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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빙겐의 윗마을과 호헨튀빙겐/ 출처: Report on the application of Tubingen for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
칼럼
대학과 도시 8. 튀빙겐과 루벤
서울공대지 2018 Autumn No. 110
한광야 동국대학교 건축공학부 도시설계전공 교수
튀빙겐의 호헨튀빙겐과 튀빙겐대학교
독일문화권에서 철학-신학과 생화학의 위대한 발견을 주도해온 인구 9만명의 작은 대학도시인 튀빙겐(Tübingen)과 튀빙겐대학교(Universität Tübingen, 1477)가 오랫동안 진행해온 노력은 도시의 최대 고용주인 대학이 도시와 함께 어떠한 노력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교훈을 준다. 튀빙겐대학교는 1803년 원도시의 최고지에 자리잡은 도시의 상징적 중심부로서 그 기능을 상실하고 방치되었던 호헨튀빙겐 성(Schloß Hohentübingen)을 재생해왔다.
튀빙겐은 12-13세기를 전후로 로마 캐톨릭교 세력의 지배 하에 라인-네카 강의 수계 지역권에서 와인의 생산거점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튀빙겐은 1231년 도시자치권을 획득하고 성지순례길(Peregrinatio Compostellana)의 거점마을로서 기능했다. 이 즈음이 아우구스티누스 교파 수도원(Augustinerkloste, 1262, 현재 Tübinger Stift)과 노넨하우스 수녀원(Nonnenhaus, 1333)이 설립되고, 라틴 학교(Schola Anatolica, 1312, 현재 Uhland-Gymnasium)가 개교한 때이다. 이후 튀빙겐은 1342년 뷔르템베르그 백작에게 매각되었고, 이후 뷔르템베르그(현재 Baden-Württemberg) 지역에서 지식활동의 거점으로 성장했다.
튀빙겐, 1643, Martin Zeiller and Matthäus Merian 출처: https://wikimedia.org
한편 튀빙겐대학교가 1477년 튀빙겐에 설립된 계기는 무엇보다 뷔르템베르그를 지배했던 에버하드 5세 백작(Graf Eberhard V, 1445–1496)의 정치적 야망이었다. 당시 에버하드 5세는 대학교의 설립을 통해 신성로마제국 내의 작은 백작령(Grafschaft)이었던 튀빙겐의 위상을 공작령(Herzog)으로 상향시키고자 했다. 이 즈음 주변의 바젤(Basel), 프라이부그(Freiburg),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인골슈타트(Ingolstadt)은 이미 대학을 설립하며 튀빙겐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당시 튀빙겐대학교는 파리대학교(Université de Paris, 1150)를 모델로 그 운영체계를 완성하고 인본주의적 교육을 제공했으며, 신성로마제국의 신학연구의 후원을 받으며 그 위상을 높이기 시작했다. 튀빙겐대학교는 이후 마틴 루터(1483-1546)의 신학적 동반자였던 필립 멜란치톤(1497–1560)의 활동거점으로서, ‘캐톨릭 개혁과 루터 프로테스탄트’의 중심부로 빠르게 성장했다.
튀빙겐과 왼쪽 아래의 호헨튀빙겐 성, 1819, Conrad Kohler 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
이 시기의 튀빙겐과 튀빙겐대학교의 성장과 건축 붐은 ‘별들의 시간(Tübingens Sternstunde)’이라 불린다. 당시 튀빙겐은 새로운 타운홀(Rathaus, 1435), 타운의 병원(Spital, 1502), 수도원의 곡물창고인 플렉호프(Pfleghof, 1492)를 신축하며 윗마을의 호엔튀빙겐 성으로부터 아랫마을의 마켓플라츠까지 성장했다. 이와 함께 튀빙겐대학교는 대학본관(Alte Aula, 1477)을 포함해 총 50개 이상의 대학건물을 구릉의 가로를 따라 신축하며 튀빙겐의 라틴쿼터(Tubinger Quartier Latin)를 완성했다.
