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조, 왕으로서는 행정이나 정책적으로 정도전, 조준 등을 재상으로 세우고 새 왕조의 기틀을 닦는 작업은 충실하게 행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즉위 이전에 과전법을 중심으로 한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조선 건국의 경제적, 정책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건국후 한양천도를 이끌어내어 조선왕조 500년의 왕도를 결정지었고, 국방에도 힘써 김사형으로 하여금 대마도 정벌을 지시하여 고려 말을 지옥으로 만든 왜구들의 대규모 침략을 조선 건국 이후로는 완전히 종식시킵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왕씨들을 멸족시킨 도덕적 흠결을 남겼고, 무엇보다 후계자 선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정종
★★
태종의 차명계좌, 사실 짧은기간 재위한 만큼 군주로서 평가할 건 너무도 없습니다...;;
그래도 2차 왕자의 난을 제외하면 국가적인 큰 우환은 없었습니다.
태종
★★★★★
비록 일생 전반에 수많은 피를 흩뿌렸다고는 했으나 조선이라는 집의 형태를 훌륭하게 완성시킨 가히 세종과 버금갈수도 있는 최고의 군주라 평가합니다.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중앙정부에 집중시켰으며, 공신과 외척을 과감히 숙청하고, 사간원을 언론기관으로 독립시킴으로써 신료간의 간쟁을 활성화하여 신권을 견제하였습니다. 고려 시대의 특수 행정 구역이던 향, 부곡, 소를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키고, 이어서 전국을 8도로 나눠 각 도마다 관찰사를 파견하였으며 그 아래에 부, 목, 군, 현을 두는 지방행정 조직의 대대적인 개편도 이뤄냈습니다.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6조를 설치하여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신문고를 설치하여 민의를 중시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호패법을 실시하고, 대규모의 양전사업과 사원재산 몰수, 도첩제를 통해 국가재정과 행정 유연성을 증진시켰으며, 고려말부터 폐단이 많았던 불교의 힘도 약화시켰습니다.
건국초기부터 경직되어 있던 대명외교 관계를 반전시켰으며,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 기획했던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은 이후100여 년 가까이 조선의 해안을 왜구로부터 안전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종의 정치는 이후 이어질 세종시대의 유산이 됩니다.
세종
★★★★★
갓갓갓갓
32년의 재위기간 동안 민본주의 정치를 실천하면서 다방면으로 조선의 거대한 성장을 이끈 한국사 최고의 군주입니다.
'농사직설'로 대표되는 권농책으로 생산력을 건국이래 최대치로 끌어올렸으며, 화약무기 개발과 진법연구 등을 통한 군사력의 증진은 조선의 국경선을 4군과 6진으로 확정지었습니다. 집현전을 통하여 다방면의 정책과 학문 연구를 주도하였으며, 다수의 경연과 의정부서사제를 통하여 정치활동으로써 토론의 기능을 중요시하도록 하였습니다.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의 계량, 개발을 통해 활자인쇄의 양적화를 이루기도 하였으며, 독자적인 역법인 '칠정산'을 제작하고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일식을 자체적으로 예측할 정도로 조선의 천문학을 당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음악 분야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는데 궁중연회, 의례악기의 자체생산 활성화를 이뤄내고, 세종 본인이 스스로 정간보를 창안하였으며 '여민락'과 종묘제례악곡 여러 수를 작곡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노비에서부터 고아, 노인, 장애인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복지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조선 전역에 시행한 대대적인 여론조사를 통해 전분 6등법, 연분 9등법 이라는 세제개혁을 이뤄냈습니다. 한양내에 시보장치로 자격루와 앙부일구를 설치하고, 측우기와 수표교를 설치하여 강수량을 측정하였으며, 거주지내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 금화도감을 설치하는 등 공공사업에도 힘썼습니다. 그리고 설명이 필요없을 '훈민정음'은 오늘날에도 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다만 약간의 흠이 있다면 중앙집권 강화를 위해 실시하였던 '수령고소금지법'이 있다고 봅니다.
