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길
오월이 가는 다섯 번째 토요일은 일찌감치 시간을 비워두었다. 내가 속한 문학 동인회에서 안동 일대로 기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매달 셋째 주 토요일 동읍 원로회원 분재원에서 공부방이 열리는데 올해 들어 한 차례도 나가질 못해 송구했다. 동호회에선 상반기는 시화전을 열고 하반기엔 작품집이 나오고 있다. 나는 카페에 내 이름으로 개설된 글방에 부지런히 글을 올리는 정도다.
이른 아침 올해 들어 이르게 닥친 더위를 식혀주는 비가 부슬부슬한 속에 창원시청 앞으로 나갔다. 모처럼 뵙는 회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전세버스는 동마산 인터체인지 못 미친 곳에서 마산지역 회원들을 태웠다. 회원들은 여든 가까운 은퇴한 교장부터 중년의 주부층까지 다양한 연령층이다. 내 위치는 이 모임에서 막내급인데 자주 얼굴을 내밀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행사를 기획한 집행부는 작은 부분까지 소홀하지 않고 묵묵히 수고했다. 차 안에서 하루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안내 받았다. 섬세한 손길로 준비한 간식이 나왔다. 총무는 달걀을 맛있게 삶아오기도 했다. 버스는 현풍과 군위 휴게소에 잠시 들렸다가 곧장 달려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수도인 안동으로 향했다. 남안동 나들목으로 빠졌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 곳곳엔 안동 간고등어 식당들이 눈에 띄었다. 시내를 가로질러 안동댐 아래 월영교로 갔다. 달빛이 은은히 비칠 밤이면 더 아름다웠을 나무다리엔 마침 엷은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사백 오십 년 전 무덤에서 나온 한지에 쓴 한글편지와 머리카락을 잘라 삼은 미투리의 주인공을 기리는 다리였다. 고성 이씨 남편을 여읜 원이 어미의 애틋하고 가슴 뭉클한 사연이다.
월영교를 둘러 서후면 천등산 아래 봉정사로 갔다. 의상의 수제자 능인이 천등굴에서 종이로 봉황을 접어 날려 보내 떨어진 자리에 세운 절이라는 설화가 전해왔다. 우리나라 현존 목조건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극락전과 곁의 대웅전은 국보로써의 당당한 위용을 갖추었다. 멀리서 온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의 바쁜 방한 일정 속에서도 과연 다녀갈 만한 고즈넉하고 때 묻지 않은 절이었다.
절간 들머리 소나무 숲길 곁 명옥대에선 퇴계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았다. 일행이 탄 버스는 풍산 들녘이 바라다 보이는 황소곳간에서 소고기전골로 맛난 점심을 들었다. 식도락가로 알려진 원로회원께서 만족스럽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식후 소산리 소재한 청원루에 들렸다. 병자호란 때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김상헌이 낙향해 은둔한 안동 김씨 집성촌이었다. 소나무 언덕엔 삼구정도 있었다.
우리들은 일일 기행의 마지막 여정은 물돌이 마을이었다.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동구 밖에서 내렸다. 나는 일행들과 떨어져 강둑길을 걸어 건너편 부용대부터 바라보았다. 과연 명승지다웠다. 산기슭엔 겸암정사와 옥연정사가 보였다. 강나루를 지나 만송정 숲을 지나 서애 유성룡의 형제의 자취가 남은 충효당과 양진당에 들렸다. 주말을 맞아 하회마을을 찾아온 많은 방문객들이 붐볐다.
짚풀 공예품을 둘러보고 배의 돛에 해당하는 삼신당으로 갔다. 종이 깃에다 소원을 몇 자 적어 왼 새끼줄에 꿰어두고 두 손을 모았다. 여느 시골엔 돌담이 흔한데 하회마을엔 흙으로 둘러친 담이 특이했다. 강변 모래무지에 형성된 마을은 연화부수형으로 배가 바다로 떠나가는 형국이란다. 강변이라 담을 쌓을 돌이 귀하기기도 하였겠지만 돌로 담을 쌓으면 배가 무거워 가라앉기 때문이다.
마을 바깥 장터마당으로 나와 서울에서 내려와 합류한 회원과 파전으로 동동주를 몇 잔 들이켰다. 현역으로 활발한 경제활동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도 대단한 분이었다. 사립 고교에서 정년을 맞았던 한 원로회원과 오래도록 이어오는 사제 간 정이 두터웠다. 남으로 내려오는 차내에선 몇 소절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왔다. 칠서 나들목 부근에서 저녁을 들고 창원에 닿으니 날이 저물었다. 15.05.30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역시 부지런하신 성품이 그대로 묻어나십니다! 제일 먼저 작품이 올라왔습니다! 엊저녁에 헤어졌는데 아침에 올라와 있네요. 언제 이렇게 완성하셨는지! 글 읽으며 여정을 한번 더 복습하고 행복한 추억으로 새깁니다.
잘 읽었습니다.^^* 즐거웠던 여행기가 다시금 새록새록 새겨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