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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고넬료, 소록도 자혜병원 제2대 원장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
해방 후, 이승만대통령 치하에 일본인에 관한 현창비(顯彰碑) 및 기념비는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당시,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땅 속에 숨겨졌다가 20여년 뒤 다시 세워진 일본인의 비(碑)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경기도 수원시 교동에 있는 노리마츠 마사야스(乘松雅休, 1863∼1921)의 비석이고,
또 하나는 소록도 자혜의원장인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의 창덕비이다.
마사야스는 일본 최초의 기독교 해외전도자로 1896년부터 조선인에 대하여 조선어로 오로지 복음만을 전했다.
출처 : 한석희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전도} 일본기독교단 출판국(1985년) p.15-84,
한석희 {일본의 조선지배와 종교정책} 미래사(1988년), p.133-155 참조.
노리마츠는 기독 동신회(同信會) 전도자였고, 하나이 원장은 한국의 한센병환자를 마음속으로부터 사랑했다,
한국의 한센병환자들도 그러한 하나이 원장을 추앙했다.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는 일본인 원장으로서는 조선인 한센병환자들의 추앙을 받은 유일한 인물로
육군2등군의정(軍醫正)(중령)에 정5위 훈3등으로 고등관 3등의 신분이었다.
1921년 6월23일에 전라남도 소록도자혜의원장에 임명되었으며 전임의 초대원장 아리카와 토오루가 1등군의(대위) 정6위 훈5등이었음에 비해 육군의 계급·위계가 높았다. 소록도에 원장으로 부임했을 때 58세였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령의 부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군의 일반적인 특성상 전투병과가 아닌 전투지원병과의 경우 야전 전투병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급이 느린 것을 감안하였을때 일제시대에 58세의 나이와 의무부대 중령이란 계급은 장성급과 군경력을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방부 군종감실에도 현역 장성은 없지만 군경력으로만 본다면 군장성과 어깨를 견줄만한 영관급 장교들이 존재하고 있음. 아마도 전역이 가까운 전역 예정군인에 대한 예우차원의 인사조치였던것 같습니다)
1929년 10월16일 66세로 이 섬에서 사거(死去)하기까지의 8년 4개월간, 아래의 창덕비의 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인 한센병환자의 의료와 생활개선에 힘썼다. 창덕비(彰德碑)는 개축된 초창기 진료소의 동측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하나이원장 창덕비(花井院長彰德碑)]라고 표면을 음각한 흑색의 석비(石碑)는 높이가 3미터 정도로, 뒷면에는 하나이 원장의 생전의 행적이 새겨져 있다. 하나이 원장이 죽은 다음해의 1930년 9월에 세워진 것으로 발문(跋文)은 제3대 원장인 야자와 슌이치로(矢澤俊一郞)가 쓰고 있다. 전문은 214자의 한자로 씌어져 있지만, 참고로 현대문 번역문을 다음에 소개한다.
비석 및 한자전문 출처 : 小鹿島病院生活資料館
http://www.eonet.ne.jp/~yokati/siryoukan/sorokuto%20siryousitu.htm
국문 해석
전라남도 소록도 자혜의원은 대정(大正)5년(1916) 2월, 명치천황의 하사금을 기금으로 설립된 조선내의 유일한 나병 전문병원이다. 처음에 아리카와 토오루(蟻川享)가 원장으로 부임했고, 같은 해 6월에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가 제2대 원장이 부임하여 예의(銳意) 원무(園務)를 혁신했으니 모든 언행은 자애(慈愛)에 가득 차 있었다. 그를 열거하면 의복과 식량의 개선이 그 하나이며, 통신·면회의 자유가 그 둘이며, 중증환자실의 신설이 그 셋이며, 두 번에 걸친 병원의 확장이 그 넷이다. 위안회(慰安會)의 창설이 그 다섯이며, 정신교육을 베풀어 오락기관을 마련한 것이 그 여섯이며, 상조회(相助會)의 조직이 그 일곱이다. 이로 인하여 700여명의 환자들이 별세계에서의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이원장이 소화4년(1929) 10월16일 갑자기 서거함으로서 환자들은 곡읍(哭泣), 비분(悲憤)했으며, 서로 상의하여 이 비를 세웠다.
