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91
3월9일[사순 제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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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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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HfcSe-5oX8
[서울대교구 조현용 프란치스코(수락산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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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내면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 앞에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반으로 나눠졌습니다. 속시원한 사이다 같은 거침없는 언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부드러운 시선, 세리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파격적인 모습에 많는 사람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앞서가는 예수님의 모습에 전통주의자들, 보수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 바리사이들은 심기가 무척 불편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귀에 거슬렸습니다.
예수님 시대 세리와 창녀, 죄인들은 하느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하느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살던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인간도 아닌 인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족속들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온 세리가 기둥 뒤에 숨어서 기도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실 세리나 창녀들은 하느님과 율법을 떠나서 살았기에 교회 공동체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눈에 띌까봐 창피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서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다들 예수님 가까이 다가온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잘 먹혀들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딱딱하고 고리타분하던 당시 사제들의 설교와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장황하고 지루하기만 하던 당대 율법학자들의 강의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따뜻하고 감미로웠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들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들은 깊은 감동으로 큰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기쁨과 희망의 에너지였습니다.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와 새 생활로 안내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인해 자신들의 눈앞에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일시적으로나마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 것을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이런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가면서 마침내 하느님과 담을 쌓고 지내던 세리와 창녀, 죄인들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입니다.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하류 인생들이 줄지어 당신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생각합니다. 저 같았으면 엄청 두려웠을 것입니다.
다들 한 가닥씩 하던 사람들입니다. 얼굴도 험악합니다. 굵은 팔뚝 여기저기에는 문신들이 가득합니다. 입만 열면 갖은 욕설이 난무합니다. 저 같았으면 서둘러 자리를 끝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처럼 겉만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내면을 바라보십니다. 그들의 상처 투성이 뿐인 과거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십니다. 나름 한번 새출발해보겠다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지난날을 바라보십니다. 그간 세상 사람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따가운 눈초리를 바라보십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들을 눈여겨 보십니다.
그러고 나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이지 깜짝 놀라 기절초풍할 정도입니다.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반갑게 인사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십니다. 그들과 함께 회식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과 온전히 하나 되신 것, 그들의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완전 무장해제 시킨 예수님께서 드디어 한 말씀 던지시는데,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세리와 죄인들 더 감동시킵니다. 저 같았으면 이랬을 것입니다. “자네들 이제 그런 짓 그만하고 새 출발해야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몰아붙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십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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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반응하는 대상이 나의 수준이다>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소크라테스만큼 유명했던 인물이 그의 아내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악처로 유명했습니다. 그날도 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물을 퍼부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머리를 닦으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너무 놀라지 말게. 천둥이 친 후에는 비가 내리는 법이라네.”
아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너무나 태연한 소크라테스도 문제는 있을 것입니다. 아내가 더 무시당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아내의 분노에 초연할 줄 아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또한 본받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만약 그때 맞서 싸웠다면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철학자라기보다는 아내와 같은 수준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스스로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사이가 나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자비만을 청하는 세리도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세리 같은 사람들보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해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하지 못한 자신의 자세를 뉘우칩니다.
바리사이는 이웃보다 잘살고 있으면 잘사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웃보다 잘살고 있음을 알려면 이웃을 평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비교우위에 있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가 그를 깎아내리면 참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세리는 바리사이가 뭐라 해도 발끈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원래 부족한 인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라고 하십니다.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타인의 심판에 신경이 쓰인다는 것은 그냥 그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내가 타인을 심판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부족한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당신을 심판한다고 분노에 차서 반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심판받으실 때 침묵하셨습니다. 이 침묵의 의미는 당신께서 다른 수준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반응하면 같은 수준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물론 우리가 완전히 하느님의 본성에 이르지 못하고 아직도 육체의 인간으로 살고 있어서 세상의 심판에 아주 무관하게 살아가기는 힘듭니다. 그렇더라도 자주 내가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며 이웃의 심판에 자유롭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래 전 미국의 홀트 이반 판사는 살인을 저지른 27세의 한 여인에게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슴 아파했습니다. 살인의 동기가 너무 사소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이웃과 한화로 100원도 안 되는 5센트를 서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총으로 상대를 쏘았던 것입니다.
