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90
3월8일[사순 제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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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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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CaYaiyEBlk
[인천교구 신교선 가브리엘(역곡2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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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분을 만난 이후, 그리도 중요하게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좀 더 성숙하고 균형 잡힌 것, 보다 진정성을 지니기 위해서 참으로 필요한 것은 진한 하느님 사랑의 체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사제나 수도자들의 진지한 자기 반성도 필요하겠습니다. 우리가 동반해드리는 교우들은 절절하고 뜨거운 하느님 사랑 체험에
저리도 행복해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저 냉랭하고 뜨뜨미지근할 뿐입니다.
존 포웰 신부님은 하느님 사랑 체험의 첫출발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의 손길이 내게 와 닿았다.”
신부님은 그 특별한 체험 이후 삶이 180도 달라지게 되었답니다. 당시 받은 느낌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완전히 새롭게 아름다운 세계가 시야에 들어왔고, 이렇게 새로운 눈을 뜨고 보니 그 전에 중요하게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강렬한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한 그 이후는 더 이상 하느님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랑과의 접촉 이후 더 이상 이웃을 미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감미로운 체험 이후 봉헌 생활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 두 가지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 둘은 구약 모든 율법의 종합이요 요약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두 가지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평생 노력해야 할 과제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하느님 사랑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제대로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놀라운 신비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있는 경쟁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도 없는 성공을 위한 갈망, 나 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 이웃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접하게 될 때 우리 마음 안에 길고도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갈 것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따뜻하고 화사한 봄날이 찾아들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살게 될 때 새 안경을 처음 쓰는 기분일 것입니다. 그간 보이지 않았던 하느님 자비의 흔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간 전혀 감을 잡지 못했던 하느님 사랑의 얼굴을 바로 눈앞에서 뵙듯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이 우리 삶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우리는 새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제의 나를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매 순간 흠뻑 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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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R1GJqvzN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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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읽는 법: 사랑으로 읽어라!>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 긴 성경 가운데서 핵심
구절 두 개를 찾아내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 학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뽑은 핵심 구절에 동의하는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성경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 문장을 찾아내실 수 있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경 말씀을 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지 알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자신이 한 말의 핵심을 말해보라고 하면 됩니다. 분명
당신을 사랑한다면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파악해 핵심적인 한두 마디를 찾아낼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는지 종잡지 못한다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부 싸움이 왜 끝나지 않는 것일까요? 상대가 말하려는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부부 각자의
생각은 ‘나는 널 알아!’입니다. 그러니 굳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성경을 대하는 자세도 그러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순종 하려면 먼저 그 무언가를 말하는 대상을 사랑하게 할 누군가를 만나야 합니다.
영화 《아버지와 딸》(2020)에서 성인이 된 딸은 자기 파괴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버지와 딸》이라는 책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도 그녀의 삶은 아버지가 책을 쓰며 상상한 딸의 모습이 아닙니다. 돈을 받고 몸을 파는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여자 주인공의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도 사고 후유증에 시달립니다. 가난한 소설가이기에 돈도 없습니다. 그런데 친척 집에서
아이를 입양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막으려면 변호사 비로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아버지는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딸을 위해 석 달 동안 모든
에너지를 짜 내 소설을 완성합니다. 그러나 몸이 허약해져 죽고 맙니다. 딸은 부모의 죽음이 자기 탓인 것 같기도 하고 자기를 두고 다 떠나버린
부모가 원망스럽기도 하며 그립기도 하고 또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자기를 떠날까 봐 가벼운 관계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때 《아버지와 딸》을 읽고 삶이 바뀌었다는 한 남자를 만납니다. 그 남자는 그 딸이 그런 모습인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참아냅니다. 자기와 사귀면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와도 이해합니다. 그러한 피 흘림이 결국 여자 주인공이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책을 쓸 때 상상했던 딸의 모습으로 살 것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수녀님들에게 사제가 되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러기 싫었습니다. 결혼해야 행복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니 그 뜻의 의미를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하.사.시.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께서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은 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되니 이웃의 영혼을 돌보는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랑이 없으면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성경을 읽기 전에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줄
무언가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성경 말씀을 사랑 없이 해석하려 하였습니다. 결과는
처참하였습니다. 모든 성경의 계명들을 다 지킨다고 하면서 실제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다 외우는 사람이지만,
