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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뭐야?"
"뭐가요?"
열린 방 문에 기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멀뚱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서 있는 시연과 눈이 마주치자 윤성은 화들짝 놀랐다. 언제부터 저 곳에 서 있었던 건지, 어디서부터 통화 내용을 엿들은 건지, 지금 저 표정은 도대체 뭘 의미하는 것인지 당황스럽기만 하다.
"거기서 뭐하냐구?"
윤성의 물음에 멀뚱하니 서 있던 시연이 긁적긁적 머리를 긁적이더니 뭔가 곤역스럽다는듯 미간을 찌푸렸다. 윤성은 슬쩍 자신의 차림새를 훓어보았다. 촌스러운 셔츠의 단추를 다 여미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볼쌍사나운 모습은 아닌데, 혹시 통화내용를 엿듣고 그러는 건가? 그때 시연이 손에 들린 옷을 불쑥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아저씨 옷이요. 내가 세탁을 했는데......."
"옷?"
그러고보니 어색하니 서 있는 시연의 손에 윤성의 티셔츠가 들려있다. 윤성은 시연이 내민 옷을 받으며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어색하니 시선을 피하는 모양새가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윤성은 자신의 옷을 펼쳐 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걸 그냥 집에서 세탁 했단 말야?"
"네?"
"라벨에 붙은 세탁 방법 같은거 볼줄 모르나?"
"당연히 볼줄 알죠. 근데 경찰도 안된다, 119도 안된다면서 찢어지고 피 묻은 옷을 그냥 세탁소로 보내요?"
"아! 하긴 그렇겠군."
"울 삼푸로 빨았으니깐 줄진 않았을 거예요. 근데 찟어진 상태가 영 말이 아니라서...."
그러고보니 그녀의 말처럼 티셔츠는 옆구리 부분이 심하게 찟어져 있었다. 옷을 살펴보던 윤성이 다시 입을 생각이 없는지 방 구석에 놓인 쓰레기통으로 옷을 던져버린다. 맘에 들지는 않지만 당분간은 이 촌스러운 옷을 입고 있어야겠다.
"그냥 버려요?"
"저렇게 많이 찟어진 줄은 몰랐네."
"어........그게, 사실은 제가 좀 더 찟었어요."
"뭐? 내 옷을 찟었단 말야?"
"그럼 어째요? 피가 덕지덕지 상처에 말라붙어있는데, 찟어야지 별수 있어요? 꽤 비싸보여서 수선하면 입을수 있을까하고 빨아본 거예요.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버리는 건데, 괜히 시간 낭비, 물 낭비 했네."
시연의 말에 윤성은 새삼 볼품없이 쓰레기통에 처박힌 티셔츠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가위로 옷을 찟었다니, 저게 얼마짜린데, 게다가 옷을 찟는것조차 몰랐을 정도로 의식을 잃고 있었다니, 본의는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많은 헛점들을 보여준 것 같다. 아무튼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을 계속 입고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윤성은 시연에게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나가는 길에 티셔츠 두어장 사다줘. 옷 보는 센스는 있는 편이지? 난 취향이 좀 까다로운 사람이 되서 말야. 지금 이 스타일은 계속 참고 입고 있기가 힘드네."
"그 옷이 어때서요? 이쁘기만 한데."
"취향이 참 톡특하군. 근데 내 취향이랑은 전혀 안 맞아서 말이지."
"헐! 무슨 남자가 옷 타령을, 그냥 아무거나 입으면 될 것이지. 나 남자 옷 사 본 적 없어요."
"실루엣에 가서 사 와!"
"실루엣?"
"설마 뭐냐고 묻는 건 아니겠지?"
"당근.......알죠. 아무튼 저녁상 차려놓고 나갈테니깐 알아서 드세요. 혼자 있을수 있죠?"
가볍게 손을 들어 대답을 대신하는 윤성이 다시 자리에 눕는걸 보며 그의 카드를 들고 방을 나온 시연은 시큰둥한 얼굴이다. 실루엣이라니 들어 본 것도 같은데, 뭔 남자가 옷 상표를 따져가면서 멋을 부리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다. 더구나 큰 맘 먹고 애지중지했었던 아빠 옷까지 빌려줬더니 스타일이 어쩌구저쩌구 하는게 아직 배가 덜 고픈 모양이다."야, 박 시연! 왜 입이 댓발은 나와 있는 거야?"
