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회개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안타깝고 서러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고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에겐 새 삶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새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이 새 삶은 진정한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성령강림 후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회개한다고 다 새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울고불고 회개해도 삶은 변화되지 않는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눅 3장에 보면 회개하러 나온 사람을 향하여 세례 요한이 "이 독사의 자식들아"(:8)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무서운 말을 들어야 했습니까?
벌 안받으려고 회개하러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하였는데, 하나는 앞으로 죄짓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은 죄에 대해서는 정당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죄를 자백하면 용서받습니까? 벌을 받습니까? 벌을 받습니다.
자백하면 용서받는다면 경찰서에서 밤새워가면서 조사받을 필요가 뭐 있습니까?
세상에서 죄를 고백하면 교도소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벌을 달게 받겠다는 것이 회개입니다.
눅 15:11-24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나가서 허랑 방탕하게 살다가 주려죽게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런 탕자인 둘째를 위하여 아버지는 동네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잔치 자리에 앉아 있는 둘째 아들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얼마나 미안하고 얼마나 죄송하겠습니까?
이 잔치는 모든 죄가 다 드러나고 자아가 죽는 잔치입니다.
이것이 회개한 자가 받는 잔치의 영적 실상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도 탕자와 같은 엄청난 잔치상을 받고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이라 부릅니다.
의인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자신이 지은 죄에 합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옥갈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의인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저를 죄인 취급하십니까? 의인 취급하십니까? 의인 취급합니다.
그것이 제겐 너무나 힘듭니다.
차라리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으라 하셔서 교인들 앞에 나섭니다.
저는 지금 잔치 자리에 앉은 탕자 같은 심정입니다.
한달 전 쯤 이사야 53장을 묵상하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졌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동안 왜 죄를 지을 때마다 그에 해당되는 벌을 받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저 지나간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이 모르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대신 지셨던 것입니다.
누군가 나 대신 벌금을 내고 있었다 해도 감당하기 힘든 일일테고 누군가 나 대신 감옥에 갔다 해도 그 부담감이 말할 수 없이 클텐데 내 모든 죄에 대한 벌을 주님이 다 당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 주님이 지금도 함께 하시는데 어찌 다시 죄에 기웃거릴수 있겠습니까?
종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지냈습니다.
진정한 회개, 삶을 변화시키는 회개는 벌받지 않으려고 하는 회개가 아닙니다.
솔직히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것 뿐입니다.
오히려 어떤 벌이라도 받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제는 죄짓지 않고 살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오직 주님과 동행하면서 습관적인 죄, 은밀한 죄를 이기기만 원할 뿐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진정으로 회개하면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새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