5센트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수준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수준에 맞게 살고 죽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것에 반응하는 수준이 아니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5센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듯 그러한 수준의 사람들이 사는 삶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반응하는 대상을 보고 내가 어느 수렁에 빠져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믿음의 줄을 잡고 그 수렁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항상 살핍시다. 자신을 보고 짖는 개에 반응하면 자신도 개가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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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댈러스 성당으로 왔을 때 뉴욕에서 신부님들이 같이 왔습니다. 먼 여정 동행해 준 신부님들이 고마웠습니다. 신부님들은 사제관의 시설들도 점검해 주었습니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사제관의 컴퓨터를 치우고, 저의 노트북으로 다시 설치해 주었습니다. 엉클어져 있던 선을 정리해 주었습니다. 속도가 느려서 불편했던 인터넷을 빠른 속도로 업그레이드 해 주었습니다. 회사에 전화를 하니 새로운 장치를 배달해 주었습니다. 저는 냄새에 둔감한데 신부님 한분이 가스 냄새가 난다고 점검해 보라고 했습니다. 점검하니 가스가 조금 새고 있었습니다. 다행이 고칠 수 있었습니다. 텔레비전도 잘 나올 수 있도록 연결해 주었습니다. 청결을 위해서 화장실에 비데를 설치하면 좋겠다고 해서 그것도 설치하였습니다. 열쇠로 열던 문도 번호 키로 바꾸었습니다. 요즘 번호 키는 원격으로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의 도움으로 댈러스에 온지 3일 만에 제가 바라는 것들이 해결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신부님들이 저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지낸 시간들이 많기 때문에 제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결혼한 부부가 잘 지낼 수 있는 5가지 방법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다투고 싸운 날일지라도 한 침대에서 잠을 자면 좋다고 합니다. 그날의 피로는 그날에 풀자는 말이 있듯이 논쟁과 다툼이 있었을지라도 풀고 잠자리에 들면 좋다고 합니다. 기념일을 잘 챙겨 주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정성이 담긴 선물을 준비한다면 배우자는 감동할 것입니다. 결혼 25주년을 기념하면서 함께 피정을 가는 부부를 보았습니다. 선물은 오늘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뜻하게 보내는 기분 좋은 말도 선물이 됩니다.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가지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책을 읽는 것도, 등산을 하는 것도, 골프를 치는 것도,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부부가 함께 하면 더 많은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습니다. 느낌을 표현하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부부라고 할지라도 서로가 바쁘게 지내다보면 무심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허리가 아픈데 다리를 주물러주면 큰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대화도 좋지만 감정과 마음을 표현하는 대화는 부부의 관계를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면 좋다고 합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오랜 불화로 결국 헤어지는 노부부가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면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닭의 날개를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헤어지는 마당에도 내가 실어하는 낡 날개를 주네요.” 사실 할머니는 닭의 가슴살을 좋아했지만 할아버지가 좋아할 것 같아서 싫어하는 날개를 먹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도 날개를 좋아하지만 할머니가 날개를 좋아할 것 같아서 싫어하는 가슴살을 먹었다고 합니다. 행복한 부부생활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파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파는 기도할 때,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단식하였고, 봉사하였고, 십일조를 충실하게 바쳤고, 율법을 잘 지켰고, 죄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고 하느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만 살아도 그다지 나쁜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 살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리의 기도입니다. 세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잘하였는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판단하시는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나의 행위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더 높게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잘 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의 삶을 통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입니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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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비자 교리를 시작하면서 ‘신청서’를 작성합니다. 신청서에 인적사항을 적으면서 성당에 온 이유를 묻습니다. 친구의 권유를 받아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온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싶은데 이왕이면 성당으로 오고 싶어서 왔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음에 평화를 얻고 싶어서 왔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서 왔다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교리를 배우면서 신앙생활의 목적을 알게 됩니다. 성당에 다니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생활과 그릇된 신앙생활을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헌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헌금은 자신을 드러내는 바리사이의 헌금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헌금은 정성된 마음으로 봉헌하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바리사이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자신을 드러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도할 때도, 단식할 때도, 자선을 베풀 때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면 이미 상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아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상대적’입니다. 한국에서 제일 부유한 사람도 미국에서 제일 부자인 사람에 비하면 가난한 것입니다. 희생과 겸손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성인들의 삶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것입니다. 키가 180인 사람도 2미터인 사람들 앞에서는 작은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세상에서 너무 쉽게 좌절하기도 하고, 교만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상대적으로 평가하거나, 순위를 정하시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들의 모습을 사랑하시고, 인정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거짓 희망을 보게 됩니다. 물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좋아지고, 국민 소득이 늘어날 것이라고 하는 말들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기도와 실천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선하고 착한 사람들은 거두어 주신다는 확신을 통해서 현실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이겨내는 것이 참된 희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희망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은 박해와 고통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배가 항해할 수 있는 것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이 빠지면 건강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면 살이 빠지고 행복해진다고 말을 합니다. 생활이 안정되면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생활도 안정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행동 없는 희망은 진정한 희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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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이다.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기도하러 간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하느님을 향하여 감사기도를 바친다고는 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한다는 핑계로 허영에 빠져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면 단식이 그에게 무슨 득이 되며, 십일조를 바치면서 자랑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남을 비난하고 단죄한다면 그 십일조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바리사이는 계속 나는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고 칭찬하기에 바쁘다.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며 찬양의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숨어있는 사탄을 경계해야 한다. 바리사이에게 한 것처럼 다른 교만으로 우리를 취하게 할 것이다. 아마 아직도 자신의 행위로 우쭐거리게 하는 것도 있다.
