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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의 소떼 방북과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우보천리(牛步千里)의 첫걸음이 남북을 변화시키다
1998년 소 떼 방북
1998년 6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500마리의 소를 몰고 판문점을 거쳐 방북했다.
‘소떼 방북’은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기반해 실리적 측면에서 통일문제에 접근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남북관계를 두고 정치적·이념적 접근보다는 경제적·현실적으로 접근한 정주영의 구상은
앞으로 통일문제를 풀어 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평화와 통일은 당위나 추상적 선언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실질적인 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접점이 넓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구체화 되고 힘이 실릴 수 있다.
정주영이 소떼 방북이라는 이벤트를 마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 교체로 탄생한 김대중 정부의 출범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정책으로 이전 정부와 같이 통일방안을 앞세우기보다는,
교류와 협력을 통해 남북관계의 구체적 현안을 단계적·현실적으로 풀어가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소위 ‘햇볕정책’으로 명명된 이 방식은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의 기초를 닦기 위한 방도로
정경분리 원칙에 기반한 경제교류를 강조했다.
그간 남북관계는 정치·군사적 논리에 의해 경제 논리가 일방적으로 종속되어 교류 협력이 꾸준히 진행될 수 없었다.
김대중 정부는 그 연결고리를 정경분리를 내세워 끊어냄으로써 정치·군사적 이유로
긴장이 조성된다 하더라도 경제교류를 지속시켜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관리하고자 했다.
소 떼 방북과 합의사항
1998년 6월 16일 84세의 정주영은 소떼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통해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를 향했다.
정주영은 18세에 가난이 싫다며 아버지가 소 판 돈 70원을 몰래 훔쳐 서울로 가출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가 66년이 지나 남한의 재벌이 되어 그 빚을 갚는다며 방북 길에 오른 것이다.
정주영이 소떼를 몰고 방북 길에 오른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사연과 성공한 실향민 출신 기업인으로서
고향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평소의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수성가한 기업가의 방북 이벤트를 단순히 감상적인 수구초심(首丘初心)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정주영의 대북사업은 철저하게 기업가의 논리에 따른 실리적 선택이었다.
정주영이 소떼 방북이라는 세기적 이벤트를 펼치며 승부수를 띄운 것은 대북사업의 선점효과를 노린 측면이 컸다.
그는 현대그룹이 통일 한반도 개발의 반석을 마련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대북사업을 선점하여 북한에 대한 개발에 독점권을 확고하게 보장받으려는 생각도 있었다.
정주영의 대북사업은 철저히 현대그룹의 이익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정주영이 처음 고향을 방문했던 1989년은 한국경제의 특징으로 여겨졌던
저임금과 대외 의존에 기반한 축적이 더 이상 힘든 양적 산업화의 종결 시기였다.
수출시장에서는 기존 한국경제를 지탱해 오던 미국 시장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고,
노동운동의 분출로 임금수준이 상승하면서
저임금에 기초한 자본축적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때 정주영은 북한으로 시야를 돌려 저임금, 값싼 지하자원, 낮은 물류비, 관광 특수 등에 주목하며
냉전 해체의 상황을 자신의 이해관계 영역의 확장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구상은 정주영이 1992년 대선에 나서면서 김영삼 정부 시기 동안에는 실현될 수 없었다.
정주영은 1차 소떼 방북에서
북한의 김용순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위원장, 정운업 민족경제협력연합회 회장과의 면담을 통해
금강산 관광을 비롯한 경제협력 사업에 합의했다.
이때 합의한 사업들은 이미 정주영이 1989년 첫 방북 때 제안했던 내용들로
그의 오래된 구상에서 나온 아이템들이었다. 현대와 북한 양측은 금강산 관광과 관련하여
① 「금강산 관광개발 원칙에 관한 의정서」
② 「금강산 관광개발 추진위원회 설립에 관한 합의서」
③ 「금강산 관광을 위한 계약서」를 체결했다.
