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그리워지는 이름들: 신해철, 유재하, 김현식
http://soulounge.egloos.com/3531557
빈자리는 아쉬움과 그리움을 분만한다.
그 공백이 많은 사랑을 받았거나 앞으로 미래가 촉망되는 중요한 인물의
부재에 의해 만들어졌을 때 안타까운 감정은 더 심해진다.
게다가 준비할 겨를 없이 갑작스럽게 맞이한 죽음 때문이라면 슬픔까지 동반한다.
그렇게 생긴 빈자리를 바라보는 이의 마음은 언제나 무겁다.
신해철, 유재하, 김현식이 그렇다.
항상 새로움과 높은 완성도, 심오함을 추구했던 신해철,
뛰어난 음악성과 서정적인 표현력을 겸비한 유재하,
목소리에 희로애락을 담아냈던 보컬리스트 김현식의 빈자리는 무척 휑하게 느껴진다.
멋진 음악으로 감동을 준 이들이 느닷없이 세상과 이별한 탓이다.
세 뮤지션 모두 공기가 한층 차가워지는 시기에 떠나서 그런지 공허함이 크다.
이맘때면 그들이 더욱 그리워진다.
신해철 | 한국 대중음악의 위대한 예술가
허무함과 안타까움은 여전히 크다. 7년 만에 솔로 앨범을 낸 데다가
새로운 넥스트의 행보를 예고한 때라서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헤어짐이
더욱 슬프게 다가왔다. 음악 활동을 하지 않던 때에도 방송인으로서
정력적인 모습을 보여 왔기에 그의 부재는 형용할 수 없는 허전함을 남긴다.
신해철은 친구들과 결성한 무한궤도로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해 대상을 수상하며
음악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가 작사, 작곡한 대상 수상곡 '그대에게'는 인상적인
신시사이저 연주, 흥겨운 분위기, 반전이 있는 구조로 특별함을 과시했다.
관계자들의 눈에 들 수밖에 없는 노래였다.
이듬해 한 장의 앨범을 발표한 뒤 무한궤도는 해체했고, 신해철은 1990년 솔로로 데뷔한다.
1집에서 그는 서정적인 발라드('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감각적인 랩 댄스음악('안녕')을
고루 아우르며 신세대 싱어송라이터로 급부상했다. 1991년 발표한 2집 [Myself]에서는
재즈('재즈 카페'), 하우스('나에게 쓰는 편지') 등으로 음악적 스펙트럼을 확장했으며,
'나에게 쓰는 편지', '50년 후의 내 모습'을 통해 인생과
사회에 대한 철학을 담는 음악가임을 기술했다.
넓은 음악 표현, 깊이 있는 내용은 넥스트를 통해 심화된다. 1992년에 출시한 넥스트 1집 [Home]은 가정과 개인의 삶을 골자로 하면서 힙 하우스('도시인'), 랩 록과 댄스음악의 혼합 ('Turn Off The T.V.'), 아레나 록('영원히') 등으로 다양성을 표출했다. 이후 [The Return Of N.EX.T Part 1: The Being], [The Return Of N.EX.T Part 2: The World], [Lazenca (A Space Rock Opera)]를 발표하며 프로그레시브 록, 록 오페라 등으로 변화와 성숙을 꾀했으며, 이와 동시에 물질만능주의의 만연('Money'), 급박한 세계화('Komerican Blues') 등 세상과 문명을 조명하는 노랫말로 청취자들과 계속해서 숙고를 공유했다.
새로움을 찾는 노정은 언제나 분망했다. 신해철은 1996년 윤상과의 프로젝트 노 댄스에 이어 [Crom's Techno Works]와 그리스 출신의 프로듀서 Chris Tsangarides와 함께한 [Monocrom]을 통해 전자음악을 적극적으로 연구, 시도했다. 2007년 발표한 [The Songs For The One]에서는 빅 밴드 재즈를 택하며 변화하는 뮤지션임을 말했다. 생전 마지막 음반이 된 2014년의 [REBOOT MYSELF Part.1]에서도 아카펠라('A.D.D.A'), 펑크(Funk) 록('Catch Me If You Can (바퀴벌레)'), 포스트 디스코('Princess Maker') 등으로 다양한 스타일을 부지런히 선보였다.
실험성, 믹싱과 프로듀싱의 기술적 탐미, 예술적 견고함은 신해철의 음악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여기에 인생과 사회에 대한 고민을 녹여낸 가사로 진중함을 갖췄다. 가요계에 넘쳐나는 그저 그런 인스턴트 노래들과는 달리 그의 음악에는 몇 번을 곱씹어 볼 깊은 풍미와 삶에 필요한 고민이 있었다. 멋진 음악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멋있게 음악을 하던 이가 떠나 버렸으니 슬프기가 그지없다. 매년 이맘때면 많은 음악팬이 습관처럼 신해철의 노래를 찾게 될 것이다.
유재하 |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천재 뮤지션
1987년 11월 1일 교통사고로 유재하는 세상과 인연을 마감했다. 스물다섯의 이른 나이였다는 점도 안타까웠지만 첫 앨범을 낸 지 두어 달밖에 안 됐다는 사실도 슬픔을 더했다. 한창 활발하게 활동할 시기에 대중과 만나지도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그가 출중한 재능을 지닌 전도유망한 뮤지션이었기에 예상치 못한 작별은 더 무겁게 다가왔다.