세리는 감히 눈도 들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기죽은 태도가 보인다. 하느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온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 두려웠다. 우리는 그의 몸짓에서 자신의 악행을 책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리석은 바리사이는 뻔뻔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꼿꼿이 서서 제 자랑을 했지만, 세리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긴다. 자기 죄를 고백하고 의사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며 자비를 간청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주님께서는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4절) 바리사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교만하게 자기 자랑을 했고, 세리는 겸손하게 자기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바리사이의 자선보다 세리의 고백을 더 기꺼워하신 것이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돌아간 것은 그가 겸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웃과 비교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보고 또 비교하며 따라야 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내가 남들만큼 선한가?"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 앞에 선한가?"이다. 즉 우리들의 선행이나 신앙생활이나 그 기준, 척도는 하느님이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생과 비교할 때는 우리도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할 것이다. 이 사순절이 우리에게 큰 은총의 기간이 될 수 있도록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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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오늘 독서의 마지막 선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복음에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발견하는데, 바리사이와 세리의 대조적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도하려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둘의 대비를 본질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는 그들의 기도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였습니다. 우리말로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라고 옮긴 그리스 말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바리사이는 서서 자기 자신을 향하여(‘프로스 헤아우톤’) 이렇게 기도하였다.”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에이스 톤 우라논’)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기도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면 세리의 기도는 ‘하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하여 그분의 현존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참된 기도이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하느님 없이 진행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결국 하느님의 최종 판단은 세리가 ‘의롭다’는 것으로 선언됩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하느님 없이 자기 행위만 과시한 바리사이의 기도는 그 응답을 받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을 향하여 온전히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소통한 세리는 ‘의롭게 됨’이라는 기도의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나의 삶과 성장에만 관심을 두는 태도는, 그것이 아무리 도덕적이고 품위 있는 생활이라 하더라도, 그저 신앙으로 포장된 경건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구태의연한 경건주의를 넘어서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소통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통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진정한 기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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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9-14)
여기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은, 진짜 의인도 아니면서 “나는 의인이다.” 라고 착각하고 있는 자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죄인 취급하고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간단하게 줄이면 ‘교만한 위선자들’입니다. <진짜 의인은 자기 입으로 “나는 의인이다.” 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늘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의식하면서 더욱더 자기 자신을 갈고 닦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서 자기 입으로 “나는 성인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에 누구든지 자기 입으로 “나는 성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성인이 아닙니다. 바로 그 교만 때문에 성인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위선자들을 향해서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당시 바리사이들은 대부분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전부 다 그랬던 것은 아니고, 바오로 사도처럼 진실한 사람도 일부 있었습니다.>
또 그 당시에 세리들은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고,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세리들이 죄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들이 전부 다 그랬던 것은 아니고, 일부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다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면서 회개했고, 죄가 되는 직업을 버렸습니다. ‘마태오 사도’와(마태 9,9)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가(루카 19,8) 대표적인 예입니다. 어떻든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활동을 시작하실 때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마태 4,17) 비유에 나오는 세리는 진실하게 회개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이고, 바리사이는 자기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자처하면서, 회개하지 않아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비유는 바리사이와 세리를 비교하는 비유가 아니라,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과 구원받는 사람을 대조하는 비유이고,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너는 지금 어느 쪽에 있느냐?” 