그 외
① 승용차 및 화물자동차 조립 공장 건설·수출
② 자동차 라디오 20만 대 조립
③ 20만 톤 규모의 고선박 해체설비 및 7만 톤 규모의 압연강재 생산공장 건설
④ 제3국 건설 대상에 대한 공동 진출 검토·연구
⑤ 공업단지 조성
⑥ 통신사업 검토·연구
등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다.
정주영이 북한과 합의한 사업들 안에는 현대그룹 내 계열사의 업종이 대부분 망라되어 있었다.
현대는 1980년대 후반 들어 이미 궤도에 진입한 기존 산업 가운데
성장 가능성이 높은 자동차, 전자, 석유화학 부문을 주력 업종으로 선정하고,
기존에 중심이었던 건설과 중공업 부문에 대해서는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었다.
또한 노동 집약 산업인 고선박 해체, 컨테이너 생산, 목재 등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기초한 한계 산업에 대해서는 퇴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영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투자전략을 세우도록 만들었고,
그때 정주영의 눈에 들어온 투자 대상지가 바로 북한이었다.
하지만 소떼 방북 이후 남북한 사이에는 악재가 잇따르고 있었다.
정주영이 방북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날인 1998년 6월 22일 강원도 속초 앞바다에서는
북한 해군 소속 잠수정 1척이 어민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군 당국에 예인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7월 12일에는 강원도 동해시 바닷가에서 기관총을 휴대한 북한 무장간첩 시체 1구와
침투용 수중 잠행 추진기 1대가 발견되었다.
8월 31일에는 북한이 함경북도 무수단리에서 ‘광명성 1호’(‘대포동 미사일’)를 발사해 동북아 정세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결국 금강산으로 가는 첫 유람선을 9월 25일에 띄우겠다던 현대의 목표는 계획대로 실행되지 못하게 되었다.
남북 간에 악재가 연이어 발생하자
정주영은 2차 소떼 방북을 통해 김정일을 직접 만나 대북사업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받고자 했다. 현대는
금강산 관광을 포함한 남북경협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핵심 고리로 김정일과의 면담을 상정하고,
실무회담을 통해 정주영-김정일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현대 입장에서는 많은 투자비가 들어가는 만큼, 대북사업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남북관계 경색에 따른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김정일의 사업 보장이 필요하였다.
정주영은 1998년 10월 27일 소 501마리와 현대에서 생산한 승용차 20대를 몰고 다시 한 번 판문점을 넘었다.
김정일과의 면담은 10월 30일 밤 정주영이 머물고 있던 백화원 초대소에서 이루어졌다.
이 면담을 통해 정주영은 김정일로부터 금강산 일대 8개 지구의 독점개발권 및 사업권을 보장받았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남북경협 활성화
정주영이 소떼 방북이라는 이벤트를 마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대중 정부의 출범이 있었다.
김대중은 199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를 통해
“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배제, 화해와 교류 협력의 추진”을 내용으로 하는 ‘대북정책 3원칙’을 발표했다.
‘햇볕정책’으로 정리된 이 기조는 기존 정부처럼 통일방안을 앞세우지 않는 대신,
교류와 협력을 통해 남북 관계의 구체적 현안을 단계적·현실적으로 풀어가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적대적 의도가 내포될 수 있는 통일이라는 말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교류와 협력을 통해 공존의 변화 효과를 노린 정책이었다.
이와 같은 기조하에 김대중 정부는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의 기초를 닦기 위한 방도로
‘정경분리 원칙’에 기반한 경제교류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남북관계는 정치·군사적 논리에 의해 경제 논리가 일방적으로 종속됨으로써
남북 간 교류협력이 꾸준히 진행될 수 없었다.
김대정 정부는 그 연결고리를 정경분리 원칙을 내세워 끊어냄으로써,
남북 간에 정치·군사적 이유로 긴장이 조성된다 하더라도
경제교류는 지속적으로 추진해 남북 관계를 평화적으로 관리하겠다는 목표를 드러냈다.
이에 따라 김대중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남북경협과 관련한 조치들을 연이어 발표하기 시작했다.
