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우리”는 둘러싸여 있고 보호되고 있는 안뜰(정원)같은 곳으로, 안과 밖을 연결하는 하나의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요, 넘어 들어가는 이는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요한 10,3).
여기서, “목자”는 ‘먹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 ‘양식을 먹이는 자’를 말하고, “양”은 말씀이 떨어지면 말씀을 찾아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문”은 들어오면 누구나 구원받고, 드나들면서 목초를 찾아 얻을 수 있는 문입니다. 그리고 ‘목자와 양’는 하나하나 개별적이며 지극히 인격적인 친교를 나눕니다. 곧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양들을 문밖으로 이끌어내며, 앞장서 가고 그들과 동행하며 낯선 사람들로부터 보호해주며, 양을 그를 따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목자이며, 양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문지기입니다. 곧 그리스도는 양들에게 “말씀”이라는 문을 열어주는 ‘문지기’이며, 또한 양들이 “드나드는 문” 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문은 드나드는 통로입니다. 곧 문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문”은 “드나드는 문”으로 하나의 문이지만 두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방향은 밖에서 “양 우리” 안뜰로, 다른 한 방향은 안에서 밖으로 향합니다. 한 방향은 하늘에서 인간을 향하고, 다른 한 방향은 인간으로부터 하느님을 향합니다. 바로 이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곧 ‘말씀의 문’을 통해, 말씀이 나오고 들어갑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문”이라 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통해 나가는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 들어가는 문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문은 오히려,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그렇습니다. 예수님이란 이 “문”은 ‘들어오는 문’이요 동시에 ‘나가는 문’입니다. 그러기에, 만약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이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목자에게 귀 기울이지도 않고 목자를 따르지도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양들은 그(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3-4)
그렇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울타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단된 울타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한 열려진 울타리인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세상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처럼, 당신께서도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따라 문을 드나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문밖에서 백성들이 굶주릴 때,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먹을 것을 주라’고 가르치셨습니다.”라고 하시면서,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라고 그 소명을 일깨우셨습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는 바로 이처럼, 부여받은 소명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목소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뽑은 것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것이었듯이 말입니다. 그러기에,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타자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삶에 응답하는 것이 곧 성소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소는 사랑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귀한 사랑을 성소로 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선사하신 이 아름다운 사랑의 성소를 불태워야할 일입니다. 아멘.