한편 윗마을의 정상부에 위치한 호헨튀빙겐 성(Burg der Grafen von Tübingen)은 1037년 휴고 백작(Graf Hugo von Tübingenkunst)에 의해 처음 목조저택이었다. 이후 호헨뒤빙겐 성은 12-13세기에 석재로 재건되었고, 1507-1550년 울리히 공작(Herzog Ulrich, 1495–1550)에 의해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가진 요새로 확장되었다. 현재 호헨튀빙겐 성의 시설과 모습은 이후 1593-1606년 프리드리히 공작(Herzog Friedrich I, 1593–1608)에 의해 다시한번 확장된 결과이다.
튀빙겐 홀츠마크트 플라츠, 2013 출처: 한광야
호헨튀빙겐 성은 이후 프랑스와의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1618-1648)으로 그 일부가 파괴되어 방치되기 시작했다. 마침 뷔르템베르그의 궁이 루드빅스부그 (Ludwigsburg, 1733)와 슈트트가르트(Stuttgart, 1746)에 신축되면서, 호엔튀빙겐 성은 그 기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이 즈음이 튀빙겐대학교의 수학천문학 전공의 요한 보넨베르거 교수(Johann Gottlieb Friedrich von Bohnenberger, 1765-1831)에 의해 성의 북동쪽 타워에 천문관측소(1752)가 조성된 시점이다. 이와 함께 아랫마을에는 콘래드 채플이 해부극장으로 개조되었고, 화학연구소(1753)와 보타닉가든(1663)이 순차적으로 조성되며 모던과학의 연구인프라를 완성했다.
튀빙겐 호헨튀빙겐 출처: https://wikimedia.org
한편 튀빙겐대학교가 호엔튀빙겐 성의 매입을 시작한 시점은 1803 년이며, 성의 본격적인 활용계획이 준비되었다. 이후 호헨투빙겐 성의 지속적인 재생과 개조가 튀빙겐대학교에 의해 현재까지 진행되어 왔다. 먼저 성의 재생 프로젝트로서 성내부의 나이트 홀(Knights’ Hall)이 대학도서관(1821, 이후 1912년 현재 위치로 신축이전) 그리고 성내부의 주방이 화학실험실로 각각 개조되어 활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통일된 독일(1871)은 튀빙겐대학교에서 대규모의 자연과학 연구인프라와 병원 컴플렉스들의 건설을 후원했다.
이러한 튀빙겐대학교는 1863년 자연과학전공(Faculty of Science)을 설립한 첫 번째 독일대학이 되었다. 특히 튀빙겐 대학교는 연구중심의 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해 연구인프라가 시급했던 상황이었다. 호헨튀빙겐 성은 당시 시급한 연구공간의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결국 호헨튀빙겐 성은 근대 생화학의 시작점이 된 해모글로빈 (Haemoglobin)이 펠릭스 호페-제일러 교수(Felix Hoppe-Seyler, 1825–1895)에 의해 발견되었고, 또한 핵산이 프리드리히 미숴 교수(Professor Friedrich Miescher, 1844–1895)에 의해 발견되며 모던 생화학과 세포생물학의 탄생지이며 성지가 되었다.
한편 튀빙겐대학교는 2차세계대전 이후부터 현재까지 호헨튀빙겐 성의 형태 복원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며 역사적 유산으로 도시의 정체성을 지켜오고 있다. (1945년에는 프랑스 점령군의 병영과 감옥으로 잠시 이용) 이미 성의 윗문(Upper Palace Portal, 1538)과 아래 문(Lower Castle Gate, 1606)이 1892년과 2009년에 각각 복원되었고, 동북쪽 타워의 천문관측대는 해체되고 1956년 기존 원뿔형 지붕이 재건되었으며, 성내의 교회, 남쪽구역, 갤러리 등이 1979-1985년에 대규모로 복원되었다. 또한 성의 북쪽과 동쪽의 확장부가 1988년 복원 및 리모델링되어, 인류학, 고고학, 민족학의 전공 및 연구시설로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북동쪽의 오각형 타워는 호헨튀빙겐 박물관 (Museum Alte Kulturen im Schloss Hohen Tübingen, 1998)으로 리모델링 되어 이용되고 있다.
