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뒤흔든 성 스캔들
김만중 지음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간통 사건을 돋보기로 들여다 본 것이 주 내용이다. 조선이란 사회는 성리학이 지배한 사회이다. 성리학은 학문 이상으로 그 시대 이데올로기였다. 그렇게 엄격한 자기 절제가 필요했던 시대 성(性)이란 과연 어떤 식으로 접근되어졌을까?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의외로 간통 사건이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어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시와 궁녀 혹은 내시와 세자빈, 그리고 궁녀들의 동성애, 그리고 이름만으로도 고고한 학자 집안에서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성 추문 사건들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왕이 거처하는 궁궐은 권력의 상징이다. 그곳에서 왕을 보필하는 궁녀와 내시들은 성적으로 매우 억압된 이들이다. 내시는 태어나면서 성적 불구자였거나 아니면 거세된 자들을 말한다. 궁녀들 역시 왕의 성적 만족을 위해 성욕이 거세된 여자들을 말한다. 이들에게는 오직 임금 이외 어떤 다른 남자와도 성적 교감을 하면 안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의 크고 작은 간통 사건들이 등장한다. 한쪽은 성적 도구가 거세된 자들이고 한쪽은 성욕이 거세된 자들이지만 이들과 관련된 성 스캔들은 그야말로 충격 이전에 측은함으로 다가선다.
▶세자빈 현빈 유씨 사건
태조2년 6월 14일, 임금(태조 이성계)은 성 추문과 관련된 세자빈 현빈 유씨를 내쫓고, 내시 이만을 목 베었다. 그런데 대간과 형조 관리들이 그 이유를 자세히 묻자 그들을 모두 옥에 가두고 얼마 뒤 모두 관직을 박탈하고 유배 혹은 고향으로 내쫓았다. 실록에는 그 두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지었는지 자세한 내막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임금은 두 사람과 관련된 추한 소문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에 극도로 불쾌하게 생각하여 사건 진상을 묻는 대간들과 형조 관리들을 모두 내치고 벌을 준 것이다. 추측하건대, 아마도 두 사람은 대궐 안에서 간통을 하다 발각되어 내시 이만은 목 베이고 세자빈 유씨는 사가로 내쫓김을 당한 것으로 보여 진다. 당시 의안대군 방석(태조의 막내아들)이 열한 살 너무 이른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어 현빈 유씨를 맞이했지만 남녀 간의 정을 통할 수 없어 세자빈이 내시와 간통 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내시 정사징의 간통 사건
태종17년 8월 8일, 내시 정사징이 간통한 여인은 상왕(정종)이 가까이 했던 기매였다. 그런데 이 간통 사건은 좀 더 복잡한 정치적인 사건과 연루되어 있었다. 정종이 기매라는 여인을 가까이 한 것은 왕으로 즉위하기 이전 일이지만 그 후 기매는 정종의 후궁 대접을 받고 있다가 불노라는 아이를 탄생시킨다. 그런데 그 아이가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정종의 아들이라 생각하는데, 정종 혼자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우긴다. 정종에게는 정실의 자식이 하나도 없었고, 모두 후궁의 자식만 있었는데 동생(이방원)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하던 상황에서 원손이 태어난 것에 부담감을 느낀 정종이 불노를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우긴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고 불로라는 아이는 조박(태종 이방원의 동서)에게 키워진다. 그런데 태종 10년, 불노가 상왕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다시 도성 안에 퍼져 대궐이 시끄러워졌다. 그런데 이숙번 등 왕의 친위세력들은 이것이 조박이 꾸민 역모사건이라 운운하며 불노와 조박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금(태종 이방원)은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조박은 공신이고 왕실의 근친인 관계로 불문에 부치는 대신 불노를 민가와 떨어진 절에서 살도록 조처했다.
그리고 태종 17년, 기매의 간통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러므로 기매의 간통 사건은 정종에 대한 한 여인의 복수심에서 벌어진 것이다. 기매는 인덕궁(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나 기거하던 곳)에서 감금되다 시피 갇혀 있던 몸인데 고려 왕실에서 내시로 활동하던 거세되지 않은 듯한 정사징이 그녀와 간통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한편 실록에서는 정사징이 고려 공양왕 때부터 내시 같지 않다는 말이 있었으며 태조 4남 방간의 첩과도 간통을 일으킨 적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내시 임승부 탄핵 사건
이 기록도 그 내용을 자세히 들어다보면 충격적이다. 세종1년 9월 보름날, 달이 훤하게 뜬 대궐 청정에서 임금이 신하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있는 상황에서 내시 임승부가 술에 취해 평소 정분을 통하고 있던 기생 봉소련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음행을 저지르다 다음날 대간들의 집중적인 탄핵을 당한다. 그런데 임금은 어려서부터 임승부를 좋아한 나머지, 당연히 교수형에 처해져야 마땅하지만 장 1백대만을 치게 하고 하동현 관청 노비로 보내 버렸고, 봉소련도 공주의 관청 기녀로 내쫓았다.
