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포 친구집 '24권짜리 백과사전'의 충격 북한에서 내가 만났던 '째포(재일동포)' 송명철·문영철 가족 이야기. 이민복(대북풍선단장)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책을 보고 그 반대로 북한에서 내가 만났던 재일동포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 글을 올린다.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 책 내용을 요약하면- 일본인들의 차별이 싫어서 북한에 갔는데 고양이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이다. 일본에서 너무 가난하여 북한으로 갔는데 그 가난은 가난도 아니었다. 북한에서 살던 사람들은 비교 대상이 없어 세상이 그런가 보다 한다. 그러나 아시아 제일의 선진국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재일동포들은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어 그 충격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들을 북한에서 태어난 우리는 째포(재일동포)라고 불렀다. 이 째포를 처음 본 것은 1969년 황북도 서흥군 읍에서이다. 학교 가는 길가 집에 째포란 남자가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체력단련 용수철 기구를 가지고 팔 근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일이 힘든데 저렇게 힘을 낭비하는 것이 이상해 보였다. 역시 몇 달이 지나자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근력 운동을 하기 전에 직장에서 힘을 다 소진, 한편 먹는 것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에서는 근력 운동 할 만큼 여유로웠다는 것이다. 1960년대 말 북한영화에서 최고 인기 여배우는 최부실을 빼놓을 수 없다. 째포 출신이다. 인기가 높은 만큼 시기도 컸는데 결국 사상투쟁이 절정에 이른 1970년 초에 평양에서 숙청되어 원산에 산다는 소문을 들었다. 째포를 직접 만나 지내보게 된 것은 1972년이다. 도쿄와 가까운 치바현에서 큰 식당을 하던 부친 따라 온 송명철이다. 이사 짐이 너무 많아 관공서를 쓰던 집을 내줄 정도였다. 송명철의 부친은 아내는 사별,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귀국한 것이다. 송명철은 일본 학교를 다녔기에 조선 말을 몰랐다. 담임 선생님은 학업성적이 좋던 나를 정하여 책임지라고 하였다. 그를 통해 째포를 구체적으로 지내보게 되었다. 우선 송명철도 그렇지만 누나와 여동생 살결이 너무 고운데 놀랐다. 북한 사람 그 누구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살결이다. 왜 그리 좋은가고 하니 일본에서는 보통이라고 하며 정말 부자들은 우유 목욕탕을 사용한다고 해서 더욱 놀랐다. 북한에서 구경도 못하는 우유로 목욕을 하다니 참 별세상이다. 북한 목욕탕은 군 읍내 하나로서 겨울에만 운영, 한 달에 한번 가면 많이 가는 것이다. 송명철이네는 냄새부터 달랐다. 향수를 뿌리는지 아무튼 북한에서는 도저히 맡을 수 없는 향긋한 냄새이다. 무더운 여름날에 그의 집에 가보면 북한 가정에서 볼 수 없는 선풍기로 선선함을 느끼는 게 그렇게 별 세상 같았다. 누나도 이쁘지만 막내 여동생은 한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쭉 빠지고 이뻤다. 하지만 불만이 가장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왜 이곳에 왔는가 하는 것 같았다. 먼저 온 째포들이 말조심하라고 그렇게 당부하지만 막무가내로서 모두 걱정하였다. 그의 집에는 24권의 백과사전이 있었다. 북한 도서관에도 없는 백과사전이 개인 집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읍 도서관 책은 다 보았다고 할 정도로 책을 좋아하던 나는 그 백과사전에서 난생 처음의 정보들을 설명 들을 수 있었다. 국력상 남조선보다 공화국이 훨씬 앞서 있는 줄 알았는데 경제지표 비교 난에는 거의 다 엇비슷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남조선보다 확실히 앞선 것은 시멘트 생산량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총알보다 빠른 최고속 비행기는 당연히 위대한 과학기술의 나라 소련 것인 줄 알았는데 미국 놈들 것(SR-71)이라는 데도 놀랐다. 