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비유에서 ‘꼿꼿이 서서’ 라는 말은 그 바리사이가 거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혼잣말로’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서’인데, 그 바리사이가 하느님께 기도드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뜻이 아니라, 번역되어 있는 그대로 혼잣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을 뿐이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강도짓, 불의, 간음을 하지 않은 것과 단식을 자주 하고 십일조를 잘 바치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를 생각하면, 그는 겉으로는 죄를 안 짓고 있어도 마음으로는 죄를 짓고 있는 자입니다. 그의 말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 라는 말과 ‘저 세리와도 같지 않다.’ 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네가 더 선하다, 또는 더 악하다.” 라는 평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선과 악은 그 자체로 평가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것과 비교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따라서 나는 너보다 선하다는 말은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입니다. 그는 교만과 위선과 신성 모독죄 때문에, 또 자기는 다 잘하고 있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그 착각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기 죄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고,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속으로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만 죄인이라고 하고, 회개한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위선입니다.>
우리는 비유에 나오는 세리가 ‘말로만’ 회개한 것이 아니라, ‘죄의 삶’을 청산하고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즉 ‘온 삶으로’ 회개하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14절의 ‘의롭게 되다.’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의로움을 인정해 주셨다.”라는 뜻이고, 이 말은 “구원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는 “스스로 의인인 척 하는 위선자들은 구원받지 못하고”이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는 “진실하게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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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루카 18,10)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앞에 선 두 유형의 사람을 만납니다. 당시 열심하고 의로운 이의 대명사격인 바리사이와 죄인의 대명사격인 세리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루카 18,11)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루카 18,13)
하느님 앞에서 바리사이는 자기의 공로로 당당하고, 세리는 자기의 부족함에 움츠러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스스로의 결백과 의로움에 자신감이 넘치고, 세리는 자기 죄로 고개도 못 들 만큼 하느님께 송구하고 죄송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오 하느님 ... 제가 ... 와 같지 않으니 감사드립니다. 저는 ... 바칩니다."(루카 18,11-12)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자기의 공을 일일이 설명하며 여타의 죄인들과 같지 않음을 알아주시길 은근히 요구하고, 세리는 그저 자비만을 간청할 뿐입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
예수님께서 누가 봐도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바리사이가 아닌, 명백히 죄인인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신다고 선언하시지요. 그런데 이미 예수님의 말씀 안에 그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애초에 바리사이의 기도를 "혼잣말"(루카 18,11)이라고 표현하셨으니까요.
기도하는 사람마다 나름 기도에 대해 정의를 합니니다만, 가장 보편적으로 보면 하느님과의 대화, 하느님과의 만남, 하느님과 마음 나눔, 하느님과의 일치, 하느님과의 사랑 등으로 이야기하지요. 기도에 무수한 형식이 있고 기도 안에도 다양한 내용이 담길 수 있지만, 꼭 필요한 건 기도를 드리는 이와 대상 되시는 분의 관계성, 즉 상호관계성이 아닐까 합니다. 이것이 빠지면, 글쎄요, 그건 자기 외에 듣는 이 없는 독백, 즉 혼잣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혼잣말은 자기 암시와 자기 위로, 자기 영광으로 흐릅니다. 자기의 공적을 기억하고 자기 확신을 공고히 하며 스스로를 높일 뿐, 굳이 상대가 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느님 앞의 나"에서 시작됩니다. 지고의 선, 지고의 진리, 지고의 아름다움이신 분 앞에 서면 상대적으로 악하고 거짓이며 추한 부분이 없을 수 없는 자기의 실존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완전무결한 분이시면서도 초라한 자기에게 몸을 굽히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 상대를 향해 자연스레 일어나는 참회, 간청, 두려움, 감사, 사랑이 기도랄 수 있습니다. 자비를 간청하는 기도를 통해 세리와 하느님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필요가 생겨납니다. 그의 기도가 하느님을 움직인 것이지요. 이 상호 관계성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십니다. 그 의로움의 증거는 차츰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성은 이웃에게로 흘러넘치게 마련이니까요.
벗님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편이세요? 아니면 냉담하고 계시나요? 교회 안에 냉담한 신자가 열심한 신자보다 훨씬 많아서 걱정이라네요. 하지만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일미사 잘 나오고 열심히 기도생활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사람이 주일미사 빠지기를 밥먹듯 하고 기도생활도 거의하지 않는 냉담신자보다 꼭 더 훌륭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열심한 신자라 하더라도 자신은 "이만하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거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냉담신자가 "하느님 정말 죄송합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라고 고백하는 것보다 하느님 보시기에 더 사랑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벗님, 사정상 냉담하고 계십니까? 큰 죄중에 있어 교회에 못나가고 계십니까? 너무 걱정마시고 오늘 세리처럼 고백하십시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따뜻하게 안아주실 겁니다.
바리사이는 어떻게 하면 율법을 잘 지켜 모세를 통해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열심히 산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세리는 자기가 먹고살기 위해 동족들에겐 매국노로 취급받던 사람입니다.
