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맵을 이용해서 강원도 동해시 발한동을 찾아보았다. 최근 우연히 중학교 동창생 몇 명과 연락이 닿아서 친구들 안부도 묻고 옛날 얘기도 주고받다가 내가 오래전에 살던 그 동네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서 지도로 더듬어 본 것이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고향인 삼척에서 이사와 살던 동네의 개천과 기찻길을 기준 삼아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보니 예전 집터가 어렵지 않게 짐작되었다. 지도에서 발한 복개로와 발한로 사이, 그리고 동해 낚시점과 모텔 중간쯤 어디에 있을 것이다. 내일이라도 현지에 가보면 단숨에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집 한쪽 구석에는 우물이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개천이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우물의 수량은 신통치 않았다. 사람을 써서 여러 차례 우물 바닥을 파보았으나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거의 매일 아침에 동냥하러 오던 젊은 거지 아낙이 우물 얘기를 듣고는 자기 남편이 우물파기 전문가라며 일을 맡겨 보라고 했다. 그 아낙의 남편이 우물의 물길을 확실하게 뚫어서 그간 진 신세를 갚겠다며 나선 것이다. 인건비를 받을 만큼 받고 그가 우물 바닥에 들어가 며칠 동안 파 뒤졌지만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 그 걸인 부부는 우리 집에 발길을 끊었다. 거지가 그래도 낯짝은 있었던가 보다.
집 옆 마당에는 닭장이 있었고 닭장 윗부분에는 사과 궤짝으로 만든 토끼장이 있었는데 토끼와 닭의 모이로 줄 풀을 뜯어 모는 건 주로 내가 했다. 남동생은 좀 게으른 편이라 닭 모이 주는 건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토끼 두 마리는 좀 크자 잡아먹고 달걀을 꾸준히 낳아주던 닭도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잡아먹다가 결국 한 마리도 남지 않게 되자 닭장은 헐렸다.
골목길 쪽으로 대문이 있었고 대문 옆으로 제법 큰 헛간이 있었는데 어느 노총각이 그 오죽잖은 걸 세를 얻어서 만화가게로 꾸몄다. 그는 거기서 숙식하며 만화방을 운영했는데 동네 조무래기들이 쉴 새없이 들락거려 돈을 좀 벌었는지 한두 해 지나서는 개천 건너편 번화가 쪽에 있는 제대로 된 가게로 옮겨서 그동안 주인집 아들이라는 특권으로 만화책을 공짜로 보는 특혜를 누렸던 동생과 나는 매우 서운했다.
우리 앞집은 큰길 쪽으로 난 구멍가게였는데 아버지가 거기서 시도 때도 없이 소주를 사다 마셨다. 어느 일요일 아침 해장술로 소주 한 병 사오라고 시켜서 그 가게에 가서 외상으로 한 병 사드렸더니 금방 “형기야, 술 한 병 더 받아와.” 그래서 또 한 병, 그리고 또 ‘형기야, 술…”, 그래서 또 한 병…그게 저녁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하는 수 없이 계속 가게와 집을 왔다갔다했는데 그 가게 주인 아저씨가 어느 순간 짜증스럽게 소리 질렀다. “야, 너 이게 몇 병짼 줄 아느냐? 열여덟 병째다, 열여덟 병. 외상값이나 좀 갚지 않고서.” 그래서 난 우리 아버지 주량이 소주 열여덟 병을 웃돌았다는 걸 기억한다. 요즈음 나오는 20도짜리 소주로는 30병 이상을 마시는 주량이니 참 대단했다.
구멍가게 앞 큰길로는 가끔 시외버스나 지나다닐 뿐 한산했다. 길을 건너면 지대가 좀 높은 곳에 바로 철길이 있었는데 하루에 몇 차례씩 석탄을 가득 실은 기차가 지나가며 온 읍내에 석탄 가루를 날렸다. 나는 거의 매일 학교에 다녀오면 철길 옆에서 토끼와 닭에게 먹일 풀을 뜯었는데 오징어 건조 철이면 온 읍내를 뒤덮은 엄청난 양의 오징어가 볼 만했다.
개천 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우리 뒷집에서는 가끔 찬송가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창백한 그 집 아들은 예배당에 미친 사람이었는지 거의 매일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창으로 내려다보면 방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기도하고, 노래하고, 이상한 소리를 마구 질러대었다. 때로는 데굴데굴 뒹굴며 숨넘어가듯이 ‘아버지, 아버지’를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예수쟁이들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가 예수쟁이가 되어버렸다.
우리 집 옆 골목길로 언덕을 조금 내려가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버드나무를 지나서 한참 가면 영길이네 포도여관이 있었고 다리 왼쪽으로 조금 가면 정우네 집이 있었다. 버드나무 밑에는 늘 젊은 아낙이 좌판을 벌여놓고 행인을 끌었다.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라야 과자 부스러기에 간단한 군것질거리였지만 그래도 조무래기들의 시선을 끌었다. 손톱만한 사각형 과자의 포장지를 벗겨서 ‘또’ 자가 쓰인 종이가 나오면 또 뽑아서 가질 수 있는 또뽑기가 꾸준히 인기를 끌었다. 동그란 큰 물통 안쪽 주위를 돌아가며 칸막이를 낸 곳에 상품명을 적어놓고 방개를 집어넣어서 아무 칸막이에나 들어가면 거기에 적인 상품을 주는 ‘방개놀이’는 반짝인기를 누리다가 사라졌다.
개천이 복개되었으니 동네 풍경도 많이 달라졌겠다. 동해 고속도로가 뚫린 지도 오래되었고, 해수욕장 개발로 해안 풍경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가 살던 집은 물론 주위의 누추한 집들도 모두 헐리고 현대식으로 새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제는 오징어도 많이 잡히지 않아 오징어 건조도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고 석탄 가루도 더는 날리지 않는다고 한다. 중학생이던 친구들도 다들 늙어가고 벌써 세상을 떠난 친구도 여럿 된다고 들었다.
오늘 정우에게서 삼촌 소식을 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나와 한 반이었던 삼촌 소식을. 삼촌은 우리 집을 물려받아서 사시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 그 집을 헐고 새로 지어서 세를 놓았다고 한다. 친구는 또 삼촌이 망상 해수욕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우리 할아버지 댁을 오래전에 헐고 펜션으로 개발했으니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구경하라고 권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본 그 펜션(www.tjpension.net)은 규모가 제법 크고 아름다웠지만 어릴 적 할아버지 댁 기억만 간직하고 있는 나에게는 낯설었다. 삼촌이 내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워하더라니 언젠가 삼촌 만나러 한 번 가보아 하겠다. 펜션에서 며칠 묵으며 싱싱한 해산물을 안주로 삼촌과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셔야겠다.
그러고 보니 삼촌 본 지 50년이나 흘렀구나.
세월이 그렇게 흘렀네.
(2013년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