이웃에게 화를 내고 싸움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알면 보이는 게 맞지만, 알려면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그러기 위해 사랑을 알게 해 줄 누군가를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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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수첩’이었습니다. 주인공 최민식은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수첩을
꺼내서 연락처를 찾았습니다. 그 수첩에는 주인공 최민식을 위험에서 꺼내 줄 ‘동아줄’이 있었습니다. 최민식은 집안의 어르신에게 연락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는 검사에게 연락하기도 했습니다. 수첩은 아니지만 제게도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스마트폰에는 그동안 신문홍보를 다니면서
도움을 받았던 분들의 연락처가 있습니다. 후임 신부님께 스마트폰에 있는 연락처를 알려드렸습니다. 신문홍보 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휴스턴 본당에서 잠시 머물 때입니다. 본당 봉사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데 몇 마디 대화를 하니 함께 아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한
자매님은 제가 신학생이었을 때 유치원생이었다고 하는데 같은 본당이었습니다. 한 형제님은 혼배 주례 사제가 저를 신학교에 추천해 주신 아버지
신부님이었습니다. 한 자매님은 동창신부님의 동생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저와 같은 고향이었고, 제 사촌 형제들과도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5명만 거치면 지구촌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돌아보면 제게 도움을 주었던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LA에 가면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차량 봉사를 해 주던 분들이 있습니다. 신문사에
후원을 해 주고, 아침이면 같이 미사를 하던 분들이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 서부지국의 일을 기꺼이 맡아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토론토에 가면 공항까지 나와 주고, 차량 봉사를 해 주던 분이 있습니다. 버지니아에 가면 가족처럼 살갑게 대해 주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형제님은 박학다식하여서 버지니아에 있는 성당들의 순례를 도와주었습니다. 보스턴에 가면 늘 맑은 목소리로 보스턴의 명소를 알려주는 자매님도
있습니다. 자매님의 안내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갔었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머물렀던 ‘월든’ 호수에도 갔었습니다. 5년간 머물렀던 뉴욕에는
제게 힘을 주고, 저를 도와주었던 분들이 많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함께 지냈던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미사를 하였던 브루클린
공동체가 있습니다. 특수사목을 하다가 12년 만에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사목을 하는데 많은 브루클린 한인 성당에서의 경험은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주신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입니다. 남의 재물이나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죽음의 골짜기를 갈지라도 안전하다고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늘 싱싱하게 열매
맺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죄인까지도
용서해 주는 사랑입니다.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잡으려는 동아줄이 무엇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동아줄은 튼튼해 보여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의 동아줄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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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28-34: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하라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하신다. 모든 계명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한다. 예수님은
신명 6,4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29절) 하신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며 인간을 지배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모른 체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비롭게 행한 것을 바로 당신께 해드린 것으로 여기심을 알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확증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꾸준히 일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아 주는 일이다.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친밀한 사랑을 알고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처럼 진실해야 한다고 고백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말한 율법 학자의 대답은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룬다. 사순절의 모든 삶은 바로 이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이 말씀은 율법 학자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아직도 떨어져 있음을
암시하신다. 율법 학자는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씀을,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아직 멀리 있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상대를 닮아간다고 한다. 부부의 모습이 닮은 것도 서로의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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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모든 계명 가운데에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궁금한 질문입니다.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 신앙생활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지 언제나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명확히 답을 주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우리 하느님만이 유일하신 ‘주님’(주인님)이심을 인식하고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독서 또한 비슷한 내용을 선언합니다.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이 선언에 이어
독서는 첫째 계명을 잊어버릴 때 나오는 결과를 ‘비틀거림’이라는 주제로 묘사합니다. 독서의 시작과 끝에 ‘비틀거림’이라는 단어가 되풀이되어
나오는데 이는 히브리 말 ‘카샬’로, ‘넘어지다’, ‘흔들리다’, ‘실족하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고통에 흔들리거나
불안에 넘어지는 이유는 ‘주님만이 하느님’이시라는 가장 중요한 계명을 잊고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합당한 삶의 중심과 본질을
잊어버리고 본질이 아닌 것에 의지하고 매여 있으니 중심을 잡지 못하여 매번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순 시기의 정점으로 가는 이번 주에 계속 강조되고 있는 주제는 ‘회개’입니다. ‘주님만이 하느님’이심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 아시리아나
군마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이상 우리를 흔들리며 걷게 하지 않는 지혜이며, 이를
인식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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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
“율법학자 한 사람이……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마르
12,28ㄱㄷ-34ㄱ)
율법학자는 “가장 중요한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계명의 근본정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만 보면,
율법학자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신 것처럼 보이지만, 뜻을 생각하면 질문과 답변이 어긋나 있습니다. 율법학자가 말한
‘첫째가는 계명’이라는 말은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째’와 ‘둘째’라는 말은 계명의 근본정신을