▶가희아 사건
태종 7년 황상과 김우가 가희아라는 대궐 기녀를 놓고 벌건 대낮에 싸움이 벌어졌다. 황상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 회군에 공을 세운 공신으로 그 권력이 대단했으나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떠오른 젊은 김우와 기생을 놓고 다툼을 벌이다 임금(태종)에게 미움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가희아가 나중에는 태종의 후궁으로 첩지를 받고 가희옹주로 봉해지는 일이 벌어진다. 그만큼 가희아의 미모와 남자를 끄는 매력이 대단했다는 이야기인데 그래도 그렇지 한때 공신들 간의 기생 쟁탈전에 비록 가벼운 벌을 내렸지만 처벌을 한 임금이 그 대상자였던 여자를 취하니 이도 또한 기막힌 일이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일이 성종 집권 시절에도 벌어진다. 성종 11년, 남흔이 매화를 간통하여 탄핵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매화는 효령대군의 첩이었는데 남흔이 그녀와 관계를 가진 일이 사헌부 조사에서 들통 나 탄핵을 당한다. 유독 종친들의 성 스캔들이 많았던 성종 시절, 효령대군은 아흔 살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첩을 두고 살았는데 임금은 매화가 과연 효령대군의 첩이었는지 궁금하여 효령대군의 손자들을 불러 그 진위를 파악했다. 그런데 매화가 효령대군의 침실을 보살피는 여종이라 말하자 효령대군의 첩으로 인정한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남자라도 시침을 드는 여종은 이미 첩이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 매화가 나중에는 궁녀로 차출되어 성종의 후궁으로 발탁되고 숙의라는 내명부 첩지까지 받게 된다. 이 또한 기가 막힌 일이다. 할아버지(효령대군)를 가까이 모시던 여인을 손자가 그것도 임금이 취했으니 그 아들 연산군의 성적 문란함만 욕할 일도 아니다.
▶초요경 사건
세조 때 가장 유명했던 기녀 초요경은 지금으로 말하면 가장 인기 있는 여자 연예인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녀의 미모와 노래에 반해 권력을 가진 종친과 공신들은 모두 그녀를 가지려고 안달하였다. 특히 종친들 가운데는 세종의 적자 서자들이 순서를 가리지 않고 관계를 가졌다. 처음에는 익현군 이관(세종의 서5자)과 정을 통하고 다음으로 평원대군 이임(세종의 7째 적자)과 관계를 갖다가 그가 죽자 화의군 이영(세종의 서장자)과 사통하였다. 임금(세조)은 그런 초요경의 행실을 비난하며 그녀를 궁궐 기녀에서 내쫓았다가 다시 불러들였는데 이번에는 계양군 이증(세종의 서2자)과 간통을 하여 임금이 "어찌 종실의 자손들이 초요경에게만 정신이 팔려 풍속을 어지럽히는가?"라며 한탄한 내용이 실록에 실려 있다.
초요경은 궁중악의 유일한 전승자로 박연의 수제자나 다를 바 없었다. 사실 초요갱은 기생이라기보다 궁중예술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높은 긍지를 가지고 명성이 쟁쟁한 사대부들을 눈 아래로 보았다. 최세원이 초요갱의 명성을 듣고 구애를 했으나 초요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최세원은 이를 갈고 있다가 과거에 급제를 하자 유가(遊街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3일 동안 장안을 돌아다니면서 구경시키던 일)를 하면서 장통방으로부터 내려왔다. 최세원은 검붉은 말을 타고 초요갱의 집 앞에 이르러 우부에게 말했다. “잠깐 들을 말이 있으니, 너는 소리를 높여 어허랑(유가 때 배우들이 부르던 노래)을 불러라.” 최세원의 지시에 우부들이 일제히 어허랑을 부르는데 그 소리가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내다보자 초요갱도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왔다. 초요갱은 검은 머리를 되는 대로 꽂아 올리고 동백기름이 흐르는 초록색 겹옷을 입은 채, 붉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네가 항상 교만하여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오늘은 어찌된 일인가. 내가 예조좌랑이 되면 너는 나의 종아리채를 감당해 내겠느냐.” 최세원이 한껏 거들먹거리며 초요갱에게 호통을 쳤다. 궁중악을 담당한 부서는 예조다. 궁중악의 책임자가 되어 초요갱의 엉덩이를 때리겠다는 최세원의 심보는 가소롭기까지 하다. “흥! 이제야 엉덩이 위에 먼지를 털게 되었구나.” 초요갱이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초요갱은 장원급제를 하여 서슬이 퍼런 최세원의 위협에도 눈도 깜박하지 않았던 것이다. 초요갱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그 동안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성 스캔들 뒷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간혹 아무리 공신력을 인정받는 실록의 내용이라 하지만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혹은 과거의 정적의 대상이었던 인물에 대한 인신 공격적인 성 스캔들 사건도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채 실려 있는 경우도 허다함을 감안해도 이 책에 있는 내용들은 충격적인 것들이 상당하다. 역사는 항상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 태양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밝은 면을 강조하기 위해 애써 어두운 면을 감추려 한다면 그것 또한 올바른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자세는 아닐 터이다. 한낱 사사로운 간통 사건을 들여다보면 그 가운데 조선 사람들의 성과 관련된 생각과 당시 생활사를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간혹 종친이나 문중에서 들고 일어날까 겁도 난다. 하지만 이 책이 어느 한 집안이나 문중을 헐뜯고자 기획된 책은 아니며 다만 초상화에 박제된 듯한 조선의 선비들도 희노애락을 가진 한 인간이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 책 내용에 무슨 큰 불쾌감이나 불명예를 갖지는 않을 터이다.
지은이 김만중은 1965년 서울 출생으로, 농업정보신문과 월간 골든에이지 실버관련 잡지사 등을 거쳐 인문 경영관련 출판사에서 기획 일을 하였고, 현재 역사관련 글들을 쓰고 있다. 현재 한경리쿠르트 <군주처세술>을 연재하고 있다. 지난해 출간한 <조선 군주의 정치기술>이 간행물 윤리위원회 1월 읽을 만한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 동안 쓴 책으로는 <최고의 승부사 빌 게이츠> <군주 리더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