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대의문공덕(大義門功德)]
【왕생론】
大乘善根界,等無譏嫌名,
女人及根缺,二乘種不生。
【번역】
대승의 선근 경계는
평등하여 조롱과 혐오할 만한 이름조차 없거늘
여자와 불구
이승의 종성은 더욱 태어날 수 없다네.
【왕생론주】
此四句,名「莊嚴大義門功德成就」。
「門」者,通大義之門也。「大義」者,大乘所以也。如人造城,得門則入。若人得生安樂者,是則成就大乘之門也。
佛本何故興此願?見有國土,雖有佛如來賢聖等衆,由國濁故,分一說三。或以拓眉致誚,或緣指語招譏。
是故願言:「使我國土,皆是大乘一味,平等一味,根敗種子,畢竟不生;女人殘缺,名字亦斷。」
是故言「大乘善根界,等無譏嫌名,女人及根缺,二乘種不生」。
【번역】
이 네 구절을 “장엄대의문공덕성취(莊嚴大義門功德成就)”라고 부른다.
“문”은 대의(大義)로 통하는 문이고, “대의”는 대승의 유래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어느 한 도시를 방문하려고 할 때, 문을 찾으면 들어갈 수 있듯이, 어떤 사람이 안락국토에 왕생할 수 있다면 이것이 곧 대승의 문을 성취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인지에서 무슨 이유로 이 원을 세웠는가? 어떤 국토를 보니, 비록 불보살 등 성현 대중들이 있으나 국토가 혼탁한 까닭에 일승법을 삼승으로 분별하여 설하기도 하고, 혹은 (부처님 시대에 어느 부처님 제자가) 눈을 치켜뜨고 여자를 보다가 외도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혹은 농아인이 수화를 사용하다가 조소당하기도 하였다.
그런 까닭에 법장보살이 발원하기를 “(원컨대 내가 부처가 될 적에) 나의 국토는 모두 대승(보살)의 한 맛, 평등한 한 맛으로, 뿌리가 썩은 (이승) 종자가 끝내 태어나지 못하고, 여자와 불구라는 이름조차 없게 해주소서.”라고 한 것이다.
(극락국토에 대의문공덕장엄을 성취한 까닭에) “대승의 선근 경계는 평등하여 조롱과 혐오할 만한 이름조차 없거늘, 여자와 불구, 이승의 종성은 더욱 태어날 수 없다네.”라고 말한 것이다.
【왕생론주】
問曰:案王舍城所說《無量壽經》,法藏菩薩四十八願中言「設我得佛,國中聲聞,有能計量知其數者,不取正覺」,是有聲聞一證也。又,《十住毗婆沙》中,龍樹菩薩造《阿彌陀讚》云「超出三界獄,目如蓮華葉,聲聞衆無量,是故稽首禮」,是有聲聞二證也。又,《摩訶衍論》中言「佛土種種不同:或有佛土,純是聲聞僧;或有佛土,純是菩薩僧;或有佛土,菩薩、聲聞會為僧,如阿彌陀安樂國等是也」,是有聲聞三證也。諸經中有說安樂國處,多言有聲聞,不言無聲聞;聲聞即是二乘之一。《論》言乃至無二乘名,此云何會?