뜻합니다. 그리고 “첫째는 이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바로 뒤에 있는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에 연결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느님 한 분만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은 기본 신앙입니다. ‘사랑’은 그 신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이 말을, “하느님 한 분만을 주님으로 믿고 섬긴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 한 분만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다는 율법학자의 말도 바오로 사도가
한 말과 거의 같은 말입니다. 하느님만을 한 분이신 주님으로 믿고 섬기면서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또는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또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즉 사랑을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하느님만을 한 분이신 주님으로 믿고 섬긴다고 말하는 것은
‘빈말’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진 일이 많은데, 하느님을 완전히 배반하고 우상에게로
넘어간 일은 드물고, 하느님 한 분만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신앙은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 우상에게 한눈을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거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인 중에도, 기본적인 신앙생활은 정상적으로 하면서도 미신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는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물론 사랑이 식으면 언젠가는 결국 신앙도 식어버리게 되지만,
어떻든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우상숭배와 미신에 빠지는 것을 불륜이나 간음으로 표현합니다. 배우자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고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바람피우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모든 계명은 다 똑같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8-19ㄱ) 이 말씀에서,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는 말은, 실제로 하느님의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가장 작은
계명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뜻합니다. “계명들을 큰 것과 작은 것으로(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으로) 분류하지 마라. 계명들은 모두 똑같이
중요하다. 그러니 모든 계명을 똑같이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사랑에 대한 정의(定義)’이기도 합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에는 자신의 온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모두 내주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전부 내주는 헌신과 희생과 섬김입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모두
해당됩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실천됩니다. 그리고 이웃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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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화답송>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시 81,11)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2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곧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라는 그분의 존재차원을 밝히십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의 소유’라는 것을 밝혀줍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마르 12,34)고 할 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마도 율법학자에게 있어서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아직 더 확장되어야 할 사랑의 계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이웃 사랑’을 동포 사랑으로 한정하면서(레위 19,18)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레위 19,34)시키고
있다면, <신약>에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카 10,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원수까지도(마태 5,44)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마태 5,48)
또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하여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4-5)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19,18)의 ‘이웃 사랑’을 한데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형제가 곧 하느님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본다면, 남편에게는 아내가 하느님이요, 상인에게는 손님이 하느님이요, 본당신부에게는
본당신자들이 하느님이요, 대통령에게는 국민이 하느님이요, 나에게는 공동체 식구들이 하느님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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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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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호세아의 외침은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백성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당신께 돌아올 때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분으로 표현됩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이 살게 하시며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강복하시는 모습은 백성들에게 화해하시는 하느님으로 자리 잡게 합니다. 이런
하느님의 호소에 백성들은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 숭배를 일컫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향한 백성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가장
큰 계명 안에서도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가장 큰 계명 또는 황금률로도 불리는 이 계명은 단순합니다. 모든 것을 다하여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 계명은 구약 성경의 요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고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무엇이든 다른 것이 놓인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을 신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더욱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계명처럼 들리지만 실상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의 실천적인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나’ 자신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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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수원 바오로 신부님]
<첫째 가는 계명>
오늘 복음에서 보면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율법의 613조목을 짜고 또 짜서 소쿠리로 걸러 낸다면 바로 '사랑'이라는 두 글자가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인간 세상의 신앙인들에게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앞면은 하느님 사랑이요 뒷면에는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개의 얼굴을 가진 듯이 보이지만 근원은 하나며 또한 내용도 결국은 같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애 자체가 사랑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을 떠나서는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사랑 밖에서는 무엇을 행하신 적도 없으십니다.
