄이, 악마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주님을 떠날 때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이런 이들은 바로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이들입니다. 다음 실감나는 예레미야서의 묘사가 그대로 우리 인간의 부정적 단면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깊은 좌절감의 표현입니다. 예나 이제나 우리는 변함없이 후안무치, 적반하장, 내로남불 등 부정적 모습들을 얼마나 많이 목격하는지요. 사람이라 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는 이런 이들이 악마요 사탄입니다. 악에 사로잡힌, 악에 포획된 이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에 대한 주님의 간절한 회개에의 촉구입니다. 사순시기 우리에게 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구제불능의 마음이 딱딱하고 목이 뻣뻣한 무지한 이들은 오늘 복음에서도 계속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특징은 따뜻함과 부드러움이요 죽어있는 죽음의 특징은 차거움과 딱딱함입니다. 흙도 마음처럼 살아있는 흙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살아있다 하나 죽어있는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마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곡해하는,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이들이 바로 마음이 완고하고 목이 뻣뻣한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영리한 마귀들이 결코 분열되는 일은 없으니 사탄의 힘을 빌려 사탄을 쫓아내는 일은 어불성설임을 천명하시며 당신의 구마행위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능력에 기인함을 밝힙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 악마를 포박할 수 있는 가장 힘센 자로 당신을 묘사합니다. 이미 이사야 예언서(이사 49.24-25)에서 예고되는 현실입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주님만이 우리를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출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어둠의 세력을 축출할 수 있는 분은, 우리의 희망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
우리의 희망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또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늘 당신 편에 설 것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과연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구원 역시 선택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단호히, 결연히 늘 사탄이 아닌 주님을 선택하여, 흩어버리는 분열의 삶이 아닌 모아들이는 일치의 삶을 살 때, 또 온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따르는 삶을 살 때, 참으로 온전한 참나의 자유인의 삶일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며 바치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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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불편부당과 부화뇌동>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불편부당(不偏不黨)과 부화뇌동(附和雷同).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불편부당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공동체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화뇌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도 공동체를 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불편부당하지 않으면 공동체가 깨지는 것을 보겠습니다. 불편부당이란 어느 편에서 서지 않고 어느 당파에 속하지 않는 거지요.
그런데 한 공동체에서 누가 한편에 서고 누가 다른 편에 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 보듯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주도적으로 그리고 나 중심으로 편 가르기와 줄 세우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편으로 만드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유력한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은 비단 다른 편과 내 편을 가르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진리의 편에 서고 주님 편에 서야 할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 편 네 편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하느님 편만 있어야 하는데 내 편에 서게 함으로 그를 하느님 편에 서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함을 보겠습니다. 남을 내 편으로 만들지 않을 뿐 아니라 나도 어느 편에 서지 않는 것을 말함입니다.
부화뇌동이 주도적으로 편 가르기와 줄 세우기를 하는 것보다는 덜 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공동체를 깨는 것이기에 못지않게 악하고, 무엇보다도 줏대를 잃고 악한 일에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기에 딱한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뇌동(雷同)이 의미하는 바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뇌동이란 천둥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놀라 같이 움직이는 형용이고, 그래서 뇌동하지 말라고도 하지요.
이는 예기(禮記)에 聽必恭 毋勦說 毋雷同. 곧 남의 말을 공손히 듣되,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무조건 따라 하지 말라고 한 말과 맥을 같이하지요
그런가 하면 군자의 태도와 관련하여 논어에는 이런 말도 나옵니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곧 남과 화합을 하나 똑같지는 않다는.
그러니까 진리에 어긋나는 말을 누가 하면 화이부동하고 부화뇌동하지 않아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군자를 넘어 성인 곧 진리 편에 서고 하느님 편에 설 사람들입니다. 확실하게 주님 편에 서야 하지 어정쩡하게 있다가 부화뇌동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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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루카11,23)
<두 부류!>
오늘 복음(루카11,14-23)은 '예수님과 베엘제불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말을 못 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내 편에 서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고 구세주이신 하느님이십니다. '베엘제불'은 사탄의 우두머리요 마귀의 우두머리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참조) 곧 '회개하는 이들과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두 부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회개하는 이들'은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믿고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고, 예수님 편에 서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나는 어느 편이고,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가?'
오늘 독서(예레 7,23-28)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예레 7,23)
신약성경 필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요한 묵시록을 필사하고 있는데, 내일까지 필사하면 끝날 것 같습니다. 장차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인 요한 묵시록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녀들,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자녀들, 그래서 언제나 주님의 축복 안에 머물러 있는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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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uYjxNfxe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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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루카 11, 23)
하느님의 편에
서서 하느님을
따르는
모든 분들의
미소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빠져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양심성찰입니다.
주어진
삶으로부터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웁니다.
자기성찰을
건너뛰며
만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하느님 상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과 함께
자라나야 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자라나지 않으면
우리는
흉내만 낼 뿐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기에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알게 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빼앗고
쫓아내고
흩어버리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은
늘 흩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삶의 반대말은
삶을 내어드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믿음입니다.
포용과
관용의 십자가가
주님과 함께
사람들을
모아들입니다.
신앙의 이방인이
되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자기성찰의
표징이
마침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은총의 삶이 되듯
역방향이나
역주행으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지를
성찰하는
사순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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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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