"저 아저씨가 옷 사다 달래. 울 아빠 옷 스타일이 영 아니라구 실루엣인진 뭔지 그런데 가서 사오래."
"실루엣? 그거 우리 일하는 커피점 옆에 있는 거잖아. 옷값이 엄청 비싸던데........우와~ 저 양아치 아저씨 완전 된장남이구만."
"울 아빠 셔츠도 비싼건데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나 뭐라나. 남의 옷 빌려입는 주제에 아무거나 입을 것이지 집에만 있을거면서 무슨 패션 쇼를 하나, 완전 배가 불렀어."
"살만한가보네. 옷 타령하는거 보니깐."
"확 쫓아낼까보다."
"야! 그랬다가 불법 의료행위했다고 신고하면 어쩌려고..... 아무튼 나가자. 저녁상은 차려놨으니깐 알아서 먹겠지?"
"말해놨어. 먹으라고."
"이거 뭐 끼니 때마다 꼬박꼬박 차려다 받쳐야하니, 완전 삼식쉐끼가 따로 없구만."
"어서 가. 사흘이나 빠졌는데 이러다 진짜 짤리면 큰일이야."
"누가 널 짤라? 어디가서 이렇게 이쁜 알바생을 또 구할수있다구."
"아무튼 가자."
코트깃을 단단히 여미며 희진과 함께 집을 나서는 시연은 아직 움직임이 불편한 윤성이 맘에 걸리는지 연신 고개를 돌려 집쪽을 쳐다보게 된다. 저녁 밥상을 차려놓기는 했지만 영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움직일수는 있다지만 그래도 아직 아픈 사람인데 옆에서 돌봐주는게 정상이겠지만, 벌써 사흘째 도서관도 가지못한채, 알바도 쉬었다. 굳이 도서관을 가지않더라도 집에서 공부는 할수있는거지만 알바는 아니다. 대학 입학하면서부터 쭉 해오던 놓치기 아까운 일자리이다.
두 사람이 일하는 곳은 압구정도 한 복판에 위치한 대형 커피 전문점으로 다른 곳보다 보수가 상당히 센 편이다. 보수가 센 만큼 알바생을 뽑는 조건도 까다로웠다. 물론 그 조건 중 최고는 비주얼! 아무튼 적지않은 사건을 겪었음에도 이 커피 전문점에서 꽤 오랜기간동안 짤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던건 시연의 비주얼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까다로운 심사조건을 통과한 알바생들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비주얼 덕분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일대에서 시연은 꽤 유명인사로 통하고 있었다. 꽤 많은 압구정동의 귀하신 도련님들이 대시를 해왔고, 시연의 대답과는 상관없이 안하무인 도련님들의 일방적인 작업으로 인해 몇번의 사건, 사고가 터지기도 했었다. 사흘전 윤성을 공터에서 주워오던 그날도 커피 전문점에선 가끔 볼수있었던 광경이 연출되었었다.
"현민인가 뭔가하는 그 쉐키! 어제도 너 찾아왔었어."
"그래?"
"정신나간 새끼가 지 엄마가 와서 뭔짓을 하고갔는지는 모르고 완전 꿈 속을 헤매고 있는것 같더라. 그 자식 말이 니가 자기때문에 상처 받아서 그래서 일도 안나오고 그러는거 같다고, 너 꼭 만나서 오해를 풀고 싶단다."
"그래........"
시연의 반응이 어째 심드렁하다. 희진은 아까부터 자신이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시연의 낌새가 수상하다. 그러고보니 버스 차창 넘어로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시연은 아까 집에서 나올때부터 기분이 다운 된 듯 보였다.
"박 시연, 너 왜그래?"
"뭐가?"
"아까 집에서부터 다운됐잖아. 그 삼식쉐키랑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무슨.....근데 희진아."
"응?"
"아빠 옷........괜히 줬나봐."
"뭐?"
방문을 여는 순간 아빠가 앉아 있는 줄 알았다. 항상 그랬던거 처럼 그 방, 그 자리에 그 옷을 입으신 아빠가 앉아있는거라 착각했다. 지난 2년간 꿈에서도 보고 싶었던 엄마, 아빠였는데, 꿈에서 조차 단 한번도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었는데 오늘 그 방 문을 여는 순간 거기에 아빠가 앉아있었다.