사랑으로 오셨다가 사랑으로 사셨으며 그리고 사랑으로 가셨습니다. 우리도 그 삶을 본받아야 하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고 또 차원이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웃사랑이라는 것도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야 가치가 있지 이해타산이 결부된 사랑, 조건이 물린 사랑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워도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할 때 그는 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제로 하는 것입니다.
얼굴이 예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또 나에게 도움을 준 이를 사랑하는 것도 쉬운 일이요 권력이 있거나 돈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오히려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그러한 사랑은 더 뜨겁게 합니다.
그러나 못난 사람,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사랑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때 우리는 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부자요 아무리 큰 학식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가
사랑을 못하고 있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받는 것도 기쁘지만 사랑을 하고 베푸는 것은 더 기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나 누구를 미워할 때나 주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하느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을 할 때
우리는 바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행복한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마음속 깊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은혜로운 사순시기에 우리가 가야할 길이 사랑의 길이란 것을 마음속깊이 새깁시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들의 일상 삶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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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언젠가 들었던 발레리나들의 배역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발레단 안에는 여러 가지 역할이 있는데 크게 나누자면 다 함께 군무를 추는 역할,
그리고 혼자서 춤을 추는 솔리스트의 역할입니다. 당연히 군무를 추는 이들보다 혼자서 춤을 추는 솔리스트가 더 실력이 좋습니다. 홀로 시선을
집중 받으며 여러 가지 감정과 아름다움을 연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솔리스트보다 더 출중한 사람이 맡는 역할이 있는데, 이를 프리마 돈나 (prima donna) 라고 부릅니다. 이태리어로 “첫번째
여성”이라는 뜻의 프리마 돈나는 남자 무용수와 함께 춤을 추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혼자 춤을 추는 것보다 두 사람이 합을 맞추어 예술을
표현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독무를 하는 것이 둘이서 함께 춤을 추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나의 실수를 메워줄 수 있을 것 같고
덜 외로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리마 돈나가 더 어려운 이유는 함께 춤을 추는 발레리노와 많은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남자이기에 근육의 탄성도 다르고 키와
무게도 다릅니다.
