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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잘 나갈 때 조심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요나가 찾아간 니네베는 당시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 비슷한 대도시였습니다.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그 위로 마차 3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23미터였는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앞에는 너비가 24미터인 방어용 연못까지 건설할 정도였습니다.
요나 예언서도 니네베라는 도시의 규모와 위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요나 3,3)
예언자로 불림받은 요나가 요리조리 도망 다니다가, 마침내 주님의 손아귀에 잡혀 최초로 파견된 도시가 바로 그 잘 나가던 도시, 당시 최강대국의 수도 니네베였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니네베 성안으로 들어가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참 딱해 보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하룻길을 걸은 요나 예언자가 마침내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니네베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요나 예언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외쳐본 들 뭐하겠어? 귀여겨 듣지도 않을 니네베 사람들인데...그래도 주님께서 외치라 하시니, 일단 한번 외쳐나 봐야겠다. 안 그러면 주님께서 내게 또 어떤 끔찍한 조치를 취하실지 모르니...’
그런데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습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자루 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 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돌리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집단적 회개 사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또 다른 잘 나가는 우리들의 대도시를 향해서도 강력히 회개를 촉구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돈과 명예,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든 거대 도시민들의 집단적인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게 번창했고 잘 나갔던 대도시 니네베는 기원 전 612년, 자취도 없이 이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아시리아 제왕들의 잔혹함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발굴된 오벨리스크나 벽화에는 저마다 새겨놓은 무용담이나 왕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짐은 잔인하고…전쟁에서는 앞장서 달리는 온 천하의 왕이며…무릎 꿇지 않는 적들을 짓밟고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었노라. 나는 들판을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태풍이로다.”(아슈르바니팔 왕).
교만과 사악함,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 속으로 내던지며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폐허로 바뀌었습니다. 수천년간 사막 바람이 뜨거운 모래와 먼지 구름을 몰고 와 폐허를 덮자, 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끝도 없이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몇몇 강대국들, 앗시리아와 니네베의 멸망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표징은 지혜를 찾는 이들의 것이다>
복음: 루카 11,29-32
요즘 저희 성당에 저에게 안수를 받겠다고 많은 분이 타 본당에서도 찾아오십니다. 저는 책도 좀 읽으라고 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안수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책을 너무 안 읽는 것 같습니다. 저도 책을 싫어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성당 성물방에는 읽을 책이 한 권도 꽂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표징만 요구하고 지혜는 추구하지 않는 모습과 다를 게 없습니다. 레지오도 교본에 영적독서를 하라고 하는데, 그냥 교본공부만 하고 영적독서는 하지 않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1,29)
예수님께서 표징만을 요구하는 이들을 악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참된 사랑과 신뢰 없이 결과만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찾지 않고 표징만 바라는 것은 복권을 사지 않고 당첨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1950년대 초까지 육상계는 "인간은 절대 1마일(약 1.6km)을 4분 안에 달릴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기록은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벽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육상선수 로저 베니스터(Roger Bannister)는 그 벽을 깨기 위해 도전했습니다. 베니스터는 1929년 영국에서 태어나, 육상선수로서뿐 아니라 의사로서의 꿈도 키우며 학업과 운동을 병행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체력과 호흡법을 연구했고, 특별히 과학적 훈련 방법을 고안해 반복적으로 시도했습니다. 바쁜 의대 생활 속에서도 매일 시간을 쪼개 훈련하며 한계를 극복할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1954년 5월 6일, 마침내 베니스터는 옥스퍼드의 한 경기장에서 역사적인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초반부터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페이스메이커의 도움을 받아 달렸습니다.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그는 모든 힘을 쏟아부었고, 결국 3분 59.4초의 기록으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며 세계 최초로 '1마일 4분 벽'을 깨뜨렸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불가능의 벽을 뛰어넘은 베니스터의 지혜와 노력이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의 성공 이후 1년 동안 여러 명이 같은 벽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그 모든 것으로 깨달음을 얻어라." (잠언 4,7)
기적은 먼저 지혜를 구하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지혜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참된 행복과 성취는 즉각적인 결과가 아니라 지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저는 키가 작습니다. "키가 크면 믿겠습니다."라고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히려 건강하게 몸을 관리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제가 찾아야 할 지혜입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수천 번 실패를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그의 노력 끝에 마침내 전구가 세상을 밝혔습니다. 전구를 개발하게 해 달라고 기도만 한다면 그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면서 청해야 합니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여우는 서로 관계를 맺는 지혜를 배웁니다. 어린 왕자는 관계에서 오는 행복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사막 여우를 만나려고 그 먼 길을 여행한 것입니다. 무조건 "자기 별에 있는 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하느님을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해 주는 심부름 센터로 여기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기적은 '용서'입니다. 용서의 기적을 얻기 위해 어린왕자처럼 노력한다면,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용서하게 되는 참다운 표징을 가지게 됩니다. 마치 고정원 씨처럼. 이것이 하느님의 표징을 체험하는 방식입니다.