1998년 4월 1일
강인덕 통일부 장관은 “남북경협을 민간 자율의 원칙에 따라 대폭 허용한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라며,
“대기업 총수가 통일부에 정식으로 방북 신청을 하면 이를 승인해 줄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어서 4월 30일 통일부는 북한에 대한 투자 규모 제한을 완전히 폐지하는 내용의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를 발표했다. 북한에 대한 투자 규모 제한이 없어지게 되자 그간 묶여있던 사회간접자본과 중공업 분야에 대한 투자도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고, 전략물자를 제외한 교역 품목과 투자 대상에 대한 규제도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정부의 조치에 대해 재계는 즉각적으로 환영을 나타냈다.
현대뿐만 아니라 삼성, LG, 대우 등 굴지의 재벌기업들은 IMF 극복을 위한 돌파구 중 하나로 남북경협을 상정하고,
그동안 미뤄뒀던 신규 사업을 새롭게 모색하기 시작했다.
삼성은 1997년 통신망 사업을 협의하기 위해 방북했던 경험을 살려
나진·선봉지역에 통신센터 건립을 재추진하기로 하였다.
남포공단 합영 사업을 진행하고 있던 대우도 가전공장 설립 문제 등
1997년 김우중 회장이 직접 방북해 논의했던 사업들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LG도 통일부로부터 협력 사업자 승인을 받아 두었던 통신, 에너지, 자원개발, 수산물 가공 등 신규 사업 검토에 들어갔다. 그밖에 롯데(제과공장), 코오롱(섬유), 고합(섬유), 국제상사(신발), 에이스침대(침대), 삼천리(자전거), 태창(샘물) 등이 남북경협 사업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 상황과 남북 관계의 불안정성은
남북경협에 대한 기업의 관심을 직접적인 사업실행 단계로까지 끌어내지는 못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IMF로 인한 고금리, 자금난, 상호 빚보증 해소,
부채비율 축소, 외채 상환 등 당장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또한 이중과세 방지, 투자보장협정 등 대북 투자에 앞서 선행돼야 할 제도의 미비 또한 기업의 참여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경제 논리보다 정치 논리가 우선시되어 왔던 그간 남북 관계의 관성은 재계의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했다.
이처럼 다른 기업들이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을 때 정주영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했다.
소 떼 방북이 일으킨 변화
정주영은 소 1001 마리를 몰고 ‘세기의 목동’이 되어 철책과 지뢰로 가득한 분단의 상징 판문점을 넘었다.
소떼 방북은 판문점이 남북을 갈라놓는 자리인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에게
남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소떼 방북은 기업의 이윤추구 활동을 위한 이벤트였지만 그것이 일으킨 반향은 컸다.
소떼 방북과 그로부터 시작된 남북경협은
실리보다 이념이 우선이었던 남북한의 주류적 분위기를 일신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정주영의 방북은 그간 적대적 반북론에 의지하여 정작 자신이 추구하고 지켜야 할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했던 보수 세력의 비판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혔다.
정주영의 방북은 그가 남한 사회의 보수를 상징하는 재벌 총수라는 점에서
북한을 개방시켜 지배 영역을 확대한다는 차원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실제 소떼 방북은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조차 지지할 수밖에 없는 강한 명분과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오히려 소떼 방북에 대한 비판은 진보 진영 일각에서 먼저 나왔다.
정주영이 첫 방북을 했던 1989년에도 진보 진영은
“국가보안법이 철폐되고 남북한 군사적 긴장이 해소되지 않은 채 진행되는 일부 경제인의 북한 방문과 경제협력은 국민을 기만하는 술책”이라고 비판한 바 있었다.
진보 진영 일부는 IMF 이후 기업의 구조조정 분위기 속에서 정주영의 방북을
기업의 자구책 마련을 위한 행위 또는 신자유주의의 확장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한편 소떼 방북은 남한 사회에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이념적으로 경도되어 있던 북한 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외적으로 폐쇄되었다고 알려진 사회에서도 지배층 내에서는 권력 유지를 위한 방법론 차원에서 ‘개방파’와 ‘보수파’가 공존하기 마련이다.