윤리적인 기준에서 보면 누가 뭐라 해도 세리보다는 바리사이가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똑같은 죄인일 따름이니까요.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그래서 바리사이같이 아무리 훌륭하게 보여도 자신은 죄인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겸손하게 죄인으로 고백하고 있는 세리라는 말씀이지요.
벗님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는 바리사이인가요? 자신은 그래도 잘 사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바리사이인가요? 아니면 세리같은 사람인데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는 세리인가요? 아니면 그것도 모르는 세리인가요? 저는 여러분이 1번일 거라고 믿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3번이시길 축원합니다 잘 살든 못 살든 제 꼬라지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나의 보잘것 없는 수고와 공로를 자랑하기보다 겸손하게 나의 부당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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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비유를 들어 기도에 관하여 가르치십니다. 먼저, 제자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기도할 것을 당부하십니다.(루카 18,1-8 참조) 이어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곧 바리사이들(16,15 참조)을 대상으로 또 다른 비유를 제시하시면서 기도의 올바른 방법과 자세를 가르쳐 주십니다.
비유에서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입니다. 그는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하고 신실한 유다인을 대표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지역에서 로마인들을 위하여 세금을 걷는 유다인입니다.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들을 ‘갈취하고, 불의를 저지르며, 간음하는 이들’의 범주에 몰아넣고 죄인 취급합니다. 아울러 자신이 단식과 십일조 규정을 준수하는 것을 자랑합니다.(18,11-12 참조)
이와 대조적으로 세리는 성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합니다.(18,13 참조)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세리가 의로운 이였습니다.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였지만, 자신의 신앙 행위에 바탕을 둔 자기 확신으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우월한 신분을 자랑하였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쳤기 때문에 의로움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한 세리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에게서 오는 것을 청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는 바리사이들을 넘어서 그리스도인 전체를 향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리사이의 모습에서 벗어나 세리의 모습을 닮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할 때 하느님께 받을 상도 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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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8,14)
마태오 복음은 마리아 남편 곧 예수님의 양부이신 성 요셉을 소개하면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지칭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란 어떤 존재이며,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의로움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신 까닭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일깨우려는 가르침입니다. 혹여 우리 역시도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도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며 스스로 의롭다고 처신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깊이 성찰해 봤으면 싶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같지 않기에” (이55,8 참조), 하느님은 사람의 겉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속내를 보십니다. 이를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이 주님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 주리라.” (17,9~10) 그렇습니다. 인간은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 등과 같이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느님은 인간과 달리 사람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러기에 낮추어진 마음과 부서진 영혼을 하느님은 더 사랑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좀 더 음미하기 위해 톨스토이가 쓴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수록된 짧은 단편 소설 「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두 여인이 현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 여인은 자신을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른 한 여인은 한평생 율법을 지키며 이렇다 할 죄를 짓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현자는 먼저 첫 번째 여인에게 “울타리 밖에 나가 당신이 들 수 있는 큰 돌을 하나 찾아 가지고 오시오.” 하고, 또 다른 여인에게는 “그대는 가능한 한 많은 돌을 가져오되 작은 돌만 가져오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현자는 그 여인들에게 가지고 온 돌을 다시 가지고 가서 제자리에 놓으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여인은 돌이 있었던 곳을 금방 찾아내어 그것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인은 어디서 어떤 돌을 주웠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서 시키는 대로 하지 못하고 다시 현자에게 돌아왔습니다. 현자는 그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저 여인은 자신이 어디서 그 돌을 주웠는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크고 무거운 돌을 쉽게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고, 그대는 어디서 그 많은 작은 돌을 주웠는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거요. 죄도 마찬가지라오.”』
오늘 복음은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는 세리의 기도하는 태도와 스스로 옳다고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바리사이의 기도하는 태도를 비교함으로써 바리사이의 위선을 예수님께서 노골적으로 질책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 세 차례 정기적인 기도를 바치고 있으며, 늘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기 위하여 올라간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서 마저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18,11~12)라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었기에 하느님 앞에 부복하지도 않았고 어깨와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도 모자라서, 뭐 잘났다고 대가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깔을 부릅뜬 채 하늘을 바라보는 그 자세 자체만으로도 그가 어떤 인간인지 그리고 겉모습으로 드러난 꼬락서니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일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그런 모습은 교만하고 자기 잘난 맛으로 똘똘 뭉친 속물임을 감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의 자세야 사랑이신 하느님과 각자의 친밀 정도에 따라 다르게 드러날 수 있지만, 일단 기도의 자세에서 중요한 점은 몸과 마음은 하나, 身心一如라고 하는데, 이 점에서부터 그는 올바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기도가 사랑의 대화라는 관점에서도 그의 기도는 한 마디로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대화, 곧, 듣고 말하는 인격적 대화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향한 자화자찬의 독백이며 넋두리 수준이고, 더 큰 문제는 바로 그의 소위 기도 내용입니다. 