"시연아, 너 혹시......."
"착각한 거 알아. 그 사람이 아빠 옷을 입고 있어서 내가 잠깐 착각한거야."
"원래 아저씨, 아줌마 방이였잖아. 그동안 내내 비여있었는데 그것도 어른 남자가 아저씨 옷을 입고 있었으니 착각 할 수도 있는거지. 그래서 아까부터 우울모드였어? 난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주책없이 고삐리 쉐키 얘기나 하구......."
"괜찮아. 금방 괜찮아 질거야."
"당장에 옷 사다주자. 아저씨 옷 더 이상 못입게."
"그래. 그러자. 근데 너 아까 무슨 말 했어? 현민이가 찾아왔다구?"
"됐어. 그런 자식은 그냥 무시해. 얼마 안 있어 제 풀에 나가 떨어질거야."
"그래, 그럴거야."
한숨을 내쉬는 시연을 보며 희진은 불안하다. 여지껏 보았던 청담동 도련님들과는 달리 이번엔 좀 어려운 상대가 들러붙은것 같다. 시연에 대한 집착이 여느 놈팽이들과는 달라보였기에 희진은 내심 불안하기만 하다.
서너달 전부터 시연이 알바를 하는 시간에 열심히 출석 도장을 찍는 남자가 있었다. 시시껄렁하니 농담을 건네오던 도련님들과는 달리 거의 매일이다시피 찾아와 시연을 훔쳐보곤 했다. 그러다 한달전쯤인가부터 어렵게 한마디씩 말을 걸어온 조금은 앳된 얼굴의 그는 자신을 김 현민이라 소개했다. 그는 올때마다 장미꽃 한송이를 건네주고, 초콜릿 조각 케잌을 전해주었다. 시집을 건네주기도 하고, 자신이 적은 시라며 쪽지를 건네주기도 했다. 길가다 생각나 샀다며 수줍게 머리핀을 내밀기도 했었다. 몇 백 만 원씩하는 명품백을 안겨주며 하룻밤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도련님들과는 달리 시연은 그런 그가 순수해 보였다. 큰 호감은 없었지만 딱히 싫지않은 사람이었다. 아무튼 현민은 시연의 대답과는 상관없이 매일이다시피 그녀의 근무시간에 출석도장을 찍듯 그렇게 나타나 커피를 마시며 일하는 시연을 훔쳐보곤 했었다. 하지만 윤성을 주워온 그 날, 언제나처럼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매장으로 들어간 시연 앞에 순진한 눈빛의 도련님 대신, 커다란 물방울 다이아반지를 낀 화려한 사모님이 나타나셨다. 우아하게 돈 봉투를 내민 사모님께서는 더 이상 자신의 아들 김 현민이 시연과 연관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말씀하셨고, 시연은 두말않고 사모님이 내민 돈 봉투를 받아넣었다. 그리고 사흘동안 가게에 나가지 않았었다.
"괜찮은 거야?"
"이런 것도 몇 번 겪다보니 면역이 생기네."
"그렇긴한데 그래도 옆에서 보고 있으면 항상 아슬아슬해."
희진은 시연을 보면 항상 마음이 아팠었다. 원하던 대학 입학의 기쁨도 잠시, 뜻밖의 교통사고로 양친을 한꺼번에 잃어야 했던 시연이다. 어려서부터 어딜가든 눈에 띄는 예쁜 외모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곤했던 시연은 그 예쁜 외모 덕택에 꽤 많은 시급을 받으며 압구정 한복판에 있는 커피 전문점에서 알바를 시작했고, 그 일은 대학을 다니는 내내 계속되고 있었다. 문제는 시시때때로 작업을 걸어오는 돈 많고 시간 많은 귀하신 도련님들이었다. 알바를 시작한 이후로 끊임없이 대시를 해오는 도련님들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곤역을 치른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시연의 외모에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며 명품 가방을 선물하거나 제법 비싸보이는 목걸이며 귀걸이를 선물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주체할수없는 시간과 돈을 뒷배경으로 잠깐 즐기는 파트너정도로 시연에게 다가올뿐 그들의 진심을 느낄수는 없었다. 게중엔 진심으로 시연을 좋아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런때면 귀신같은 그들의 보호자라는 사람들이 목에 깁스라도 한듯이 뻣뻣한 태도를 일관하며 돈 봉투를 던져주며, 고상한 말로는 관계를 정리해라였고, 싸가지없는 말로는 이거먹고 떨어져라였었다. 어느 개그맨이 여자는 어젠 어느때고 예뻐야한다고 했다지만 그런 상황을 옆에서 보고있던 희진의 생각으로는 어쩌면 너무 예쁜 미모도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에겐 시련이 될수있다 느껴지곤 했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내리자. 다 왔어."
