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배에 오른지 사흘째 되는 어느 날 밤, 나는 무심결에 눈을 떴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자정이 다 된 것 같다. 나는 주변에 있는 포로들이 곯아떨어져 자는 것을 보면서 눈알만 이리저리 돌렸다.
저쪽에 우리를 감시하는 병사들은 한쪽에서 등불을 밝힌 채 카드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이 저렇게 직무 유기를 하더라도 우리가 이곳을 탈출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바깥은 망망대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두운 바다 밑에서 유보트(U-boat)들이 상어처럼 흟고 지나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덜컹.... 어디선가 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어두운 불빛아래 카드 게임을 하고 있던 병사들이 후다닥 책상위에 있던 카드를 챙겼고 몇 명이 위로 시선을 돌렸을 때는 누군가가 층계에서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카드 게임이 재밌나?"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몸을 일으켰고 병사들의 굳은 시선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 검은 그림자가 층계를 내려오는 것도 보았다.
"지루해서 잠들지 않을 정도로만 하게."
병사들의 얼굴에 조금 안도감이 지나간다. 그 검은 그림자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요넨이었고 그는 내가 있는 방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병사들에게 뭐라고 말했다.
병사들은 내쪽을 한번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카드를 다시 펼치기 시작했고 곧 이쪽으로는 관심도 가지지 않는 모습이 되었다.
요넨은 내가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모습이 당연하다는 듯 무표정으로 태연하게 걸어왔다. 희미한 불빛이었지만 나는 그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는 척 말했다.
"중위님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건가?"
".....맞아."
나는 몸을 일으켜 천천히 걸어갔다. 바닥에 지친 동물처럼 널부러진 동료들을 조심스럽게 피해 창살 바로 앞까지 걸어간 나는 요넨의 바로 앞에 섰다. 그리고 말했다.
"자네도 군에 들어갔군."
"이쯤되면 누구나 군에 들어가게 되지."
요넨은 딱딱하게 말했다. 구두에 윤이 날정도로 말끔한 독일 고급 장교와 그 앞의 초췌해질대로 초췌해진 영국군 말단 포로의 모습이라....
너무 하는군.
"보아하니 해군은 아닌데 왜 이 배에 타고 있지?"
"잠시 본국으로 가기 위해서 타고 있어. 원래 오기로 했던 수송기가 추락해서."
"그렇군."
그 전엔 한번도 독일 공군을 가까이서 본 적도 없지만 [요넨같은 녀석]들이 모인 곳이 그쪽 공군이라면 전쟁은 이미 끝난 게 아닐까.... 나는 조금 생소한 그의 군복과 계급장을 다시 쳐다보았다. 뭔가 어색하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 앞에 있는 녀석에 대해 그다지 큰 거부감은 없었다.
"살아있었으니 다행이군."
"자네도."
요넨이 대답했다. 나는 갑자기 입안이 텁텁한 것을 느끼면서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말했다.
"이봐, 위반이란 건 알고있지만 있다면 담배 한 개만 빌려주겠나? 담배 생각이 간절한데."
"......."
요넨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가슴에 있는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은색으로 된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에 선명하게 박힌 어떤 부대 마크가 나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담배를 받아 입에 물자 그는 역시 빛이 반사될 정도로 깨끗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켰고 나를 향해 내밀었다.
불빛 속 라이터에 [ 중위 J..... ]라는 이니셜이 가려서 일부만 보이지만 또렷이 보였다.
담배 한 모금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나는 담배 연기를 조금이라도 더 폐 안에 가두고 싶었다. 내가 조용히 천정의 환풍구를 향해 내뿜는 담배 연기가 위로 슬슬 흩어지며 올라간다. 그 연기 사이로 요넨은 차갑고 푸른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훗...! 이러니 꼭 총살직전 담배를 피는 병사같군."
"본국으로 가는 중에 포로 한 두명은 꼭 총살당하곤 하지."
"......무슨 이유로? 탈출? 포로로서 규정위반?"
"어떤 이유든."
요넨이 내게서 시선을 때지 않으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나는 한동안 말없이 담배를 다시 피우고 있었다. 담배가 다 타서 이제 마지막 한모금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때 나는 입을 열었다.
"아프리카 군단에 소속되어 있군. 그렇지?"
"........."
"담배 케이스에 그렇게 되어 있더군. 구하기 힘든 라이터까지라... 그런 것들은 다 공적을 쌓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겠지?"
"......그래."
"훌륭해. 음 훌륭해.... 역시 [다른 힘]을 가진 사람은 다르군."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이 요넨에겐 심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는 경직된 모습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제 자리로 돌아가라 제이슨."
"그렇게 하지. 고마웠어 요넨."
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꽁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히죽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요넨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면서 돌아섰고 곧 카드 게임을 치는 병사들 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