이들이 힘을 합쳐 예술을 표현한다는 것은 본인을 통제하는 힘이 있고 남을 배려하고 맞춰주는 힘 또한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수많은 시행착오, 노력과 고통을 감내 했을 때에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부모로서, 자녀로서, 부부로서, 친구로서, 이웃으로서 계속해서 타인과 합을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와중에 타인과 함께 춤을 추는 것이 홀로 춤을 추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우리가 겪는
갈등과 어려움들이 통상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두 가지 모두를 강조하므로 “사랑의 이중계명”이라 불립니다. 이 말씀을 듣는 저는 이렇게 하느님께 투덜대고
싶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란 참으로 쉬운데 이웃을 사랑하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내가 힘이 들 때 언제든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반면에, 이웃은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 저에게 바라시는 이웃사랑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아주 완벽한 사랑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둘이서
합을 맞추는 것이 더 어렵다는 세상의 이치를 하느님이 모르실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 어느 정도 봐주시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어린 핑계가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게 되고, 그리하여 더욱 타인을 위해 “노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에 전적으로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이웃을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받아 누리며 그것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이웃 사랑의 계명은 더 이상 의무로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레
시도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선한 영이 나의 몸과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면, 내가 굳이 나에게 상처를 입힌 이웃을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선한 영이 흘러나와서 이웃을 따뜻하게 돌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렸듯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매 순간 상기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두 명의 무용수가 길고 긴 연습으로 합을 맞추어 아름다움을 연기할 수 있게 되듯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사랑을 시도하고 시도하다
보면 어느새 그것이 몸에 익어 자연스러운 것이 되리라 믿습니다.
율법만으로는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강제성이 있는 법으로 사랑을 시도할 수 있다는것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모범으로 십자가 위에서 수난을 받으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아니 나 자신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
그 위대한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율법만으로 통제될 수 있는 사회 또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사회가 계속해서 유지되려면 분명 보이지 않고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사랑과 용서, 자비와 같은 인간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결여된 사회는 매우 차갑고 험악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사회를 만들지 않도록 마음속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우리는 다시금 사랑할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진다면, 지금의 계속해서 시도하고 노력하고 있는 이 과정이 프리마 돈나가
되기 위한 연습 기간이라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연습을 하는 지금은 넘어질 수도 있고 여기저기 통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없다면 결코 나의 아름다움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내고 계속해서 타인과 합을 맞추다 보면 누구보다 아름다운 프리마 돈나가 되어 하늘 위로 번쩍
들어 올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 와중에조차 자신의 춤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혹은 사소한 실수가 또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을
지켜보신 하느님께서는 흐뭇한 미소로 따뜻한 박수를 보내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율법 학자에게 하시는 다음의 말씀을 큰소리로 외치시며 말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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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하고 이르셨다."(12, 3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라고 칭찬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12,28)라고 물었던 율법 학자입니다. 저는 자주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을 얻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율법
학자의 좋은 질문 덕분에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으뜸이 되고 중심이 되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율법
학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명료합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12, 29~31) 구약과 신약을 약탕기에 넣고 끓여 꽉 짠다면 내려진 약은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보약’이라고 표현하듯이, 율법의 613조항을 짜고 또 짜낸다면 결국 사랑으로 요약될 만큼 ‘사랑의 이중 계명’은 구약과
신약의 정수精髓로써, 율법과 예언자들의 참된 뜻이 온전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계명의 실천 여부가 마지막 심판의
유일한 기준으로 제시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25,40) 그런데 이토록 단순한 계명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계명임을 우리는 살면서 깨닫게 됩니다. 사실 세상 살아오면서 우리는 지구
행성 그리고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을 생애 동안 다 만날 수 없듯이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자신이 사는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특히 나의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처럼 내가 사는 곳에서 만나는 사람,
곧 이웃이 바로 모든 사람입니다.
