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라도 대면 진한 독에 톡 쏘일 것처럼 시푸른 나뭇잎들.
오랫동안 불에 올려놓은 번철처럼 잘 달구어진 운동장에
자글자글 끓고 있는 햇살.
쉬는 시간이면 번철 위에 쏟아 부은 참깨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온 아이들.
그들의 함성과 웃음이 톡톡 튀어 오르면서
눅눅하게 진득거리던 더위는 잠시 햇솜이불처럼 보송해진다.
국어의 <말하기 듣기> 시간.
교과서 삽화엔 두 명의 아이들이 하교하면서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불량식품처럼 보이는,
막대가 달린 아이스캔디를 사 먹고 있다.
구름 위에서 한 소년이 두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를 땋아 내리고, 조선시대 복장을 한 소년은 <댕기동자>다.
내가 만약 <댕기동자>라면 두 친구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요?
오늘 단위시간에 배울 내용이다.
여름방학이 다 되어 가도록 제 이름 외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영경이가 손을 번쩍 든다.
영경이는 입학할 때 제 이름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보고도 그대로 베껴 쓰지 못했다.
나는 글자를 보고도 그대로 베껴 쓰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교직경력 20 년 가량 되어 처음으로 알았다.
제 성姓인 <이>를 숫자 <10>으로 쓰곤 하는 아이.
영경이란 이름도 <용경>이 되었다가 <영굥>이 되었다가
<용굥>이나 (양걍>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ㅕ, ㅛ, ㅑ의 모음이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자음 앞에 달리기도 한다.
내가 써준 글자를 그대로 보고 베끼는데도 그렇다.
그러나 발표는 무척 잘한다.
“나좀 돌라캐요.”
영경이의 말뜻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고개를 갸웃거릴 사이도 없이 아이들이 와르르르 웃는다.
<내게 좀 달라고 해요.>
비로소 영경이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이번엔 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그림의 보충설명을 한다.
“이 친구들이 먹고 있는 하드(그림 속의 막대 달린 아이스캔디)는
어쩌면 불량식품일지 몰라요.
찬 음식을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호가 손을 번쩍 든다.
“그러면요. 하드 말고 사탕 사먹으라고 해요.”
이번엔 내가 먼저 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다시 그림의 보충설명을 한다.
“이 두 친구는 조금 전에 급식소에서 점심을 먹었어요.
그래서 아직 배가 부르기 때문에
군것질을 하거나 간식을 먹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이 하드는 어쩌면 불량식품일지 몰라요.
찬 음식을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요.”
나는 유치원교사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 말한다.
“저요, 저요.” 막 손을 드는 아이들.
이제 녀석들은 영경이와 인호의 대답에서 무엇이 틀렸는가,
그래서 어떤 답을 말해야 하는지 알았겠지.
“그러면요. 고깔콘 사먹으라 해요.”
띠~융.
활짝 열어제낀 창문으로 그악스런 매이울음 때문에 너무 시끄럽다.
내 설명을 매미소리가 삼켜버린 모양이다.
난 창문을 닫고, 다시 천천히 설명한다.
“이 두 친구는 조금 전에 급식소에서 점심을 먹었어요.
그래서 아직 배가 부르기 때문에 군것질을 하거나 간식을 먹지 않아도 돼요.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댕기동자라면 이 두 친구에게 사탕이나 고깔콘을 사먹으라고 하겠어요?”
나는 다시 보충 설명한다.
감자칩, 무슨 초컬릿, 새우깡, 무슨 비스킷........ 오징어 땅콩.
대한민국 제과회사에서 만든 모든 과자이름이 튀어 나온다.
나는 다시 보충 설명을 한다.
“과자 이름을 말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 두 친구는........”
매미울음은 닫아놓은 교실 창문을 뚫고 쏟아져 들어올 정도로 그악스럽다.
“오징어 땅콩도 아니면요. 훈제 오징어요.
나는요. 수영장 갈 때 훈제 오징어 가지고 갈 꺼예요.”
나는, 나는, 나는, 나는......... 수영장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갈 거예요.
스물 한 명의 아이들이 무엇을, 무엇을, 무엇도, 무엇도,
가지고 간다고 손도 들지 않고 쏟아낸다.
매미들이 일시에 닫아 놓은 교실창문을 뚫고 날아 들어온 것 같다.
“그만, 그만. 예쁜 사람들. 쉬~잇. 우리 친구들.
자꾸 이러면 우리 반만 수영장 안 갈 거예요.”