문종
★★★☆
세자시절 역대급 자질을 보였지만 재위기간이 너무도 짧습니다. 군사적 역량이 뛰어나 오위진법을 완성했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완료했습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임금이 되었으며,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대신들의 전횡을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경진북정으로 여진족을 정벌하고 조선초기부터 북방을 소란스럽게 했던 이만주를 참살하였으며, 민생을 고려하여 수령고소금지법을 폐지하고 누에치기를 장려한 군주로서의 긍정적 모습도 있습니다.
예종
★★☆
왕권강화에 힘썼으나 이 때문에 장인이자 권신인 한명회와 사사건건 대립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배후에는 항상 한명회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따라다닙니다. 기질 자체는 뛰어난 임금이었습니다.
성종
★★★★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친정을 시작한 이래 원상제를 혁파, 경연에서 대신의 참여를 줄이고,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을 적극 활용하였으며, 사림을 등용하여 기존의 한명회와 같은 훈구대신을 견제하였습니다. 또한 홍문관을 새로 창설하고, 독서당 제도를 시행해 인재들의 육성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개혁으로 왕권을 다시 강화하였고,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도덕국가로서의 조선을 바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국방력이 약해졌으며 후계자 선정에 실패하였습니다. 또한 본인이 키워준 대간으로 인해 죽는 날까지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연산군
☆
이놈 라이벌은 고려의 충혜왕이라죠?....
중종
★★☆
조광조의 개혁도, 중종 자신의 정치도 실패하면서 권신들의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중종 개인을 보면 나약한 척, 안 되는 척 하면서 결국 숙청하고 싶은 사람을 끝내 숙청해 내고, 하고 싶은 건 결국 자기 뜻대로 해내고 마는 '양의 가면을 쓴 늑대' 가 연상 된다는 평이 많습니다.
인종
★★
기질은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일찍 병사했습니다.
명종
★★
재위 말년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려 노력했지만 재위 내내 외척(윤원형 일가)의 발호가 심했으며 그로인해 수많은 사림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선조
★★☆
즉위한 이래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의 사면과 재등용을 통하여 부패한 권신세력을 축출하고, 기축옥사랑 건저의 문제를 통해 붕당의 균형을 조절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대여진 정책에서 니탕개의 난과 우을기내를 진압한 것도 군주로서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1592년... 군주로서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광해군
★★
최고의 세자라도 최고의 군주는 될 수 없다는 걸 보여준 인물입니다. 개인의 인간적인 문제를 배제시키더라도 대중들의 인식과는 다르게 대동법의 실시와 확대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지나친 궁궐공사로 인해 국가재정에 막대한 손실을 불러왔습니다. 다만 외교적 안목은 내치에 비하면 명민한 편이었습니다.
인조
★☆
명분론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등극하지만 스스로도 세자와 세자빈을 폐위시키고, 기자헌 등의 명신을 제거하는 등 광해군에 뒤지지 않는 천륜에 어긋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공론을 잘 모으면서, 때론 신료들을 압박하며 그 흐름을 이용할 줄도 알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왕권을 유지했습니다. 양대호란은 생략;;
효종
★★★☆
매우 근검하고 기질적으로 올곧으면서도 양대호란으로 망가진 민생의 회복을 위해 힘쓴 임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김육을 중용해 본격적으로 대동법을 시행하였고, 공론을 중시하여 산림의 인사들을 등용하였습니다. 군사력 증진이라는 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보이기도 하였으며 이로인해 '문약에 빠진 조선을 무(武)의 기치를 내세워 개혁하려 한 현실적인 개혁 군주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현종
★★☆
즉위하자마자 예송논쟁에 휘말립니다. 거기다가 경신대기근이라는 역대급 헬게이트도 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가작통법을 시행, 대동법을 확대하고 양전사업을 실시하는 등 민생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숙종
★★★☆
끝판왕 정통성을 타고나 즉위하자마자 송시열을 날려버린 이래 많은 환국을 일으킨 것은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왕권을 강화한 숙종의 정치는 영조와 정조대 치세의 근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경종
★★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정쟁에 치이다가, 결국 즉위 4년만에 사망합니다. 하지만 숙종 말년의 수렴첨정 경험을 보면 자질은 나쁘지 않은 듯 보입니다. 독살설이 있습니다.