성 아오스딩은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람도 있다고 선언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무슨 선한 것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이것이 바로 성 아오스딩의 주된 삶과 영성의 핵심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잘못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악마의 자식을 구분 짓는 유일한 차이는
바로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음에 있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악한 생각을 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또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영성의 움직임을 증거하는 떼제 공동체가 새롭게 불러 큰 반향을 일으킨 노래 Ubi
caritas et amor, ubi caritas Deus ibi est.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이는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노래는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 사이에 궁극적인 분리가 있을 수 없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가능한 가장 깊은 친교와 일치를 가능하게 하며 또한 함께 나누는 사랑은 바로 하느님의 본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존재할 때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며 거기에 ‘영원한 당신(The Eternal Thou)’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통찰을 바로 요한 1서에서 이미 언급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4,7)
아무튼 예수님한테서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라고 칭찬을 들은 율법 학자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행하려는 우리 또한 '하느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라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15,9~10) 고 하신
당부대로 언제나 사랑으로 주님과 함께 머물기를 간절히 바라고 주님의 사랑으로 살려고 노력합시다. 그렇게 사노라면 분명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가까이 아니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아버지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서에 나오는 율법 학자는 사랑의 이중 계명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12,33)라고 슬기롭게 대답했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았지만, 사실 그가 고백한 바를 실제로 실천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뵙거나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않았음에도 우리가 믿음으로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고 하느님 아버지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살아간다면, 이런 우리를 보시고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사랑 안에 주님과
함께 머물 뿐만 아니라 칭찬받는 행복한 날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당신께서 가르쳐 주시고 본을 보여주신 사랑의 이중 계명을 저희 또한 실천할 수 있도록 늘 당신 사랑 안에 머물게 하여주시고,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해 가까이 그리고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만끽할 수 있게 하여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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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싱크 어게인’의 저자 애덤 그랜트는 우리가 성공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다시 생각하기’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과 이제껏 배운 것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부정당하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지요.
이것은 정체성의 위상을 지키려는 본능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체성을 바꾸면 안 될까요?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지요. 계속해서 완성되어 나갈 뿐입니다. 따라서 다시 생각하면서
‘정체성’을 바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해 봤자 안 될 거야!’라는 생각이 들 때, 다시 생각할 수 없을까요? ‘전에 해봤는데 소용없었어.’라는 생각이 들 때, 또다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너무 어려워. 나는 절대 못 해.’라는 생각도 다시 생각해야 할 말이 아닐까요? 만약 당신과 가장 친한 사람이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나 친한 친구가 그런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다시 생각하라고 정중하고 간곡하게 부탁할 것입니다. 다시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고, 의미도 생기게 됩니다.
며칠 전에 지방으로 강의를 다녀왔습니다. 집에 들어오니 너무 늦은 시간이고 너무 피곤했습니다. 씻는 것도 귀찮고 얼른 침대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녁기도와 끝기도를 바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생각했습니다. 피곤해서 곧바로 침대에 눕고 싶지만 그래도 기도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회를 줄이고
기쁘게 기도를 마치고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 사랑의 계명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신명기에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셨던 사랑의 계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다시 만든 세부 조항 613개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세부 조항 613개 모두 중요하다고
하니, 만약 두 개의 조항을 동시에 지켜야 할 상황이라면 어떤 조항을 지켜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정작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랑을 소홀히 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던 이유는 다른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지 않고 잘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모습을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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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하느님, 하느님의 나>
마르코 12,28ㄱㄷ-34 (가장 큰 계명)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나의 하느님, 하느님의 나>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나의 하느님께서
나를 있게 하시니
내가
나의 나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로 있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께서
나를 살게 하시니
내가
하느님의 나로서
하느님의 나답게 사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께서
내게 너를 주시니
내가
하느님의 나와 같이
하느님의 너를 품는 것이
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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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기본이 되는 것은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계명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 계명에 근거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계명? 하면 십계명을 떠올립니다. 요약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과연 나에게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인가요? 내가 무엇을
행하거나 판단할 때 하느님의 계명이 기준이 되고 있느냐에 따라 나의 신앙의 현주소가 드러나게 됩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는 이중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시험하였던 여러 부류의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악의가 전혀 없이 열린 마음으로 질문하고 그 계명에 대하여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2-33) 하며 동의를 표하는 율법 학자도 있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축구 경기에서
골인한 것과 골인할 뻔한 것은 분명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캐오 이야기(루카 19,1-10)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율법 학자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율법 학자는 학자답게 이론으로 알고 있었고,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하며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충실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 이중 계명의 사랑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십계명의 핵심 정신이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핵심
정신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손희송)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여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그리하여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로 인도되어 구원을 선물로 얻는다면 그보다 더 큰 열매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그러므로 실행함으로써 열매 맺는 사랑에 목말라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그 ‘앎’이 온몸 세포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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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회개와 사랑, 새로운 삶-
오늘의 다산 어른의 말씀과 논어의 공자 말씀도 사랑 하나로 요약됩니다.