나는 교탁을 두드린다.
수영장 안 갈 거란 내 엄포에 매미들이 깜짝 놀라서
진동막을 마구 두드리던 날개짓을 멈춘다.
그러고 보니 여름방학도 며칠 남지 않았다.
첫댓글 오래 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의 <교단일기>에서 발췌했습니다.
지난 일기를 읽는 동안 입가에 웃음이 번집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영경이도 예쁜 처녀가 되었을 거예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네, 시온님.
감사합니다.
어린 애들과 생활하는 선생님들은 천사의 마음을 가져야 될거 같아요 개들 눈높이를 맞출려면♥
후훗.
그래요.
그들 눈높이에 맞추자면 저도 어린애가 되어야 하더라구요.
천사의 마음은 아니고...... 그냥 행복했죠.
고사리 같은 손을 번쩌 들고 종달새처럼 재잘 거리는 듯한 교실 풍경이 그려집니다.
첫애가 초등 입학하고 첫 학부모 공개 수업 시간에 전 여러 학부모들 속에서
알수 없는 뜨거운 그무엇이 북받쳐 올라 몰래 눈가를 닦았던 순간이 떠 오릅니다.
눈물 겹도록 그리운 내 젊음의 순간을 생각나게 만드는군요.
그랬을 거예요.
전 큰 아이의 입학통지서 받고 울었는 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 그렇게 멀리 초등학교를 다니셨군요.
동반자님.
그리 읽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늦은 댓글이지만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별꽃님의 지나간 일기를 읽으며 슬그머니 웃으니 옆에 동료가 의아하게 쳐다보는군요. ㅎ
느닷없이 상록수의 저자 심훈선생이 낙향하여 머물던 필경사도 생각나고... ㅎ
즐겁게 읽었습니다. ㅎ
선생님.
그날 애들의 답을 끌어내느라 전 목이 쉬어 버렸답니다.
<얘들아, 그건 불량식품이야. 그리고 군것질을 하면 안돼.>라고 답을 가르쳐 주었으면
전 목이 쉬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벌써 여름방학이 바짝 다가왔군요.
교직에 계셨다니 행사 따라 떠오르는 추억도 많으실 테지요.
고운 글 잘 읽었어요.
네, 석촌님.
방학이 다가오니 지난 시절이 기억나는군요.
댓글, 감사합니다.
교직에 계신분들은감동어린 사연들이 많을 것 같아요.
특히 문학도이신 하얀꽃님의 이야기 보따리는 끝이 없을것 같습니다.
티없이 맑고 순진한 글 잘 읽고 갑니다.
낭주 방장님.
하루 하루가 동화책 한 권이랍니다.
늘 수고 많으십니다.
1학년이 끝나도 한글을 깨치지 못하는 아이를 얼마전까지 과외하였습니다
제가 못 가르쳐서인지 결국 한글을 다 깨우치지 못하고
어머니께서 포기하셨습니다
전 과외니까 비용대비 비싸고 이왕 효과 없는거 학습지선생님이 훨씬 경제적이니 바꾸셨습니다
제가 판단건테 특수교육이 필요한 아이인데 어머니께서는 차마 인정하지 못하시나 봅니다
늦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데....
특수교육이란 바로 그런 늦은 아이를 위한 교육인데 ...
정신과를 미친 사람만이 가는게 아니듯이...
그래도 그 친구는 집이 부자라서 다행입니다
정말 가난한 친구는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지....
별꽃님은 공교육 ..전 사교육 ..ㅎㅎ
또 다른 재미가 솔솔 합니다
그래요, 고운물빛님.
지진아 수준의 아이의 한글을 깨우치는 것이 1-2년으로 안될 때도 있습니다.
어머니들은 아이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죠.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받아쓰기만 백점 받으면 자기 아들이 천재인 줄 알고,
다른 모든 공부도 잘 하는 줄 아는 대부분의 학부모님들.
이제 우린 애를 다 키웠지만.....
우리도 그랬겠지요?
양주동의 '질화로'에서 ,
늙은 부모 앞에서 '꼬끼요 도, 당국당'이라고 읽는 서당아이보다 더 천진난만하고 풋풋한 아이들.
매미들보다 더 귀가 닫혔어도
마냥 행복한 선생님. ^^
그래요, 아나키스트님.
저는 다시 태어나도 초등교사로 태어나고 싶어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지적성숙님.
지적성숙님도 교직에 계시잖아요.
비록 아주 큰학생들을 가르치시지만요.
연수는 잘 다녀 오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