선거 유세처럼 자신이 스스로 잘했다고 하는 일을 세리와 비교해서 늘어놓은 것뿐만 아니라, 상대방 세리를 비하하는 악성 뜬소문과 원색적인 비방으로 일관하면서, 그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악습까지 드러냄으로 스스로 자신의 치부를 확실하게 비춰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하는 자세와 태도 그리고 그 내용을 반추하면서 한 번쯤 하느님 앞에 선 우리 자신과 우리의 기도 생활을 성찰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이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8,13)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영적 감각이 둔하다고 하더라도 이내 하느님 앞에 누가 더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을지 알 수 있을뿐더러, 우리 기도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서 스스로 반성하게 되잖습니까? 당연히 하느님의 축복과 인정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내려놓은 세리였습니다. 늘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지, 왜 눈을 감고 감히 하느님을 바라볼 수 없는지 세리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런 세리의 내외적 자세와 마음을 보신 하느님께서 무척이나 기뻐하셨을 것이며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그러기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18,14) 고 분명하게 표현하십니다. 세리의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며, 이것이 하느님 앞에 설 우리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그 영혼이 아무리 쓰레기와 같은 영혼을 황금으로 감싸고 포장한다, 고 해도 그 본모습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금했다 해도 쓰레기는 쓰레기입니다. 금으로 감싼 쓰레기와 같은 영혼은 처음에는 겉모양만 보는 인간에게 착시와 착각을 불러일으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뽀록이 드러나고 마침내 그 속내에서부터 풍기는 악취를 맡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 길 물속 같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을 속이고 기만할 수는 없습니다. 어제와 달리 오늘부터라도 하느님 앞에 올바른 자세와 함께 자기 정직과 진솔을 바탕으로 기도했던 세리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의 자비에, 사랑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기도 생활이 될 수 있도록 합시다. 기도는 사랑의 만남이며, 인격적인 사랑의 만남을 통한 대화이자 소통이며, 마침내 사랑의 친교와 하나됨으로 나아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밀월입니다.
오늘 기도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로 바치겠습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을 만유 위에 흠숭합니다.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지복至福안에서 저는 기뻐합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시는 당신을 뵙고 싶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만을 저는 원합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알려 주소서. 그대로 하리이다. 저와 제가 가진 모든 것은 당신 것이오니 당신 뜻대로 처리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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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일까?”
항상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더 잘 살기 위해 늘 나 자신을 다그치곤 했습니다. 잠을 줄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또 시간을 쪼개 쓰면서 열심히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도 부족해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정말로 열심히 산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나 스스로 그렇지 않음에 텅 빈 마음의 상태를 느낄 때가 참 많았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를 ‘영적 쾌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다그쳐서 영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물질적 쾌락을 따르려는 이유인 것처럼, 영적인 것에 대한 집착 역시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영적 체험만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오히려 영적 교만에 쌓이기 쉽게 됩니다.
성당 안에 머무르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면 어떨까요? 성당 사람들은 정말로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의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이는 영적 쾌락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기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잘못되었다면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영적 쾌락을 넘어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과정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해야 합니다.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세상에 실천하면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식의 판단이 생기는 순간, 영적 교만이 자리를 잡은 것이고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바리사이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십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의 공로와 미덕을 하느님께 자랑하고 다른 이들을 멸시하면서 이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말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 쾌락에 빠져 있으며, 이를 넘어 영적 교만의 상태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세리는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뉘우치면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지합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상태, 이 순간에 비로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물질적인 쾌락에서만 벗어나면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영적 쾌락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야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만이 의롭게 되어 하느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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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 하느님>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 하느님>
오! 하느님
당신께
갈 수 있으나
가지 않는 이에게
당신은
오실 수 있으나
허투루 오지 않으십니다
오! 하느님
당신께
가고 싶으나
갈 수 없는 이에게
당신은
오시고 싶으시니
기꺼이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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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겸손한 죄인>
성직자가 좋아하는 신자는 우거지 신자이고 싫어하는 신자는 원불교 신자랍니다. 우거지는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적인 신자를 말합니다. 원불교는 원망하고, 불평불만하고, 교만한 신자랍니다.