“모든 위대한 가르침은 사랑으로 정리된다. 내 마음의 바름을 다른 이의 마음에 합하는 것이다.”-다산
사랑이 답입니다. 만민의 공통 보편 언어가 사랑입니다. 평생 공부가 사랑 공부요 사랑해서 비로소 사람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이요 삶의 의미도 사랑입니다. 그래서 삶은 ‘사랑의 학교’로 정의하곤 합니다.
“공자가 ‘삼아! 내 도는 하나로 꿰뚫고 있다. 스승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논어
공자 역시 충서의 사랑, 용서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용서의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어제는 새로 구입한 소설의 문장 표현들이 너무 아름다워 처음 두
페이지를 소리 내어 읽어봤습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이요 아름다움이 감동을 주고 마음을 정화합니다. 어제 강론 중 인용된 “산과 강”이란 제
자작시에 감동하여 보내준 댓글도 잊지 못합니다.
“내가 머물면 산이고 움직이면 강이다. 와! 신부님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사랑합니다. 최고세요.”
한 자매는 ‘산과 강’을 시화(詩畫)로 만들어 보내줬고 덕담의 메시지도 전달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자매님 시화 솜씨가 달인의 경지에 도달했네요! 축하드립니다.”
이 또한 사랑의 덕담입니다. 의도적, 의식적으로 누구든 저는 이름 앞에 과감하게 “사랑하는” 이란 말마디를 꼭 붙입니다. 고백하라 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백하다 보면 사랑이 뒤따라 온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막 살 수는 없으니 나를 위한 사랑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전례가 좋은 것은 전례의 아름다움이요 전례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마리아의 집
피정집 벽에 붙어있는 제 자작시 “사랑”이란 시화입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27년 전 시이지만 당신으로 지칭된 주님에 대한 사랑은 지금도 늘 새롭게 타오르고 있음을 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랑의
열정에 있습니다. 사랑의 열정, 사랑의 순수, 열정과 순수는 함께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새롭게 강조되는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의 이중
계명입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학자의 물음에 주님은 이웃사랑까지 덧붙여 답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갈림없는 사랑, 한결같은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둘이자 하나인 사랑이되 우선순위는 하느님 사랑에 이은 이웃사랑이요,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표현되고 검증되기 마련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공감, 감동한 율법학자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함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라고 화답합니다. 호세아서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
신의의 사랑, 예지의 사랑입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거룩한 전례의 거부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의 삶에 바탕을 둔 참된 전례에 대한
강조입니다. 삶이 없는 전례가 아닌 삶과 전례의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전례는 공허(空虛)하고 전례가 없는 삶은 맹목(盲目)일 수
있습니다. 전례와 삶은 둘이자 하나요 함께 가야 함을 봅니다. 미사전례는 삶으로 확산(擴散)되고 하루의 삶은 미사전례로 수렴(收斂)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흡족해하시며 그를 격려합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율법학자는 지금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챘는지 궁금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화신이자 그 결정적 모범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항구하며 평생 예수님께 보고 배워 살아야 할 사랑의 이중계명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사랑입니다. 회개하라, 사랑하라 연장되는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와 사랑이지 죽으면 회개도 사랑도 끝납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회개뿐입니다.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영혼의
화장에 사랑의 기도와 회개보다 더 좋은 화장품도 없습니다. 사랑의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날로 아름답고 깊어지고 향기로워지는 영혼입니다.
