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안영식
초등학교 시절 겨울이면 나는 장작을 팔러 다녔다. 어젯밤 살금살금 내린 도둑눈이 무릎까지 빠졌다.
양말을 두 컬래나 신었지만 발뒤꿈치 쪽은 모두 구멍이 난 양말이다
검정 고무신은 밑바닥이 닳아서 눈길에 무척이나 미끄럽다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새끼줄로 단단히 발을 동여 묶었다
찬바람에 귀가 얼지 않게 산토끼 털 가죽으로 만든 귀 덮게도 잊지 않는다
집 뒤꼍에 장작을 쌓아놓고 오래된 마른 장작을 해가 뉘엿뉘엿 할 무렵 산간수(영림서 직원)들이 지키지 않는 시간에 장작을 팔러 간다 산간수한테 나뭇짐이 들키는 날이면 징역을 간다고 어른들이 겁을 주어 낮에는 겁이 나서 장작을 팔러 다니지 못 했다
우리 집에서 석포 시내까지는 신작로를 따라가면 5리가 조금 넘는 길이지만 겨울에는 얼음이 꽁꽁 언 강을 건너서 섭재 마을로 지나가는 지름길이 있다
오전에 넉가래로 눈을 치고 미끄러운 언덕길은 흙을 퍼다 뿌려 놓고 강을 건너는 얼음판에는 미끄러지지 않게 삼태기로 모래를 파다 뿌려놓았다 모래가 파고 들어간 얼음판은 팥고물을 얹어 놓은 시루떡 같다. 조심조심 언 강을 건널 때는 미끄러 질까 봐 다리가 후들거린다
아무리 추운 날씨도 무거운 장작 짐을 지고 그렇게 한참을 가면 손발은 시리지만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등에서는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얼음 언 강을 건너서 강 언저리 동네 어귀에다 지개를 고여놓고 촉촉하게 땀에 젖은 토끼털 귀마개를 벗으면 금방 시원해진다
쉬는 시간에는 누군가 갖다놓은 곡괭이로 꽁꽁 언 모래를 파서 건너온 얼음판에 다시 한번 뿌려준다
한낮에 눈석임물이 오전에 뿌려놓은 모래 위에 새로운 얼음이 얼어서 미끄럽기 때문에 누구나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섭재 마을을 지날 때면 집집마다 저녁 군불 때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밥 짓는 냄새와 소여물 끓이는 구수한 냄새가 시장기를 불러온다. 벌써 몇 집은 소여물을 퍼다 주느라고 분주한 집도 있다.
마을 언덕길을 넘어서 가면 다시 낙동강이다 이곳은 물살이 빨라서 얼음이 얼지 않는다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섭재 사람들이 시내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통나무 한쪽 면을 도끼로 다듬어서 동발을 세우고 다리 상판 나무끼리는 가지갱이를 박아서 서로 연결을 했다. 이 외나무다리가 이 지역에서는 제일 긴 다리다
물여울 다리 아래 한참을 내려가면 깊은 소가 있다. 꽁꽁 언 소에는 눈을 치우고 신나게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이 많다
눈을 누군가 싸리비로 쓸고 흙을 뿌려 놓아서 미끄럽지는 않지만 조심해서 건너야 한다
다리 양쪽에는 싸리비가 준비되어있다. 눈이 왔을 때 밟으면 미끄럽기 때문에 눈이 오고 처음 건너는 사람이 스스로 쓸어놓고 건너간다.
석포 시내에 도착해서 나뭇짐을 역전 언덕배기에 세워두고 여관, 술집, 식당. 등을 다니면서 나무를 사라고 흥정을 하고 다닌다.
눈이 오는 날은 나무가 잘 팔린다. 그날은 종환이네 냉면집에 장작을 팔기로 했다
오늘은 50원을 받기로 하고 나뭇짐을 냉면집 가계 뒤 쪽으로 난 삽짝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방 옆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이북 말을 하는 종환이 아버지가 나를 식당으로 불러서 냉면을 먹고 가라고 하신다
나무틀에서 뽑은 면을 하얀 김이 무럭무럭 나는 펄펄 끓는 물에서 건져내어 찬물에 헹구어 살얼음이 언 육수 한 바가지를 붓고 꿩고기와 돼지고기 몇 점과 삶은 달걀 반쪽을 올려서 큰 사발에 동치미와 곁들어 주었다 조개탄이 타고 있는 무쇠 난로 옆에서 먹는 시원하고 쫄깃한 냉면은 정말 맛있었다
종환이 아버지가 내일도 장작을 사겠다고 하신다
냉면집 아들 종환이는 나와 동갑내기인데도 나는 4학년 종환이는 5학년이다.
종환이가 부럽다 나무를 안 해도 되고 맛있는 냉면도 실컷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맛있는 냉면도 얻어먹고 내일 팔 장작 값도 선불로 받았다
빈 지게를 지고 집으로 오는 길은 마냥 즐겁다. 어둑어둑한 하늘에 철새는 줄을 지어 날아가고, 추워서 새파래진 개밥바라기별이 오늘은 유난히도 크게 보인다
마을을 지나서 낙동강 얼음을 건널 때는 추위와 무서움을 잊으려고 지개 목발을 두들기면서 고향의 봄을 부르며 내년 봄을 그리워한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께서 왜 이렇게 늧었냐고 물어신다
냉면 먹은 얘기를 자랑했다
오전에 뒷산에서 올무에 걸린 산토끼를 껍질을 벗기고 배를 갈라서 손질해 놓고 갔다 오니 토끼고기가 들어가서 시원한 고깃국과 고봉으로 떠서 아랫목에 덮어두었던 노란 조밥과 김장김치와 저녁상을 어머니가 차려주신다.
오늘은 먹을 복이 터진 날이다.
장작 판 돈은 할머니에게 보관한다. 나무하느라 갈라터진 손등을 보고 할머니께서 요강에 오줌을 받아서 손을 씻어라고 하신다
따뜻한 오줌에 손을 담갔다. 갈라터진 자리들이 따끔거린다
소여물을 끓이는 가마솥에 더운물을 퍼다가 외양간이 딸린 행랑채 부엌에서 세수를 하고 할머니께서 내어주시는 삼배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으면서 할머니 곁에 누웠다
할머니는 꽁꽁 얼었던, 거북이 등처럼 갈라터진 손을 만지시며 안쓰러워하신다
붉나무를 잘라다 놓았다가 칼로 나무껍질에 칼집을 내어서 화롯불에 올려놓고 붉나무에서 끈적한 진액이 흘러나오면 칼로 긁어서 터진 손등과 발뒤꿈치의 갈라진 상처와 찬바람에 헤진 입술에 발라주신다.
입술에 묻은 붉나무 진이 쓴맛이 난다
할머니가 나의 손발을 주물러주시면 금방 손발이 따뜻해진다
'꿍, 꿍,'하고 강에서 어름 우는소리가 들려온다
"내일은 또 얼마나 추워질라는 고,"
할머니는 위풍에 머리가 시리다고 귀들이 모자를 쓰시고 나를 꼬옥 안아주셨다
지금은 우리 집이 있던 낙동강물이 돌아가는 도래와 섭재 마을은 아연제련소가 생겨나서 옛날 정취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추억 속의 고향이 되고 말았다
눈 내리는 날이면 어린 시절 먹어본 종환이 아버지의 정이든 냉면이 그리워진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 오늘 점심으로 냉면을 먹고 따뜻한 사우나에서 샤워를 하다가 50년전 내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나서 지개 맬방에 눌렸던 어깨를 가만히 만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