루벤의 베긴회 대수녀원과 루벤대학교
서유럽의 ‘저지대 지역(Nederlanden)’에서 15세기부터 플레미쉬 브라반트 문화권의 지식거점으로 성장해온 대학도시 루벤(Leuven)과 루벤대학교(Studium Generale Lovaniense, 1425–1797, 현재 네델란드어권의 Katholieke Universiteit Leuven, 1968)가 2차세계대전 직후부터 함께 진행해온 노력은 ‘대학이 도시와 함께 어떠한 노력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1962년부터 루벤대학교는 원도시 경계에 형성되어, 1800년대부터 방치되었던 대규모의 베긴회 대수녀원(Groot Begijnhof van Leuven, 1234)을 매입하여 재생하며 대학캠퍼스로 이용해오고 있다.
튀빙겐의 문즈가세 주변의 초기 대학캠퍼스와 호헨튀빙겐
출처: Report on the application of Tubingen for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55
루벤 베긴회 대수도원 출처: https://www.kuleuven.be
루벤 베긴회 대수도원 출처: www.ICOMOS.org
루벤대학교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내에 루벤에 설립된 것은 1425년이다. 당시 루벤은 주변의 브루셀(Bruxelles), 앤트워프(Antwerpen), 스헤르토헨보스('s-Hertogenbosch)과 함께 브라반트 가문의 영토 내에서 그 행정거점으로 기능했다. 이 시기는 루벤이 그 이름의 기원이 되는 린넨(leuwyn)을 생산하며 상업도시로 부를 축적한 시기이다.
루벤 시민은 이 즈음 주변 지역의 파리대학교(Université de Paris, 1150), 콜론대학교(Universität zu Köln, 1388), 비엔나대학교(Universität Wien, 1365)를 모델로 루벤대학교를 설립했다. 내륙 도시인 루벤은 이후 북해의 바다항구인 앤트워프와 운하를 통해서 연결되어 기능했으며, 루벤대학교는 내륙의 지식생산 거점으로 이후 로만캐톨릭교 신학연구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루벤 마켓 광장 출처: 한광야
한편 현재 벨기에의 북쪽지역인 플랜더 지역에는 십자군 원정이 한창이던 1200년대 초부터 미혼 또는 미망인 여성이 종교적 서약 없이 캐톨릭교 수녀활동을 했던 베긴회 수녀 공동체가 설립되어 활동했다. ‘베긴(beguine)’은 구걸인 또는 말더듬이를 의미하는 옛 프랑스어인 ‘베기나(beghina)’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베긴회의 수녀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지 않고도 그들 자신을 신에게 헌신하는 삶을 기대하는 여성들”로서, 기도하며 병든 자와 육체노동자를 돌보는 일에 전념하며 생활했다. 이에 베긴회 수녀회는 1230년을 전후로 플랜더 지역의 도시들에 베긴회 수녀원을 조성하고, 기도, 일, 주거, 진료, 자혜봉사 등의 활동을 했다. 이들은 특히 생활비용을 벌기 위해 직물생산의 노동에 참여하며, 가내수공업형 장인생산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따라서 플레미쉬 문화권의 베긴회 수녀원은 대도시나 지방의 소도시에 입지했으며, 특히 원도시 도성의 경계에 하천의 습지를 따라 입지했던 병원에 인접해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성당과 녹지를 중심으로 주거와 부속 건물들이, ‘U’ 또는 ‘□’ 형태의 노인여성 전용 주택인 ‘호프예(hofje)’와 유사한 커뮤니티의 모습을 갖고 기능했다. 현재 이러한 호프예는 벨기에-네델란드 도시들에서 도시중심부에 위치하는 입지적 장점을 갖고 노인 요양시설로 리모델링되어 사용되고 있다.
덴하그 호프예 출처 https://ifthenisnow.eu
한편 루벤의 베긴회 대수녀원은 원도시의 동남쪽 경계에 다일레(Dijle) 강을 두고 성문(Porte de Namur) 안쪽에 입지했다. 베긴회 대수녀원은 총면적 3헥타르의 부지위에 12개의 작은 가로들이 세 개의 다리로 연결된 일종의 독립된 커뮤니티로서, 로마네스크 건축장식을 가진 고딕 성당(1305)이 커뮤니티의 중심부를 구성했고, 그 주변으로 약 100여 개의 주거건물들이 소형 광장과 함께 입지했다. 현재 붉은 벽돌의 주거건물들은 기존의 목재건물을 1630-1670년에 리모델링한 결과이다.