소화(昭和) 5년(1930) 제3대 원장 야자와 슌이치로(矢澤俊一郞) 찬(撰)
하나이 젠키치가 소록도에 부임한 2년 뒤인 1923년에 하나이는 [소록도 자혜의원의 나환자통계]라는 제목의 논문을 {조선의학회잡지, 제42호}(4월호)와 {만주의 의계(醫界), 제28호}(7월호)에 발표하고 있다. 그것은 [전라남도 소록도자혜의원에 수용된 한센병환자 145명에 대한 통계적 관찰]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자기 병원의 환자를 관찰하여 그것을 의학회에 발표한다는 것은, 당시 한센병 진료의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나이 젠키치를 평가할 경우, 또 하나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2번에 걸치는 병원의 확장(1923년 및 1927-28년의 신축공사)]에서 볼 수 있는 원장의 처해진 입장, 즉 자신의 바탕이 되는 [존재]라던가 혹은 군인으로서의 계급적 신분을 뛰어넘는 어려움이다. 하나이는 조선총독부의 유일한 [나]요양소의 기관장(長)이었다. 일제하 조선에서 조선인의 한센병 발병이 급증하고, 부랑·걸식, 아사·동사하는 한센병자가 증가하던 현실을 보더라도 가능한 한 많은 환자를 가까이에 인수하고 싶어했음에 분명하다.
당시의 소록도 자혜의원의 수용인원 정원과 실제 수용인원과의 현황은 어떠했을까.
년도 정원 수용인원
1917 100 73
1918 100 85
1919 100 89
1920 100 95
1921 100 121
1922 100 171
1923 100 196
1924 125 196
1925 125 241
1926 125 249
1927 250 250
1928 450 443
1929 750 745
초대 아리카와 원장시대(1917-1920년)에는 정원 100명을 밑도는 73-95명이었던 수용인원도, 하나이 원장시대 전반에는 수용인원이 정원을 크게 상회하기 시작하여, 1923년 이후에는 2배쯤으로 불어난다. 그리고 신축·증축되어 정원이 증원된 1929년에는 소록도에 부임된 당시의 6배가 넘도록 수용인원이 증가되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29년도의 {소록도자혜의원 개황}에 의하면 [건물]의 신축·증축의 평수는 388.69평을 시작으로 마지막엔 68개동 1,889.96평으로 확충되었다.
한편, 섬의 원주민들은 한센병환자에 대한 기피감정과 함께 무엇보다도 소록도 자혜의원 확장에 의해 선조전래의 토지, 가옥, 묘지 등을 강권에 의해서 빼앗김으로서 생활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불안과 현실이 있었다. 1926년 9월에 조선총독부·전라남도에 의해 [소록도 자혜의원 확장에 따른 토지취득]을 통보 받은 섬의 농어민들은 반대투쟁을 전개했으나 권력의 탄압에 지고 만다. 섬 주민들이 항의하기 위해 원장관사로 몰려든 9월18일로부터 6일 뒤인 9월24일, 하나이(花井善吉)원장이 조선총독부 경무부 위생과장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전라남도 소록도 자혜의원]의 전용 편지지에 펜으로 쓴 편지로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편지 전문
배계(拜啓)
진정인들에 의한 당 병원확장지 매입에 대한 반대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으나, 소관의 부덕의 소치로 18일의 충돌이 야기되고, 경찰관 가운데서 수명의 부상자까지 나오게 된 점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말씀드릴 점은 당일 오이카와(及川) 서장 이하, 출장 나온 코바타케 형사가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병원 보호를 위해 분투함으로서, 소관(小官) 이하 직원일동 및 환자 모두가 안전할 수 있었던 바, 병원 측으로서 진심으로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경찰관 중에 부상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한사람의 부상자도 없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매입상의 사무에 좋은 영향을 미쳐, 일의 진척이 빨라진 감도 없지 않습니다. 이 점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상 경찰관들도 경과가 좋아 5명 모두 치유되었으므로, 이에 대해서도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누락된 부분은 각 도(道)로부터의 보고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국장, 정무총감각하에게는 귀관께서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쁜 관계상 이만 줄입니다.
9월24일 하나이(花井)원장
하나이(花井)원장의 한센병환자를 생각하는 선한 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덧붙여 말하자면 일본나학계의 나예방법 폐지요구의 통일견해(1995년 4월13일)에서 말하는 [구라(救癩)의 기치 아래 격리를 최선책으로 믿고, 그에 생애를 바친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조선의 [나(癩)]정책과 의료에 관여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선한 마음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역사의 현실이다. 그는 조선총독부 경무부의 이시카와(石川) 위생과장에게 보낸 앞의 편지 속에서 “경찰관 중에 부상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한사람의 부상자도 없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매입상의 사무에 좋은 영향을 미쳐 일의 진척이 빨라진 감도 없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이 원장 때인 1926년 9월의 토지매입과 병원확장공사에 의해, 소록도 전체의 1/3이 자혜의원 부지가 되고, 500평 정도에 불과했던 병원건물이 일거에 1,300여평으로 신, 증축, 확장되었다. 수용환자를 생각하는 하나이(花井)의 [선의]는, 그 후 조선총독부의 의향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나예방협회에 의해 소록도 전체가 매수되어, 세계 최대규모의 한센병환자의 격리의 섬을 만드는 길을 열게 된다. 1933년 6월, 소록도의 150여호, 900여명의 주민 전원이 섬 밖으로 이전되고, 조선 전국으로부터 6,000명이나 되는 한센병 환자가 이 섬에 강제수용 되는 것이다. “격리를 최선책으로 믿고, 거기에 생애를 바친 사람들의 마음까지를, 우리들이 유린할 권리는 없다”라고 일본나학회(현·일본한센병학회)는 말한다. “우리들이 유린할 권리는 없다.”