시연의 말처럼 어느새 버스는 그녀들의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폴짝 버스에서 뛰어내린 시연은 희진의 팔짱을 끼고선 2년이 넘도록 알바를 하고 있는 커피점으로 향했다. 윤성의 옷을 사기위해 좀 일찍 집을 나섰던 시연은 그녀들이 일하던 커피 전문점 옆 가게에서 희진의 말처럼 윤성이 말한 실루엣이라는 옷가게를 찾아냈다. 2년을 넘게 일을 했지만 이곳에 이런 고급스러운 가게가 있다는 걸 몰랐었다. 아니 관심이 없었었다. 이곳 압구정에 위치한 모든 가게의 물건들은 시연이나 희진의 처지와는 맞지않게 너무나 고급스럽고 비쌌기에 아예 관심을 두지않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시연과 희진은 옷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모던한 스타일의 인테리어가 한눈에봐도 고급스럽기만한 그곳에서 윤성이 말한 옷 몇벌을 살 작정이다. 곧 다가오는 직원을 의식하며 이리저리 옷을 골르던 시연은 옷에 붙은 가격표를 보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수밖에 없었다.
"야! 희진아, 이거 봤어?"
"내가 말했잖아. 여기 옷 비싸다고."
"아무리 그렇지만 어떻게 티셔츠 하나 가격이 내 한달 알바비보다 더 비쌀수가 있어? 이 옷은 뭐 금실로 만든거라니?"
"하여튼 촌스럽기는.....다 상표값이야."
"우와~ 기절하겠네."
"근데 은근 기분 좋지? 우리가 언제 이런 비싼 가게의 손님이 되보겠니? 비싸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디자인들도 다 멋있고 괜찮은거 같아. 남대문이랑은 느낌부터가 다르거 같아. 안그래?"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거구만. 근데 너, 여자 옷은 왜 보는거야?"
"기분도 못내니? 아무튼 우리 옷 살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 쌈쌈하다."
"어휴~난 손 떨려서 결제 못 할거 같다. 어쩜 가격들이 잌!!!!"
말 그대로 가슴 떨리는 가격에 놀라며 시연은 티셔츠 두장을 골랐다. 그리고는 윤성에게서 받은 카드를 내밀었다. 시연은 혹시 저 카드가 도난 카드라거나, 한도 초과, 아니면 정지된 카드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심정으로 계산을 하는 직원의 손을 긴장한 채 응시하고 있었다. 다행이 아무런 일 없이 결제가 이루어지는걸 보며 '휴~'하고 저도 모를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는 시연이었다. 카드 주인이 부탁한건데 왜 저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건지 모르겠다는 희진의 핀잔에 어깨를 으쓱해보인 시연은 옷이 든 쇼핑백을 들고는 그렇게 온몸이 긴장되는 가게를 빠져나왔다.
"어휴~ 심장 떨린다. 왜 꼭 도둑질하는 기분이 드는 거니?"
"하여튼 간댕이가 멸치대가리라니깐."
"그게 아니라 너무 비싸니깐 그렇지. 더구나 카드도 내게 아니고...."
"주인이 부탁했는데 뭐가 문제야? 고새 도난신고라도 했을가봐?"
락카룸에서 혹여 방금 산 옷을 누가 가져가버리면 어쩌나하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시연과 희진이 홀로 나와 카운터에 자리를 잡을 때였다. 덥썩 손목을 잡는 손길에 놀란 시연이 고개를 돌렸을 때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의 현민이 서 있었다. 사흘 내내 시연이 없는 가게를 찾아왔었다는 희진의 말이 사실이었나보다.
"나 좀 봐!"
"뭐하는 거예요? 지금 근무시간이예요."