영조
★★★★
기본적으로 노론에 기반하여 정치를 시작하였지만, 기질적으로 훌륭하여 자신의 생활을 절제하며 신하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탕평을 표방하며 노론과 소론간의 균형을 유도하는 시도를 보였습니다.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죄를 엄히 물었으며, 균역법을 실시해 조세 제도의 모순을 개혁했고 서원의 중복 설립 금지, 청계천 준설, 서얼 차별 완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습니다.
통치 기간동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전화가 완전히 수습되고 안정을 되찾았으며, 청과의 교류를 늘려 서방문물의 유입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출신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나머지, 사도세자를 지나칠 정도로 질책하고 크게 비난하여 엄청난 비극을 탄생시키고 말았습니다...
정조
★★★★☆
영조의 뜻을 이어 정치를 하면서 탕평을 실시하여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제수해 정치적 동료로 삼았고, 남인인 정약용과 서얼인 박제가 등을 등용하였습니다.
신해통공을 통해 금난전권을 폐지하며 경화되었던 조선의 상업에 자유 활성화를 유도했고,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화성을 축성하며 군제 개혁과 신도시 건설을 주도하였습니다.
또한 정조는 자신의 정치 기반을 다지고 통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더더욱 성리학적 군주를 자처하며 송시열을 송자로 높이는 등 공론 조율에 힘을 기울여서 사화나 환국 없이도 탕평파인 시파가 요직에 앉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 당시에는 청과 서양의 문물 유입이 더더욱 활성화 되면서 다양한 학문들이 더더욱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조도 문체반정의 사례에서 보았듯 그 보수성을 극복하지 못했으며, 차후에 시작될 세도정치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기에 평가가 떨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순조
★☆
정조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어 노론 벽파에 휘둘리고, 나중에는 세도정치에 휘말린 허수아비 임금이었습니다.
아들인 효명세자가 개혁의지를 보였으나 지나치게 일찍 사망하였습니다.
헌종
★
세도정치에 휘둘린 허수아비 임금입니다.
철종
★
세도정치에 휘둘린 허수아비 임금입니다.
고종
★★
초반에는 흥선대원군, 후반에는 민씨 외척들과 열강의 간섭에 휘둘리어 자신만의 정치를 펴지는 못하였습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근대화를 향한 나름의 노력은 하였으나 독립협회 해산만 봐도 결국 봉건의식을 극복하지 못한 군주라는 게 여실히 드러납니다. 시대보정을 해줘도 좀처럼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든 군주...
첫댓글 진짜 세종대왕 소리가 그냥 나오는게 아님...대단
단종이 꽤 총명했다고 하는데 뒤를 봐 줄 사람들만 제대로 서 있었다면 어떨까 싶어 아쉬워요.
선조 인조 별반개도아까움
일단 연산 광해 2명은 그 밑으로 깔고..
부민고소금지법은 당대에도 평가가 좀 갈리는 법이었는데 현대적 관점에서는 세종의 한가지 흠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근데 그 법을 몇백년이나 그대로 놔둔 후대 왕들도 문제인듯.
선조는 별 두개면 적당할것 같습니다.
정유재란 기점으로 이 양반은 임란 직전에 인사정책으로 얻은 까방권 완전히 상실했으니..
인생은 정종처럼
세종은 이정도면 시간여행자지 한글창제에서 게임끝
이런 글 존잼
ㄷ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