루벤의 베긴회 대수녀원은 특히 17세기에 네덜란드 독립전쟁(Eighty Year’s War, 1568-1648)과 전염병으로 약 360명을 수용하며 전성기를 가졌으나, 이후 1795년 프랑스의 지배기를 거치면서 점차 쇠퇴했다. 이 즈음 프랑스의 반캐톨릭교 정책으로 베긴회 대수녀원의 소유권이 루벤지역기관(Leuven OCMW)으로 이전되었다. 이에 따라 베긴회 대수녀원은 임대되어 지역사회의 호스피스, 빈민구호소, 고아원, 학교 등으로 그 기능이 변화되었고, 2차세계대전 시기에 시설의 일부가 파괴되면서 황폐되었다. 안타깝게도 지역기관은 관리 및 복원의 문제로 결국 베긴회 대수녀원을 매각했다.
루벤대학교가 위기에 처해있던 베긴회 대수녀원에 관심을 갖게 된 시점은 이후 1962년이다. 당시 루벤대학교는 베긴회 수녀원의 복원과 관리를 조건으로, 성당과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 그 소유권을 얻었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는 루벤대학교에서 ‘프랑스어권과 네델란드어권 세력의 충돌(Leuven Crisis, 1962-1970)’이 발생한 시점이기도 했다.
루벤과 도성 남동쪽의 베긴회 대수녀원, 1706 출처: http://en.wikipedia.org
이에 따라 기존 네델란드어권 대학기능은 독립된 새로운 캐톨릭대학교 루벤(Katholieke Universiteit Leuven)으로 재설립되어 루벤에 남게 되었다. 반면 프랑스어권 대학기능은 캐톨릭대학교 루방(Université Catholique de Louvain, 1968)를 설립하고 브뤼셀의 동 남쪽 20 km 프랑스어권의 왈로니아 브라반트 지역에 새로운 대학캠퍼스를 중심으로 한 신도시인 루방-라-네뷔(Louvain-la-Neuve)를 건설했다.
루벤 베긴회 대수도원 출처: 한광야
루벤대학교의 베긴회 대수녀원 재생 프로젝트는 두단계로 진행되었다. 1단계 재생(1964-1985)은 건축역사 전공의 래이몽드 르마이어 교수(Raymond Lemaire, 1921-1997)의 주도 하에 부지내의 가로체계가 먼저 복원되었다. 이후 대수녀원의 건물들은 대학생과 교수를 위한 기숙사와 주거시설로 리모델링되었고, 중앙에 위치한 진료소와 시에브르 수녀원(Convent Chièvres)은 교수식당(Faculty Club)과 회의장으로 각각 리모델링되었다. 이후 베긴회 대수녀원의 2단계 프로젝트(1985-1990)는 성당을 중심으로 폴 반 애르숏트 교수(Paul van Aerschot)의 주도로 진행되어 왔으며, 특히 세계2차대전 시에 파괴된 주거건물들을 해체하고 그 부지에 주거건물이 신축되었다.
루벤 베긴회 대수도원 교수식당 출처: 한광야59
현재 루벤의 베긴회 대수녀원은 루벤대학교 캠퍼스의 중심 주거구역으로 자리잡으며, 총 81개의 주거건물에 약 500개 방을 갖추고, 대학생, 교수, 외부 방문연구자를 위한 주거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있다. 특히 루벤의 베긴회 대수녀원은 1998년 플랜더 지역의 총 26개의 베긴회 수녀원들과 함께 플렌더 지역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로서, 특히 종교 건축과 생활 건축이 하나로 통합된 사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튀빙겐의 인구는 87,500명(2015)이며, 이중 대학생은 25,000명, 교수, 교직원 및 연구원은 4,500명, 병원직원은 7,500명이다. 루벤의 인구는 100,300명(2017)이며, 이중 대학생은 62,300명(학부+대학원생: 58,000명+박사과 정: 4,300명) 교수 및 교직원은 11,500명이다.
※ 원고는 ‘대학과 도시, 함께하다(월간건축문화, 2018.9)’의 내용을 편집하여 준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