기왕이면 우거지 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올바른 사람이다.’ ‘나는 아무개 보다 더 낫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해롭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산다고 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남을 판단하거나 비난하게 된다면 알맹이를 곁과 속이 다른 이중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온갖 선을 행하고 신앙의 규정을 철저히 지켰더라도 하느님의 눈에 들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없고 오로지 냉혹한 비판과 비난만 있는 사람이 더 무서운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와 “저는 세리와 같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하고 자랑하는 바리사이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누가 하느님께 의롭게 인정받은 사람인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집니다. 생각해 보세요. 기도하면서 남을 험담하고 자기 자랑만 하고 있으니 하느님과 어떻게 가까워지겠습니까?
자기만 옳은 줄 믿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잘못이고 허물이며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에서 오는 죄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의인이다, 불의한 사람이다, 판단하지만 하느님은 속마음을 보십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느님의 눈에 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의인처럼 살아도 내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겸손한 죄인보다 못합니다.
루카 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후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곳에, 그물을 치라는 한 말씀을 받아들이 후 주님을 모시기에 너무도 부족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고기가 보이지 않고 주님만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카 5,8)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은총으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자신의 속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죄로 얼룩진 과거의 삶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미래의 삶이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소명이 나를 재촉합니다. 나의 허물이 나의 발목을 잡을 수 없고 오로지 주님만이 나의 모두이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장애물이 밖에 있으면 쉽게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밖에 있는 큰 장애물보다 안에 있는 장애물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장애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장애를 없애 주시고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응답함에 주저함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행여 자기만 옳다는 과오나 남을 무시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은총의 사순절이 되길 기원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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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의롭고 겸손한 기도와 삶>
-회개와 겸손, 진실과 사랑-
“나는 착한 목자이다(I am the Good Shepherd).”(요한 10,11ㄱ)
교황청 설교가의 세 번째 사순강론 주제 성구입니다. 이어지는 구절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10,11ㄴ)는 주님 말씀이 깊은 위로와 평화, 치유를 줍니다. 착한 목자 대신 어진 목자 예수님이라하면 더 좋겠습니다.
강론을 듣는 분들 맨 앞자리 중앙에 앉아 있는 흰 교황복을 입은 교황님의 겸손한 모습도 좋았습니다. 며칠 전에는 고해소 앞에서 흰 교황복을 입은 채 무릎 꿇고 고백 성사를 보는 모습 역시 너무 거룩하고 아름다워 스크랩하여 렘브란트의 “자비로운 아버지” 그림 위에 붙여 놓았습니다. 참으로 회개와 겸손, 진실과 사랑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이 감동을 줍니다. 새삼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 겸손하고 의로운 기도와 삶임을 깨닫습니다.
“장상이란 생각하지 말고 목자라 생각하십시오.”
30년 전 분원장 시절, 장상 아빠 스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교회나 수도회의 모든 장상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보고 배울 신망애(信望愛)의 모범이 예수님을 닮은 어진 목자들입니다.
3월8-9일 양일 사이 대만의 가톨릭 대학에서는 “가톨릭과 유교와의 대화 모임”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톨릭과 유교는 서로 배울 것이 참 많다”라는 말마디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다산 정약용의 어록과 논어의 공자 말씀을 통해서도 참 많이 배웁니다.
“모두가 각자의 전장(戰場)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으니, 비록 타인에게서 지옥을 마주할지라도 그에게 친절을 베풀라.”-다산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하면 원망받는 일이 없다.”-논어
참으로 이런 이들이 회개와 겸손, 진실과 사랑, 자비와 지혜의 어질고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회개와 겸손으로 초대하는 제1독서 호세아를 통한 시처럼 아름다운 주님의 말씀이 참 눈물겹도록 감동스럽고 고맙고 위로가 됩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에프라임아,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같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이 거룩한 은총의 사순시기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회개와 겸손, 신의와 예지의 촉구입니다. 봄비하면 즉시 떠오르는 19년전 봄철의 자작시 “봄비”입니다. 늘 읽어도 따뜻한 위로에 미소짓게 하는 시입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 봄철
회개하여 겸손과 온유, 진실과 사랑에 이른 이들이 바로 봄비같은 영혼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세리와 같은 이들입니다. 세리의 회개와 겸손, 진실과 사랑의 기도가 가슴을 칩니다. 성전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바로 우리가 미사시작전, 미사중에 자주 바치는 자비송도,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바로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정말 회개해야할 사람이 바리사이입니다. 하느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참 무지의 바리사이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회개와 겸손의 사람, 세리와의 대조가 참 극명합니다. 성전 앞에서 꼿꼿이 서서 “오, 하느님!”으로 시작되는 대화의 기도가 아닌 자기도취의 독백이며 온통 남판단하고 자기자랑하는, 전혀 불필요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정말 낯뜨겁고 부끄러운 자기과시의 내용들입니다. 이것은 정말 기도가 아닙니다.