호세아가 우리 모두에게 거듭 요청하는바, 회개입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입니다.”
한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살아있는 그 날까지 숨 쉬듯, 밥 먹듯 끊임없는, 한결같은 회개의 여정을 살아야 합니다. 사순시기야말로 집중적
회개의 시기, 정화와 성화의 시기입니다. 회개와 사랑입니다. 회개는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사랑의 축복이요 날로
새로워지는 사랑에, 삶입니다. 사랑하면 누구나 호세아 예언자처럼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예언자이자 신비가이자 영성가이자 시인인 호세아의 사랑의 시가 호세아서의 대미를 참 멋지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우리 하나하나
“이스라엘”에 주시는 주님의 미사축복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회개에 따른 하느님 사랑의 축복이 차고 넘칩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호세 14,6-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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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사랑이 으뜸가는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사랑이 으뜸 계명이라면 이런 말이 가능하겠습니다.
겸손한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만하지 않은 것으로는 더더욱 충분하지 않다.
또 죄와 관련지어 얘기하면 교만한 것은 그리 큰 죄가 아니다. 겸손하지 않은 것은 더더욱 그리 큰 죄가 아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리 겸손하고 교만하지 않아도 그것으로 충분치 않고 사랑치 않는 죄에 비하면 교만도, 겸손치 않은 것도 그리 큰 죄 아니다.
교만이 죄인 이유도 사랑치 못하게 하기에 죄이고 겸손이 중요한 이유도 겸손해야 사랑의 기초가 놓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난과 사랑의 관계도 얘기할 수 있고, 사랑과 모든 덕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얘기할 수 있다. 모든 덕은 사랑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모든 덕의 완성은 사랑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코린토전서 13장, 사랑의 찬가에서 다른 덕들의 완성인 사랑에 대해서 칭송을 하는 거지요. 사랑이 없으면 예언의 능력도
지식도 믿음도 소용이 없고, 반대로 사랑은 참고, 기다리고, 친절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그것을 알면 되고,
그것을 붙잡고 늘어지면 되는데 자주 하찮은 것에 매달리고, 하찮은 것에 걸려 넘어져 사랑하지 못함을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어제 너무 많은 일로 늦게 잠들고, 그래서 오늘 늦잠을 자 새로운 강론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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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루카 11,23)
<두 부류!>
오늘 복음(루카 11,14-23)은 '예수님과 베엘제불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내
편에 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고 구세주이신 하느님이십니다. '베엘제불'은 사탄의 우두머리요 마귀의 우두머리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참조) 곧 '회개하는 이들과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두 부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회개하는 이들'은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믿고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고, 예수님 편에 서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나는 어느 편이고,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가?'
오늘 독서(예레 7,23-28)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예레 7,23)
신약성경 필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요한 묵시록을 필사하고 있는데, 내일까지 필사하면 끝날 것 같습니다. 장차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인 요한 묵시록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녀들,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자녀들, 그래서 언제나 주님의 축복 안에 머물러 있는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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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8T32Vqh-Jq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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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첫째는 이것이다."(마르 12, 29)
새로운 삶의
물고를 트는
첫째는
우리가
하느님을
간절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과
넘치는 환희로
이끄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적으로
우리를
신뢰하십니다.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신뢰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사랑은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으로
들으시고
사랑으로
기다리십니다.
오염되어 있는
사랑을
정화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사랑을
지키는 것은
오늘의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디로
가야 할 지를
가르쳐 주시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가까이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알게 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 마음을
하느님께 바칠 때
하느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중심의
사랑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예수님 생애를
통하여
사랑으로 오시고
사랑으로
우리의 오늘을
새롭게 하시는
가장 좋은
사랑을 만납니다.
시작도 마침도
사랑이며
사랑은
사랑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사랑의 놀라운
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따르는
은총 가득한
사랑의 오늘
되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알게 되는
삶이며
십자가이며
구원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참된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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