라는 것은 무엇을 가르키는 것일까?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29년도 {소록도 자혜의원 개황}에 게재되어 있는 [북병사 예배당에서의 전도자와 그리스도인 환우]라는 제목의 한 장의 사진에 나와 있는 [소록도 북병사 예배당에서의 목사와 신자](1929년도 {소록도자혜의원 개황}을 묘사하면, 두 사람의 전도자와 함께, 86명의 기품 있어 보이는 환우들의 모습이 보이고, 이 남녀 환우들은 모두 한국 고유의상인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를 입고 버선을 신고 신발을 착용하고 있으며, 여성환자들은 머리칼을 예쁘게 좌우로 가르고 3열로 늘어서 있다.
소록도 자혜의원이 창설되었을 당시, 초대원장인 아리카와는 수용환자들에게 일본식 생활양식을 강요했다. 입원과 동시에 환자들이 입고 있었던 한복을 벗게 하고, 하오리, 하카마, 오비, 훈도시, 게다 등으로 갈아입게 하였다. 식사도 일본식 그릇에 젓가락만을 사용토록 하고, 다꾸앙을 먹도록 했으며,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시는 카미타나(神棚) 앞에서 기도하도록 했다. 이것이 식민정치하의 조선 나환자들에게 강요된 초대원장 아리카와의 요양생활의 방침이었다.
하나이(花井) 원장의 부임 3개월 후인 1921년 가을, 그는 광주, 부산, 대구, 세 곳의 기독교 의료선교사들이 경영하는 한센병요양소를 시찰했다. 그리고, 아리카와 원장의 병원운영방식의 시정과 개선에 임했다. 옷을 종래의 한복으로 되돌리고, 중앙배급식이었던 식사도 각 병동별로, 각자 환자의 입에 맞은 것을 먹도록 했다. 자혜의원 직원들에게는, 환자들을 멸시한다던가 학대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엄벌할 것을 경고하여, 병원내의 환자와 직원 사이의 하나됨을 목표로 하여 노력하였다. 복음이 소록도에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것은 하나이 원장의 시대이다. 1913년 10월8일, 당시 전라남도 광주에서 전도하고 있던 타나카 신사부로(田中眞三郞) 전도자(성결교단·홀리네스)가 조선총독부의 포교허가를 얻어 소록도로 들어가, 이틀 간의 집회를 가진 것이 교회설립의 효시가 되었다. 나가시마 애생원의 아케보노(曙)교회의 전도자인 오구라(小倉兼治)가 쓴 {세토(瀨戶)의 여명}(1959년)에 의하면, 시오자키(鹽崎逸野)는 조선으로 건너가, 이상적인 크리스챤 나환자마을을 건설하려 했으며, 한센병환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타나카 신사부로와 헌신의 믿음을 같이 하고자 결혼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하나이 원장도 야외에서 기도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환자를 불쌍히 여겨,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신사를 뜯어고쳐 교회 예배당으로 사용할 것을 허용했다.
하나이는 {소록도자혜의원 개황}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원의 시설로서 오직 믿음에 귀의하기 위한 예배당을 설치하여 매월 1회, 이틀 간 복음전도자를 초빙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나, 그 때마다 고액의 비용이 필요하여, 고문(顧問)이나 강화(講話)를 들을 기회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p.22-23).”
1926년 4월부터 설립된 [환자위안회]의 회비 가운데서, 1929년도에는 [일반위안비]라는 명목으로 205원 80전을 지출하여, 그리스도인 환자들을 원조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섬에 뿌리를 내린 복음의 씨앗은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환우들이 증가함에 따라 천조대신의 카미다나(神棚)는 완전히 뜯어내어지고, 교회예배당으로 환골탈퇴 되었다.