회개의 기도라면 겸손하고 절실하고 절박해야 하는데 세리와는 너무나 다른 기도입니다. 스스로 의롭다 자부, 자신하는 이런 이들의 회개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너무나 자기중심으로 완고하게 굳어진 무지의 마음입니다. 봄비 은총이 참으로 절실한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무지하고 완고한 마음입니다.
새삼 평상시 회개의 여정에 충실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겸손과 온유,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삶입니다. 기도와 삶 역시,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회개와 겸손의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회개와 겸손, 진실과 사랑, 자비와 지혜의 사람들로 변모시켜 줍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의롭고 겸손한 삶을 살라고 촉구하십니다. 쟁취(爭取)가 아닌 회개한 영혼들에게 주님으로부터 하하사(下賜)되는 의로움과 겸손, 온유의 은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8,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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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자, 이제>
“자, 주님께 돌아가자.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오늘 호세아서는 “자”로 시작하는데 오늘 저는 이 “자”라는 말이 왠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자”라는 말은 “자, 이제 조용히 하고 ---합시다.”처럼
지금까지 하던 것을 멈추거나 떠들고 있던 것을 멈추고
“자”라고 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 “돌아가자.”와 “알도록 힘쓰자.”입니다. 주님께 돌아가자는 것과 주님을 알려고 힘쓰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 주님께 돌아가자.”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주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인데, 누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면 나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주님 앞에 줄곧 있었다거나 지금은 주님 앞에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다시 “자, 진정 주님께 돌아가자.”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있는다고 있지만 제가 참으로 주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비유로 드신 바리사이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하느님 앞에 서 있고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온전히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올바로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 같지만 세리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의 의로움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랑은 다른 인간들 앞에서나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그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곧 세리 앞에 있는 것이며, 하느님 앞에 있다 하더라도 자랑할 수 있는 인간 정도로 하느님을 생각한 겁니다.
진정 그리고 오롯이 하느님 앞에 있다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수 없고, 자기의 의로움을 보고 자랑할 수 없고 자기 죄 외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진정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오늘 복음의 세리이고, “자, 돌아가자.”라고 하는 것도 이제 진정 하느님 앞에 세리처럼 서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 주님을 알도록 애쓰자.”라는 말을 보겠습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주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뇌물을 좋아하고, 우리의 마음보다 십일조를 좋아하고, 겸손한 마음보다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더 좋아하는 분으로 안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것이고, 잘못 알고 있어도 너무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결핍이 있는 인간처럼 알고 있고,
그 결핍을 채우려고 욕심을 부리는 인간처럼 하느님을 알고 있으며, 그 결핍을 인간을 통해서 채우려는 존재쯤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호세아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it is love that I desire, not sacrifice,
and knowledge of God rather than burnt offerings.”
자, 우리도 이제 확실히 압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겸손과 사랑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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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8,14)
<겸덕!>
오늘 복음(루카18,9-14)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11-12)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8,14)
겸덕(겸손의 덕)
우리를 향해 있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결코 바리사이처럼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이 완전한 사랑 앞에서 늘 세리처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 겸손하게 완덕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6,6)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의(믿음)와 하느님을 아는 예지(지혜)와 겸덕을 키워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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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1vu51qS6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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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 14)
올바른 기도는
우리자신을
감추거나
과장하지
않습니다.
모든 기도를
듣고 계시는
기도의 중심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시작기도는
잘 하는데
마침기도는
잘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기도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기도입니다.
기도의 고백은
겸손한
자기성찰입니다.
정직한
자기성찰을
잃으면
기도는
나아갈 길을
잃게 됩니다.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이
의로운
자기성찰의
고백입니다.
기도로
되돌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의
중심입니다.
잃어버린
믿음을
되찾는 것 또한
기도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지면
기도도 깊어집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도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회개의 기도입니다.
자기변명을
기도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변명의
허물을 벗고
하느님 앞에
가슴을 치며
내 탓으로
서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의로운 기쁨입니다.
이 사순시기의
시작도 마침도
하느님을 향하는
온전하고 의로운
기도의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감추지 않고
낮아짐을
청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낮아짐이
의로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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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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