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삽화 - 정 호 경(鄭 鎬 暻) 수필
위암수술로 일곱 시간의 마취에서 간신히 깨어나 두 번째의 인생을 맞이한 입원실의 창 밖에는 10월도 중순을 넘은 희미한 볕살을 받아 가녀린 가을꽃들이 소슬한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다. 대수술을 받고 나면 흔히들 인생관이 바뀐다고 했는데, 그것은 역시 나에게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사소한 일에도 괴롭고 짜증스러웠던 지난날의 일상사가 수술 후 2·3년 동안에는 그저 아름답고 평화롭게만 느껴져 나도 이제는 부처님 가까이 다가와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늦게나마 삶의 보람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그 후 몇 년이 더 흐르고 건강도 얼마큼 회복이 되자 다시 옛날의 세속으로 되돌아가버린 요즘의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이승의 번뇌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어찌할 수 없는 것임을 새삼 느껴, 저물어가는 가을이 가뜩이나 어지러운 내 마음을 쓸쓸하게 만든다. 언젠가는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어느 낚시터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되도록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추수를 한 뒤의 들녘은 한층 쓸쓸해 보였고, 내 낚싯대 끝에 붙어 졸고 있는, 황토색으로 퇴색한 고추잠자리는 시골의 가을 정취를 더욱 돋우어주고 있었다.
붕어들의 입질이 뜸한 오후 한 시경, 싸가지고 간 점심도시락을 먹을 양으로 허리를 펴고 일어서면서 무심코 바라본 옆자리는 분명한 여자였다. 가족과 함께 소풍 삼아 나와 앉아 있는 여자들은 더러 보았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채비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사건이었다. 흘깃흘깃 곁눈질을 하는 내 행동을 눈치 챘는지 옆자리의 그 여인은 깊숙이 눌러 쓴 밀짚모자를 걷어 올리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입질이 없지요?”나는 분명히 여자니까 그런 눈빛으로 자꾸만 곁눈질을 하지 말라는 뜻인 듯했다. “예, 뭐 별로…”
오히려 내 쪽에서 당황했다. 낚시꾼은 생면부지인 사람도 한두 번 만나면, 그냥 친구가 돼버린다. 오후 네 시쯤 돼서 시골 시외버스를 타려고 낚시가방을 메고, 그 여인과 함께 신작로를 향해 논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혼 초부터 남편을 따라 자주 나왔었지요. 그이는 낚시광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왜 혼자서…?” “퇴근길에 남편은 그만 교통사고로…”
아직 서른도 채 안 돼 보이는 젊은 여인의 얼굴에는 물안개 같은 우수가 서려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혼자 와 있으면, 더욱 외롭지 않느냐는 나의 말에 엷은 미소를 머금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젠 그이의 낚싯대를 제가 물려받은 셈이지요. 그이가 생각나고 외로울 때면, 불쑥 이곳을 찾는답니다. 들꽃처럼 피었다가 또 그렇게 시들어가는 것이 인생 아니겠어요. 그이 따라 처음 왔을 때도 바로 추수 후의 들녘이 텅 빈, 늦은 가을이었지요. 처음 한두 번은 물 아래 어른거리는 그이의 얼굴 때문에 무척 괴로웠지만,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히려 그이와 소곤소곤 조용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니까요.”
“다음 주말에도 오시나요?” 내가 물었다. 신작로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낚시터에는 한두 사람이 남아서 낚싯대를 거두고 있는 뒷모습이 기어내리는 산그늘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출처: <선選수필> '겨울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