"이까짓것 몇푼이나 받는다고, 당장 집어치워! 내가 너 책임질테니깐!"
흥분한듯 언성을 높이는 현민을 보며 시연은 무척이나 놀란듯 눈이 커졌다. 여지껏 보아왔던 현민의 모습이 아니었다. 수줍은 순수청년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전혀 게의치 않고 제멋대로 소리를 지르는 안하무인의 도련님이 서 있다. 갑자기 돌변한듯한 현민의 태도에 당황한 시연은 매니저에게 양해를 구했다. 고개를 숙이며 양해를 구하는 시연을 매니저는 언제나 그렇듯 어쩔수 없다는듯 고개를 끄덕여준다. 가끔 있는 일이었기에 그리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현민의 손을 뿌리치고 구석진 테이블을 찾아 자리를 옮긴 시연은 빨리 지금의 상황을 끝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빨리 말해. 좀 있으면 바쁠시간이야."
"우리 엄마가 찾아왔다면서, 우리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내 뜻 아니야. 그건 그냥 엄마가...."
"너, 아직 고등학생이라며?"
"이제 아니야. 수능도 봤구, 이제 대학생 될거야."
"이제 대학생이 된다고 해도 나 너보다 3살이나 많아."
"그게 뭐 어때서? 중요한 건 내가 널 많이 사랑한다는 거야."
"넌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난 아니야. 그러고 싶은 마음 없어. 너 순수해보여서 잠깐 호감이 갔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니네 어머니 눈까지 속여가면서 널 만날만큼 좋아하지 않아. 너두 마찬가지야. 대학에 들어가면 니 또래 예쁜 여학생들 얼마든지 많이 만날 수 있을거고 그럼 나 같은 건 생각도 안날거야. 그러니깐 이젠 여기 오지마."
"아니야. 대학이 아니라 세상 어떤 예쁜 여자들도 난 싫어. 내가 택한건 너야. 내가 택했으니깐 넌 내꺼야."
"니가 택하면 다 니꺼야?"
"그래. 아버지가 그랬어. 한번 맘에 담은 여자는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니가 포기를 하든 안하든 상관없어. 난 너보단 니 엄마가 준 돈이 더 가치 있게 느껴져. 니네 엄마가 나한테 돈 줬다고 안그래? 나 그 돈 받고 너랑 관계 정리하기로 약속했어. 그 약속 지키고 싶으니깐, 다시는 여기 오지마."
시연의 입에서 나온 돈 얘기에 현민의 얼굴이 이그러졌다. 모욕을 받았다 생각하는건지 울그락붉그락 변하는 얼굴빛이 안되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시연으로써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런 현민을 남겨둔 채 자리에서 일어난 시연이 다시 카운터로 돌아와 커피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희진은 현민이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시연에게로 달려들것만 같아 아슬아슬하기만하다. 희진은 힐끔힐끔 현민의 동태를 살폈다. 한동안 그렇게 앉아있던 현민이 벌떡 일어나 거칠게 문을 열고는 나가버리는것을 보고야 알듯모를듯 한숨을 몰아쉴수 있었다. 담담한 얼굴로 커피 주문을 받고있는 시연이지만 그녀 역시 꽤나 긴장했다는걸 희진은 알수 있었다. 언제쯤이면 이런 일들을 겪지않을수 있을가? 시연이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자신이 수의사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나면 이 지긋지긋한 커피 전문점에서의 알바도 끝이 나겠지. 희진은 시연을 따라 무거운 한숨을 몰아쉬어본다.
"괜찮은 거야?"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지?"
"안 괜찮으면 어쩔건데?"
"그거야......"
"나 독하다는 거 잘 알잖아.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잘 생각했어. 저런 젓비린내 나는 자식, 똥 밟았다 생각해."
현민에게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곳에서 2년을 넘게 일해오면서 몇 번 경험해왔었던 일들이다. 매번 같은 장소에서 같은 상황을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보이고도 여전히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한다는 사실이 싫을뿐이다. 왜 이렇게 점점 사람들은 자신을 우습게 보게되는건지, 희진의 동정 가득한 눈길에 한없이 작아져 바닥으로 스며들것만 같다. 하지만 그래도 시연은 앞에 서 있는 손님들로부터 새로운 주문을 받고 서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녀의 생활이니깐.
첫댓글 잘 보고 가요
하채경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