【번역】
묻기를: (부처님께서) 왕사성에서 설한 《무량수경》에 따르면, 법장보살의 48원 중에 “내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성문의 수효를 헤아려 알 수 있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라는 원이 있는데, 이것이 (극락국토에) 성문이 있다는 첫 번째 증거이다. 또한, 《십주비바사론》 중에 용수보살이 《아미타찬》을 지어 말하기를 “삼계의 감옥을 벗어나 눈은 연꽃의 잎과 같으며, 성문 대중이 한량없는 까닭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나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성문이 있다는 두 번째 증거이다. 또한, 《마하연론》 중에서 말하기를 “불국토마다 여러모로 다르다. 어떤 불국토에는 순전히 성문승들만 있고, 어떤 불국토에는 순전히 보살승들만 있고, 어떤 불국토에는 보살과 성문이 모여 승가를 이루고 있으니, 예컨대 아미타불의 안락국 등이 그런 곳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성문이 있다는 세 번째 증거이다. 여러 경전 가운데 안락국을 말하는 곳마다 대다수가 성문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 성문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성문이란 곧 이승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논》에서는 내지 이승의 이름조차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 상반된 주장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왕생론주】
答曰:以理推之,安樂淨土不應有二乘。何以言之?夫有病則有藥,理數之常也。《法華經》言「釋迦牟尼如來以出五濁世故,分一為三」。淨土既非五濁,無三乘明矣。
《法華經》道諸聲聞:「是人於何而得解脫?但離虛妄,名為解脫。是人實未得一切解脫,以未得無上道故。」覈推此理,阿羅漢既未得一切解脫,必應有生;此人更不生三界;三界外,除淨土更無生處:是以唯應於淨土生。
如言「聲聞」者,是他方聲聞來生,仍本名故,稱為聲聞。如天帝釋,生人中時姓憍尸迦,後雖為天主,佛欲使人知其由來,與帝釋語時,猶稱憍尸迦,其此類也。
又,此論但言「二乘種不生」,謂安樂國不生二乘種子,亦何妨二乘來生耶!譬如橘栽不生江北,河洛果肆亦見有橘;又言鸚鵡不渡隴西,趙魏架桁亦有鸚鵡:此二物但言其種不渡,彼有聲聞亦如是。作如是解,經論則會。
【번역】
답하기를: 이치로 미루어 보아 안락정토에는 이승이 있어서는 안 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병이 있으면 약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석가모니여래께서 오탁악세에 출현한 까닭에 일승법을 삼승으로 분별하여 설하였니라.”라고 하였다. 극락정토가 오탁악세가 아닌 이상, 삼승이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법화경》에서 성문에 대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무엇으로부터 해탈을 얻었는가? 다만 허망함에서 벗어나면 해탈이라 부르느니라. (그러나) 이 사람은 실로 일체 해탈을 얻지 못하였으니, 위없는 도를 얻지 못한 까닭이니라.”라고 하였다. 이 이치에 따라 미루어 보건대, 아라한은 일체 해탈을 얻지 못한 이상, 반드시 태어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사람은 (삼계의 번뇌를 다 끊었기에) 다시 삼계에 태어나지는 않을 것이고, 삼계 밖은 정토 외에 다시 태어날 곳이 없으므로 오로지 정토에 태어나야 한다.
예컨대 (경에서) 말한 “성문”은, 타방세계에서 극락국토로 왕생한 성문의 원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성문”이라 부른 것이다. 또 예컨대 제석천이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의 성이 교시가(憍尸迦)였는데, 나중에 (천상에 태어나 도리천의) 천주(天主)가 되었어도 부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제석천의 내력을 알게 하려고 제석천과 대화를 나눌 때 여전히 “교시가”라고 부른 것이다. 성문이라 부르는 것도 이와 같다.
또한, 이 논에서는 단지 “이승의 종자가 태어날 수 없다”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즉 안락국토에는 이승의 종자가 태어날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이것이 (사바세계에서 극락세계로) 이승이 왕생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예컨대 귤나무의 묘목이 강북(장강 이북)에서 자랄 순 없으나 하락(河洛: 黃河와 洛河)지역의 과일가게에서도 귤을 볼 수 있고, 또 앵무새가 산지인 롱서(隴西: 오늘의 감숙성 일대)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조위(趙魏: 오늘의 河北, 河南, 陝西, 山西 일대) 지역 인가의 처마 밑에 걸어놓은 새장에도 앵무새가 있다. 이 두 가지 산물은 다만 그 종자가 (산지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 것뿐이다. 극락국토의 성문 역시 이와 같다. (비록 극락국토에 이승의 종성이 태어나지 않지만, 이승이 왕생하는 것은 무방하다) 이렇게 이해하면 경과 논의 상반된 주장을 회통할 수 있다.
【왕생론주】
問曰:名以召事,有事乃有名。安樂國既無二乘、女人、根缺之事,亦何須復言無此三名耶?
答曰:如軟心菩薩,不甚勇猛,譏言聲聞;如人諂曲,或復儜弱,譏言女人;又如眼雖明而不識事,譏言盲人;又如耳雖聰而聽義不解,譏言聾人;又如舌雖語而訥口謇吃,譏言啞人:有如是等根雖具足,而有譏嫌之名。是故須言乃至無名,明淨土無如是等與奪之名。
【번역】
묻기를: 이름은 사물을 부르는 것으로, 사물이 있어야 이름도 있다. 안락국토에 이승과 여자, 불구라는 사실이 없는 이상, 구태여 거듭 이 삼자의 이름이 없다고 말할 필요가 있는가?