개원당시의 신사모습(좌) 와 예배당(우)의 모습
(사진이 기제된 사이트에는 식민시대의 유적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죄측사진에 보이는 하얀색으로 보여지는 양쪽기둥같아 보이는 신사입구에 설치되는 일본식 통과대문인 도리이(とりい)가 우측사진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성경말씀에 입각하여 산당을 헐고 예배당으로 사용하려 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음)
하나이 원장은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전술한 {소록도 자혜의원 개황}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보인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교육을 받지 않은 자들이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지덕함양을 목적으로, 환자들 가운데서 학식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남북 양사(兩捨) 공히 보통학교 교과서를 제공한 즉, 점차로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자들이 늘어남은 진정 기뻐해야할 현실로, 그 학생수는 187명을 헤아리게 되었다(p.28쪽).
p.s) 이글은 다음카페 “하얀마을2”의 카페지기 하얀마을님의 “격리정책의 전개” 라는 글을 복음적 시각으로 이해하고자
일부용어와 단어들을 첨삭하고 소록도병원에 관한 일본사이트에 있는 사진자료와 글들을 추가한 내용입니다.
원문과 비교하여 소록도에 대한 진실에 훼손에 대한 의도와 내용이 없음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쉐카이나코리아카페 회원 사브낫바네아 배상
참고 사이트
국내
http://lovealm.com/bbs/board.php?bo_table=z3_1&wr_id=114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eamay&logNo=70025309653
http://cafe.daum.net/kachs/CkQ2/297?docid=P3vP|CkQ2|297|20080214201458&q=%C7%CF%B3%AA%C0%CC%20%C1%A8%C5%B0%C4%A1
일본
http://www.eonet.ne.jp/~yokati/sorokuto%20FW/jinnjya.htm
http://www.eonet.ne.jp/~yokati/siryoukan/sorokuto%20siryousitu.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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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매우 유익한 자료를 올려주셨습니다. 1922-1929년 연간에 수용환자의 급격한 증가가 인상적입니다. 과연 대단한 고넬료임에 틀림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허용하며 신사를 예배당으로 바꾸는 것이 일본인들에게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상상됩니다. 그런데 하나이 원장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는 명확히 나오지 않은 것같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은 추정할 수 있습니다만. 일본인들의 합리적인 경영과 행정, 정직성 등이 엿보입니다.
저도 예배당의 건립과 관련된 하나이 원장의 믿음을 엿볼 수 있는 글을 찾으려 했지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역사시료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이길 바라기는 제 욕심인 것 같네요. 하나이 원장이 믿음의 정체성을 일부러 숨기고 병원을 꾸려가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의 믿음으로 행한 족적은 남았지만 신앙고백에 대한 것은 나중에 천국가면 수소문(?)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거기선 일본어가 필요없으니 먼저 만나게 되시는 분들이 알려주시면 좋겠네요~~ ^^ 정말 고넬료처럼 행적뿐만이 아니라 믿음까지도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행동이 외국인에 대한 배려로 한 행동인지 정말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한 행동인지는 정확히 알아볼수 없지만...일본인들이 신사를 아주 소중히 여긴다는고 들었습니다. 그런것을 봤을때 예수님을 믿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런데 일본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참으로 신사적이고 양심적이며 매우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하나이 원장은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됩니다.
여기 북미에서는 일본인들은 예의바르고 착하기때문에 예수 안믿어도 천국갈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ㅎㅎㅎㅎ. 미국에서는 일본 학생이라면, 별로 따지지 않고 홈스테이를 받아주거나 방을 빌려줍니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일본을 기독교 국가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하면 한국인들은 공연한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가득차있다고 말합니다.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서 지배를 당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한국인한테 그런의식이 생긴것이죠..원래 안 좋은 것이긴 한데...근데 기본적으로 느낀점은 일본인들이 예상외로 정직한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한국사람과 틀리게...그런 부분이 미국인들에게 좋게 보인것 같습니다. 솔직히 일본정부가 문제인것을 한국인들은 일본사람 나쁘다고 몰아 붙이는 경우가 많죠..진짜 일본 서민들은 어떠한지 만나보지도 않았으면서 근데 미국에서 정말로 예수님 안믿어도 일본사람은 천국갈수 있는것 처럼 말했다면 영적으로 참 문제이네요...그냥 순수하게 일본사람 좋아한다는 발언은 아닐까요?
제가 침례교 사이트에 들어가서 토론하다 보면 일본인들은 당당히 자기가 일본인이라고 밝히면서 토론하는데 곧바로 팬들이 많습니다. 제가 주한 미군에 대해 한국민들이 시위하는 것을 비난하기에 제가 옹호하면서 그 배경을 설명하니까, 잘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곧바로 일본 옹호합니다. 위안부 문제는 그냥 넘어갑니다. 미국이 남북 분단에 책임이 있다는 것도 무시합니다. 그러면서 한국을 배은망덕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입니다. 저는 이것을 카톨릭적 시각이라고 분별합니다.
자국입장에서 생각하는것을 조심하긴 해야 하는데 미국인 입장에서는 그냥 순수하게 막무가내로 일본인을 좋아해서 그런 발언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한국인들도 무조건 일본인 싫어하는 것과 비슷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