1962년에 태어나 유년 시절 팝 음악을 들으며 음악에 대한 애정을 쌓던 유재하는 한양대에 진학해 클래식을 전공하게 된다. 하지만 대중음악을 향한 사랑은 그를 가요계로 인도했다. 유재하는 1984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로 세션 경력을 시작했다. 더불어 그가 쓴 '사랑하기 때문에'가 이듬해 나온 조용필의 7집에 실려 작사가, 작곡가로서도 이름을 선전하게 됐다. 1985년과 86년 김현식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멤버로 활동하며 연주자, 작곡가로서 또 한 번 존재를 알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탈퇴한 유재하는 1987년 첫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하며 솔로 아티스트로 데뷔한다. 그는 전 곡을 홀로 작사, 작곡, 편곡해 출중한 싱어송라이터, 음악감독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뽐냈다. 유려한 멜로디, 깔끔하면서도 야무진 구성, 팝과 록은 기본에 클래식 작법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표현은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사랑의 여러 상념과 감정을 차분하게 전달하는 가사 또한 준수했다. 이 작업들을 혼자서 수행한 것도 대단하지만 결과물의 완성도까지 훌륭해 그의 데뷔 앨범에는 자연스레 찬양이 뒤따랐다.
절대적으로 좋은 평만 들은 것은 아니었다. 앨범이 나왔을 때 일부 방송사는 음정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심의를 반려했다. 물론 유재하가 절창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듬어지지 않은 보컬이라도 곡과 잘 화합해 수수한 맛을 냈다. 게다가 음성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맹함은 아련함을 효과적으로 장식한다.
놀라운 족적은 일회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1989년부터 열리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통해 조규찬, 고찬용, 유희열, 이한철 등 뛰어난 뮤지션들이 발굴되고 있으니 그의 업적은 계속된다고 봐야 할 듯하다. 여기에 끊임없이 이뤄지는 후배들의 리메이크,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입상자들이 선보이는 [우리들의 유재하] 시리즈 등으로 그의 음악과 이름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자리한다. 유재하의 노래는 세월이 지나도 이렇게 숨 쉬고 있다.
김현식 | 인생을 담은 듯한 생동의 목소리
1991년 겨울을 장식한 배경음악은 '내 사랑 내 곁에'였다. 라디오 전파를 수없이 탔으며, 커피숍이나 술집 등 음악이 꼭 깔리는 업소에는 어김없이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길거리에서 음반을 파는 행상들의 스피커도 '내 사랑 내 곁에'를 단골로 모셨다. 가수는 1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노래는 1991년과 1992년 KBS "가요톱10" 1위를 차지했다. '내 사랑 내 곁에'가 수록된 김현식의 여섯 번째 앨범은 무려 3백만 장 이상 팔렸다. 그는 노래와 목소리로 강한 생명력을 발휘했다.
1991년 많은 사람이 그를 알게 됐지만 데뷔 때에는 유명과 거리가 멀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밴드부에서 활동한 김현식은 자퇴 후 종로의 음악다방에서 노래를 부르며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장희의 소개로 1978년 데뷔 음반을 준비했지만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앨범을 출시하지 못했다. 1980년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타이틀로 한 1집을 발표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면서 생계를 위해 피자 가게를 열기도 한 그는 밤무대에 서는 것으로 가수로서 활동을 이어 갔다.
이전까지 음악계에 어중간하게 발을 걸치고 있던 그에게 동아기획은 성공의 중요한 발판이 됐다. 1984년 동아기획에서 2집을 발표했고, 수록곡 중 '사랑했어요'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인지도가 높아졌다. 이듬해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유재하(후에 탈퇴하면서 박성식이 합류한다)와 함께 김현식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결성해 1986년 3집을 출시했다. 앨범은 유재하('가리워진 길'), 김종진('쓸쓸한 오후')이 작곡에 참여해 팝, 재즈 퓨전 등 다양한 색채를 냈다. 더불어 '비처럼 음악처럼'이 비가 오는 날이면 라디오 신청곡으로 쇄도해 김현식은 음악팬들에게 익숙한 존재가 됐다.
1987년 들국화의 전인권, 허성욱과 함께 대마초 흡입 혐의로 구속돼 위기를 맞았지만 이듬해 초 삭발을 감행하며 개최한 콘서트를 통해 재기에 성공했다. 이해 발표한 4집은 '언제나 그대 내 곁에', 유재하가 쓴 '그대 내 품에' 등이 큰 사랑을 얻으며 상업적인 성공을 기록했다. 1989년에는 강인원, 권인하와 함께 부른 영화 "비 오는 날 수채화"의 주제가가 크게 히트해 김현식은 완전히 주류의 스타 가수가 됐다.
김현식은 1990년 '넋두리'를 타이틀곡으로 한 다섯 번째 앨범을 발표하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지만 무리한 스케줄, 과도한 음주 등 안 좋은 생활 습관은 간경화를 악화시켰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6집 녹음에 혼신을 다했지만 1990년 11월 1일 자택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만 32세의 젊은 나이였다.
거칠게 약동하는 김현식 특유의 가창은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잘 나타난다. 마치 마지막을 예감한 듯 고독함과 안타까움을 표하는 노랫말과 애절한 보컬은 수많은 이의 심금을 휘저었다. 이처럼 김현식의 목소리에는 사연이 느껴지는 울림이 있었다. 때문에 김현식의 음악을 들어 온 팬들에게 그는 영원한 가객으로 기억된다.
(한동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