답하기를: 예컨대 연심보살(軟心菩薩)은 용맹스럽지 못하여(위로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의 구제하려는 마음이 없음) 사람들에게 “성문”이라는 비난을 듣게 되고, 어떤 남자는 갖은 방법으로 남에게 아부하거나 혹은 나약하고 무능하여 사람들에게 “여자”라는 비웃음을 사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은 눈이 밝음에도 사리 분별을 못 하여 사람들에게 “(눈뜬) 장님”이라는 조롱을 당하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은 귀가 밝음에도 말귀를 못 알아들어 “귀머거리”라는 조소를 받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은 혀가 있어 말은 하는데 말이 어눌하고 더듬어 사람들에게 “벙어리”라는 비아냥을 듣게 된다. 이처럼 육근이 비록 다 갖춰져 있음에도 (이승, 여자, 불구라는)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름이 있는 까닭에 반드시 내지 (이 세 가지) 이름조차 없다고 말함으로써 정토에는 이와 같은 “여탈의 이름(與奪之名)”이 없음을 밝혀야 했다.
*연심보살(軟心菩薩): 십신위十信位의 보살로서 마음이 맹리猛利하지 못하고, 의지가 굳건하지 못하며, 앞으로 나아갈지 뒤로 물러날지 정해지지 않았다.
*여탈의 이름(與奪之名): 여탈이란 주는 일과 빼앗는 일을 말하는 것으로, 육근을 갖춘 사람에게 “불구” 등의 명칭을 주고 “육근을 구족함” 등의 명칭을 빼앗아 가는 것을 “여탈의 이름”이라 부른다.
【왕생론주】
問曰:尋法藏菩薩本願,及龍樹菩薩所讚,皆似以彼國聲聞衆多為奇,此有何義?
答曰:聲聞以實際為證,計不應更能生佛道根芽,而佛以本願不可思議神力攝令生彼,必當復以神力生其無上道心。譬如鴆鳥入水,魚蚌咸死;犀牛觸之,死者皆活:如此不應生而生,所以可奇。然五不思議中,佛法最不可思議。佛能使聲聞復生無上道心,真不可思議之至也。
【번역】
묻기를: 법장보살의 본원과 용수보살이 지은 《아미타찬》을 탐구해 보면, 모두 극락국토에 성문이 많은 것을 기이하고 특별하게 여기는 것 같은데, 여기에 무슨 뜻이 있는가?
답하기를: 성문은 “실제(實際)”를 증득하였으므로, 이치대로라면 다시 불도의 싹(根芽)이 자라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부처님께서 본원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으로 그들을 섭수하여 극락국토에 태어나게 하였으므로, 반드시 다시 신통력으로 그들로 하여금 위없는 도심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 예컨대 짐새가 물에 들어가면 (물속의) 어패류들이 다 죽어버리지만, 무소의 뿔이 물에 닿으면 이미 죽었던 어패류들이 다시 되살아난다. 이처럼 살아날 수 없는 것이 되살아났기 때문에 기이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섯 가지 불가사의 가운데 불법이 가장 불가사의하다. 부처님은 능히 성문들로 하여금 다시 위없는 보리심을 일으키게 할 수 있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함이 극치에 이르렀다!
*실제實際: 만법의 진실한 변제邊際로서 적멸寂滅을 일컫는 말이다. 《대지도론》에서 말하기를 “실제實際란, 법성法性이 실實이 되고 증득한 까닭에 제際가 된다. 법성 속에 들어가서 법성이 무량무변하고 가장 미묘하여 법성보다 더 수승하고 법성에서 벗어난 법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이에 만족하고 더 이상 다른 것을 구하지 않고 증득을 하게 된다. 예컨대 아라한과 벽지불은 실제에 안주하여 설령 갠지스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해 설법하더라도 더 이상 증진增進하지 못하고 다시 삼계에 태어나지도 않는다.”라고 하였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 《대지도론》에서 말하기를 “중생의 수효가 불가사의하고, 업력이 불가사의하고, 선정력이 불가사의하고, 용력龍力 불가사의하고, 불력이 불가사의하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