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나서다
서 한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푹푹 찌는 날씨에 10년을 진즉 넘긴 소형차까지 한몫 거들었다. 언덕바지에 있는 주차장의 주차비가 저렴해 며칠 뒀더니 뙤약볕 아래에서 단단히 더위를 먹었나 보다. 안 그래도 예기치 못한 데서 탈이 날까 싶어 조마조마하던 중이었다. 병원을 빠져나와 한길에 들어서자마자 핸들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다행히 도로 가장자리에 턱이 없어 보도로 올라설 수 있었다. 차창 밖 햇빛에 눈이 부셨다. 가겟집 담벼락 그늘에 비칠거리며 주저앉은 아버지가 훅훅 숨을 몰아쉬었다. 몇 날 며칠 병원을 오가며 여러 번 눈물을 보였던 아버지다. 보험회사에 재촉 전화를 하며 81세 노인이 계시다고 여러 번 말을 보탰다.
그날은 병원에 입원한 지 이레 만에 동생을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긴 날이었다. 지하 주차장을 나오며 나무가 많은 풀숲에 귀를 기울였다. 매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족 중 한 사람만 병실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해 아버지를 설득하여 집으로 모시고 가던 중이었다. 아마 나 혼자였다면 그냥 차를 몰고 왔을지 모른다. 마음은 조급하지만 결국 견인차 꽁무니에 차를 매달고 카센터에 왔다. 부속품을 주문해 수리하겠다며, 기사가 핸들을 통째로 뽑아든 채 원인을 설명했다. 당장 급한 차까지 두고 오니 생각이 많아졌다. 잠자리에 누워 뒤척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수신번호를 확인하기 전에 심호흡부터 했지만, 가슴속에서 덜컹덜컹 소리가 났다.
오래전 일이다. 찬 새벽 공기에 몸을 떨며 산속에 있는 절을 찾았다. 밤늦게까지 울렸던 풍경소리가 그친 절은 정적에 가라앉아 있었다. 가슴속에서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이상 기류였다. 절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간절히 바람을 구했다. 한밤에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서며 그때처럼 기도했다. 부디 매미가 울음을 터트리기를. 그러나 2층 병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어떤 조짐이 느껴졌다. 절에서 내가 확신하던 신념과는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슬프고 암울한 느낌이었다. 5인실 병실엔 몇 시간 전과 다름없이 침대 사이로 각각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동생의 거친 숨소리뿐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문 가까이 빈자리에 배정받은 지 몇 시간이 안 되어 동생은 침대에 실린 채 1인실로 옮겨졌다. 병실 복도에 있던 간호사가 목소리를 낮춰 상황을 알려 주었다. 지금 당장 어떻게 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환자의 상태가 몹시 위급하니 가까운 이들을 부르라고 일렀다.
근 보름간 분당을 오갔다. 멀건 대낮이나 늦은 저녁이나 시간을 따질 새 없이 병원에 다녔다. 진작 기름이 떨어진 차를 끌고 한밤에 병원을 나섰던 날이다. 판교나들목에 들어서기 전 주유소가 안 보여 어쩔까 잠시 망설였다. 마침 전화를 한 한 살 터울 남동생이 적당히 취한 목소리로 기름을 넣고 오라는 충고를 했다. 주유소를 찾다 보니 밖은 더 어두워졌다. 자정에 문을 닫는다는 곳을 두 군데나 거쳤다. 지나치는 운전자가 알려준, 기껏 찾아간 고속화도로 입구는 폐쇄되어 있었다. 무작정 길을 따라가니 군부대가 나타났다. 내비게이션은 외진 산길에서 좌회전을 지시했다. 산을 넘어야 할 판이었다. 그보다 내 의지가 우왕좌왕했다. SOS를 부르기 직전에 겨우 24시 셀프 주유소를 찾았다. 주인의 무지에 차가 고생했다.
해마다 첫 매미 소리 들은 날을 메모해 두었다. 올여름엔 놓친 걸까. 동생은 응급실과 9층 병실, 호스피스 병동에 있었다. 동생이 잠깐잠깐 스쳐 지나간 그 세 곳은 내 머릿속에서 따로따로, 뚝뚝 떨어져 있다. 동생이 세상을 떠난 후, 내가 어디에 있을 때 매미 소리가 들렸는지 언제쯤 매미가 울었는지에 몰두했다. 별반 중요하지 않은 이 일, 언뜻 들은 듯했던 소리를 찾아다니느라 정신까지 아득해졌다. 가족 중 동생만 여름에 태어났다. 그저 동생의 생일 전에 매미가 울음을 터트렸으면 했다. 그래야만 여름 동안만이라도 버텨줄 것 같았다. 호스피스 병동의 마당에서 들었던 소리는 순전 내 억지였을까. 하필 동생은 그날, 태어난 날 세상을 떠났다. 여러 날, 잠잘 때를 제외하곤 기분이 울적했다. 살갑게 지냈던 기억이 없어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생사를 오가던 모습이 아른아른했다. 숨을 거둘 때 동생은 두 손을 흔들었다. 아주 느리게 가는 숨을 쉬면서 불현듯 팔을 들더니 손을 흔들었다. 이내 다른 손도 함께 흔들었다. 팔목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우는 아이를 어르듯 장난감을 요리조리 돌리는 모습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한동안 ‘임종’이란 단어에 매달렸다. 끝내 호스피스 병동의 간호사와 통화를 했다. 그녀가 말했다.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며, 어쩌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고.
동생은 문을 나서는 중이었을까. 이 세상의 마지막 문, ‘끝문’이다. 끝문은 사전에도 없는 단어이다. 단지 ‘끝’과 ‘문’, 두 음절이 각각 따로 쓰일 뿐이다. ‘끝’이라는 단어에서는 “시간, 공간, 사물 따위에서 마지막 한계가 되는 곳”이라는 뜻보다 휑하다는 감정이 앞선다. 나만의 해석이다. ‘문’은 드나들 수 있게 틔워 놓은 곳이다. ‘끝’ 자와 함께여서 끝문은 단 한 번만 여닫을 수 있는 문인 듯하다.
견인된 날 이후 차는 두 번을 더 카센터에 다녀왔다. 49재가 지나지 않았으니 얼추 사십여 일 동안이다. 차의 처지에서 보면 이번엔 정말 끝인가 싶어 마음을 졸일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의 주인은 결코 대범하지 못하고 정은 헤퍼서 얄팍한 주머니 사정은 아랑곳없이 번번이 과한 수리비를 치른다. 세상과 이별하지는 않았지만, 언제 하직할지 목숨이 간당간당하다.
“그 문은 맨 마지막에 있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삶의 끝문은 수시로 열리고 닫힌다. 언제 그 문이 열릴는지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하기도 하고 또 문이 열리는 날짜를 모르니 오히려 편안하기도 하다.”* 며칠 전에 읽은 글이다. 문이 열리는 날짜를 모르니 나도 차도 차라리 편하다. 입관하던 날, 동생의 키가 더 커 보였다. 입원한 내내 부기가 빠지지 않았던 발도 그대로였다. 통증에 힘들어하더니 온몸이 얼어붙은 채 누워 있었다. 글귀를 잘라 옮긴다. “그 문을 밀고 들어가면 어떤 별천지가 있을까? 마지막 문을 통과하면 이 고통도 끝나리라,” 그 몸으로 문을 잘 나섰을까. 그러나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을 나섰으니 동생의 고통은 끝났다.
* 산문 「문을 열다」 중 ‘5. 끝문’, 마경덕
―계간 『시에』 2013년 겨울호
서 한
서울 출생. 2009년 『시에』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