세계 혁명의 수령이라는 김일성 소개도 보니 항일 빨찌산의 소부대장이었다고 작게 소개되어 있어 내심 실망스러웠다. 이러한 사실들 때문인지 일 년도 안 지나 당국에서 다 회수해 갔다. 송명철의 학업 실력은 비교적 공부 잘한다던 나보다 높았다. 항일 선전으로 깔보던 일본의 학교 수준이 우리보다 높다는 것이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사회주의 교육이 자본주의보다 월등할 것이란 선입견이 무너진 것이다. 일본에서는 공부만 하지 여기처럼 과외 노동을 시키지 않는다고 하니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째포로 처음 만난 송명철하고는 1년밖에 함께 하지 못하였다. 읍내 학생 수가 너무 많은 은산 고등중학교에서 분할된 새 학교인 평산 고등중학교의 구역에 내가 살았기에 그리로 가게 되어 헤어진 것이다.(평남도 은산군 읍에는 은산 고등중학교, 평산 고등중학교, 은산 여자고등중학교가 있었음). 신통하게도 새로 간 학교에서도 둘도 없는 친구가 째포였다. 오사카에서 온 문영철이다. 교사 출신 아빠를 둔 문영철은 단연 일등의 성적이었다. 그 다음 성적이 나였다. 문제는 공부 못하는 이들이 심히 괴롭히는 것이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공부 잘하는 끼리가 필요했다. 이상하게도 당시인 1973년에는 군대 바람으로 공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른바 <10월 군대>로서 네 학급이 한 학급으로 줄어들 만큼 군대에 대거 차출하였다. 당시 닉슨 독트린으로 인도지나 공산화가 가시화되고 남조선에서 미군철수가 논의되는 분위기이다. 이 기회를 노려 북한은 화해 뒷면으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결과이다. 남침용 땅굴도 그때 파내려 갔다. 네 학급이 한 학급으로 줄어든 속에는 신체검사 불합격생과 대학 갈 학생만 남아있었다. 군대도 못 가고 공부도 못하는 이들은 질투심이 강해 쩍하면 공부 잘하는 이에게 시비를 걸며 괴롭혔다. 다행히 문영철은 레슬링, 나는 씨름 선수로서 뭉쳤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한편 선생님(김달옥)은 공부 잘하는 이가 체육도 잘한다고 치켜세워주었다. 결국 송명철, 문영철, 나 세 명은 북한의 최고 기술대학인 김책 공대에 추천되었다.(송명철·문영철은 야금공학부, 나는 반도체 공학부) 두 번째 지내 본 째포 문영철의 부모님 고향은 모두 제주도(서귀포 애월면)였다. 4·3 사건의 피해자였는지 조총련에 일찍이 가담하였다. 오사카 조선학교 교사였던 문영철 부친은 1968년 아내와 자식들을 먼저 북송시키고 1972년 북송 배가 끊어질 것 같다는 것에 부랴부랴 북송선을 탔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일본에 연고가 있는 째포들이 부자라고 하였다. 하지만 문영철이네는 그렇지 못했다. 한번은 외지에 작업 동원 나가느라 벤토를 싸야 했는데 식사 시간 그의 것을 보니 풀죽이었다. 북한 사람인 나보다 가난한 음식이었다. 교사 출신인 부친은 당연히 선생님으로 취직돼야 하나 북한 규정상 안되어 일반 직장에 다녔다. 선생 한 명이 다수에게 영향을 끼치는 위치이기에 최고의 신분을 요구, 째포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부친의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처량할 만큼 축 처져 있었다. 실언자처럼 항상 말이 없었다. 딱 한번 말 참내를 한 적 있어 생생히 기억한다. 우리가 반미·항일 선전대로 미국과 일본이 나쁘다고 열띤 토론을 하자 듣다 못해 한 마디 하신다. <어느 한쪽 말만 들어서는 안돼!> 어느 날 60도 안돼 중풍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째포 첫 친구였던 송명철 부친도 야외 변소 칸에서 절명하셨다. 북한에 온 지 5년도 안 돼서였다. 송명철 부친은 식당을 하기 전에 기계 전문가였다고 하셨다. 과묵을 깨고 열띠게 말하던 것은 생산에 참여했던 한때 최고의 전투기 제로센에 대한 이야기였다. 선진 일본 기술력에 대한 말을 할 때에는 생기가 살아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생기 속에 귀국선을 잘못 타고 왔다는 표현이 담긴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