정주영은 일찍부터 김용순 등 북한 내 ‘개방파’에 주목해 그들의 입지를 강화시키며 대북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개방파’ 입장에서도 김정일이 정주영을 만나 사업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군부를 위시한 ‘보수파’의 견제를 따돌리는 데 수월했던 만큼 둘의 만남에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결국 북한은 정주영의 소떼 방북 이후 ‘개방파’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남한과의 관계 개선을 선택하게 되었다.
결국 북한 내 ‘개방파’의 입지 강화는 김대중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판단 근거가 되었다. ‘햇볕정책’을 설계한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은 김정일 이 정주영과 만난 것을 두고 “(김정일이) 김용순의 손을 확실히 들어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통일부도 “김용순이 남북경협에 대한 북한 내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결국 이러한 판단이 근거가 되어 김대중 정부는 북한과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수 있었다. 실제 김용순의 아태 라인은 현대와의 협력 사업에서 성과를 거둔 후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깊숙이 관여하여 남북관계의 진전을 이루어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사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결코 유리한 조건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평생 색깔론의 공격을 받았던 만큼 대북정책을 추진하는데 한편으로는 보수 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을 설득해야 하는 이중적인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는 북한에 대해 공식 명칭으로 ‘대북화해협력정책(Engagement Policy)’을 추구하면서도 따스함으로 외투를 벗긴다는 이솝우화에 빗댄 ‘햇볕정책(Sunshine Policy)’을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 정책은 국내 보수 세력에게는 ‘퍼주기’라고 비판받았고, 북한으로부터도 초기에는 흡수통일 정책과 다를 바 없다고 비난을 당하였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김대중 정부는 보수의 상징인 재벌의 방북을 통해 국내 정치적 환경을 개선시키면서도 새로운 대북정책의 진의를 북한에 알리는 계기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정주영의 소떼 방북은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남북 간의 본격적인 화해와 협력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는 시금석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실제 김대중은 후일 자서전에서 정주영 방북 귀환 하루 전 속초 앞바다에서 발견된 북한 잠수정 사건을 두고 “햇볕정책의 첫 시험대”였다고 평가했다. 남한에서는 소떼를 보냈는데 북한에서 잠수정을 보냈으니 국민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런데 북한은 사건 발생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신속하게 반응했다. 북한은 이례적으로 평양방송을 통해 “훈련 중인 소형 잠수정과의 통신이 두절 되었다”라고 보도했다. 이후 북한은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것이며 남측 해군을 더 이상 비방하지 않겠다”면서 “빠른 시일내 유해를 송환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 정부는 북한이 더 이상 잠수정 사건을 확대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신호로 이해하였고 ‘대북화해협력정책’을 지속시켜 나갔다.
이처럼 남북관계가 다시 경색 국면으로 전환될 수도 있던 상황에서 조기에 수습된 것은 정주영의 방북 효과였다. 잠수정 사건에 대한 북한의 유화적 태도는 정주영의 방북 등 남한 정부의 일관된 대북정책 추진 의지가 확고하다는 점에 고무된 측면이 컸다. 잠수정 침투 사건 후에도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이 흔들리거나 변할 것이라고 내다보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며 화해협력 정책 의지를 확고히 했다. 또한 “과거 대북정책에서 일관성을 잃어 문제가 복잡해졌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며 ‘햇볕정책’의 기조를 유지할 것임을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소떼 방북은 김대중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내걸었던 ‘햇볕정책’의 첫 번째 가시적 성과였다.
정주영의 소떼 방북은 자칫 악화로 치달을 수 있었던 남북관계를 막아내는 완충 역할을 했다. 소떼 방북 1년 후 발생한 ‘서해교전’에서는 남북 당국이 현대를 가운데 두고 자신의 입장을 각각 밝힘으로써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도 했다. ‘서해교전’이 발생하자 임동원 통일부장관은 현대를 통해 북한과 긴급 접촉할 것을 제안하였고, 북한은 현대를 통해 “금강산 관광사업은 민족문제이므로 정상적으로 추진하자”라는 답변을 전해왔다. 임동원은 이 말을 듣고 북한이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사태를 안정시키기 위해 예정되어 있던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다. 이를 통해 ‘서해교전’은 더 이상 국지전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