먼저 지혜를 얻으려고 해야 합니다. 이 지혜가 저로서는 '하.사.시.'였습니다. 이 지혜를 찾지 않았다면, "다~주었다."라고 하시는 분을 절대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표징은 지혜를 찾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표징이 용서 되지 않는 사람이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표징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사랑과 자비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표징만 바라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찾는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1,29-32: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기적에 대한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그리고는 요나의 기적 하나만 주시겠다고 한다. 요나의 기적을 보여주시겠다는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수난과 부활을 나타낸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지겠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요나의 표징이 이렇게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으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에 갔을 테지만,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살거나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이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는 주님께 왔고, 지나가 버리고 말 세상의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했던 남방 여왕이 회당을 단죄한다면 영원한 지혜와 영원히 사시는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얼마나 무섭게 이 믿지 않는 세대를 단죄할 수 있겠는가? 솔로몬 왕 때, 스바의 여왕은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는 먼 길을 여행하여 지혜를 배우고자 찾아왔으며,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한번 듣고 즉시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단식재계를 했었음을 상기시켜 주신다. 스바의 여왕이나,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다. 이방인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의 설교를 경청하였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하느님께 선택받았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훌륭한 현자이며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일깨워 주신다.
예수님의 이 경고는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무서운 말씀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바라고 하느님께 청해야 할 기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기적이다. 이 세상이 모두 변화되고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 기적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눈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은 기적이 있지만,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기적을 볼 수 없다면 그 기적은 항상 없는 것이다. 이제 바로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나 자신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기적을 청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19세기 초, 산업혁명 시기 영국 방직 공장에 방직 기계들이 들어왔습니다. 처음에 노동자들은 자기 일을 기계가 돕는다고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기고 말았고, 노동자들은 해고되었습니다. 이에 노동자들은 분노했고 공장을 습격해 기계를 부쉈습니다. 이것이 1811~1817년에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입니다.
이 운동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계를 때려 부순 공장만 망했고, 계속 기계를 사용한 공장은 더 잘 되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인공 지능으로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공 지능을 때려 부수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더 좋은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일자리는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거리는 없어지더라도 계속해서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게 됩니다. 예전에 버스를 타면 운전사만 있지 않고, 버스 안내원이 있었습니다. 만원 버스의 승객들을 꾸겨 넣듯이 안으로 밀어 넣고 “오라잇~”을 외쳤었습니다. 현재 이 직업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망했을까? 아닙니다. 발전 속에서 더 많은 직업이 생겼습니다.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며 부정하면 시대의 변화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 생각에 어긋날 때는 잠시 멈춰서서 또 다른 방향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도 그 시대에 맞게 이루어집니다. 구약시대의 하느님과 신약시대의 하느님이 너무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하느님 뜻을 마음에 담으며, 지금 시대에 맞게 생활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표징을 제대로 읽으면서 지금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나의 표징밖에는 따로 보여 주실 것이 없으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은 무엇일까요? 요나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며 하느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알아보아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표징입니다. 지금 자기들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지금 역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맞게 활동하십니다. 그리고 그 활동을 위해 많은 예언자를 나의 이웃으로 보내셨습니다. 내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내 가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이웃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나 예언자를 받아들여서 구원되었던 니네베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그들을 받아들여야 구원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오늘날 서구의 가장 큰 질병은 폐결핵이나 나병이 아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배려에서 제외되고 무시당하는 것이 가장 큰 질병이다. 신체적 질병은 의약품으로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외로움, 절망, 희망 없음을 치료하는 약은 사랑뿐이다(성녀 마더 데레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요나3,10)
누구든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이의
뒷모습은
하느님의 마음을
애잔하게 만든다네.
아무리
대역죄인일지라도
당신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돌리시어
타오르는 진노를
당장 거두신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기도-지혜-회개의 관련성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머무르는 마음은
말없이 생각만으로도 기도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하느님 사랑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사랑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의 몫이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회개도 잘 합니다.
기도 안에서 다져진 겸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은 우리에게 지혜를 선물로 주고
우리는 그 지혜로 기적과 표징을 지나치지 않게 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3.12.수."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 32)
사람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기쁨이
회개입니다.
역사의
현장 속에서
요나보다
더 큰 이를
봅니다.
지난 시간을
아프게
되짚어 봅니다.
어느 한 순간도
우리 힘만으로
살아낸 시간이
아니었음을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회개의 기쁨을
이 사순에
뜨겁게 다시
만납니다.
참사람이
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회개의 길에서
우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보아야
사람을 얻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람을 얻는
회개이며
하느님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한
회개입니다.
하느님을
어디에서
보고
찾아야 할지를
깨닫는
사순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회개입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회개를 사는
오늘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10
주님의 말씀이 1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6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7 그리고 그는 니네베에 이렇게 선포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의 칙령에 따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8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9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